[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① 시성(詩聖) 단테의 성시(聖詩) 「신곡」
영적 순례의 끝에서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을 묻다
지옥에서 연옥거쳐 천국에 이르는 단테의 회고적 반성 담긴 「신곡」
거짓 즐거움에 속아 하느님 떠난 후 정치적 불운 계기로 영적 여정 체험
「신곡」을 통한 단테의 역사적 사명
인류의 회심을 촉구하는 일과 인류의 참 행복을 선포하는 일
발행일2021-01-10 [제3227호, 12면]
중세 서양의 문화, 종교, 사상, 학문 등을 총체적으로 계승한 단테의 「신곡」은 ‘모든 문학의 절정’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거짓 즐거움에 속아 하느님을 떠났던 단테는 정치적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영적 여정을 체험한다. 이 체험 이후 쓴 「신곡」에는 그의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 깃들어 있다. 지옥에서 시작해 연옥을 지나 지상 낙원을 거쳐 마침내 천국에서 하느님과 마주한 단테. 하느님을 만나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 끝에는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남았다. 이 순례 여정을 통해 단테가 그리스도인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단테 서거 700주년을 맞아 김산춘 신부가 친절히 안내하는 「신곡」의 여정으로 떠나보자.
1321년 지금으로부터 꼭 700년 전 한 시인이 이탈리아 라벤나를 떠나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의 이름은 단테 알레기에리!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할 「신곡(神曲)」의 저자이자 주인공이다. 지상에서 「신곡」을 통한 그의 역사적 사명은 세례자 성 요한처럼 인류의 회심을 촉구하는 일과 그리스도 예수처럼 인류가 누릴 참 행복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나의 은사인 이마미치 토모노부 선생은 50년이란 긴 연구 끝에 80세가 되어서야 「단테 신곡 강의」라는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머리말에서 자신은 「신곡」에서 두 가지 가르침을 얻었다고 밝힌다. 하나는 한 개인이 어떻게 시대의 억압에 대항했는지이며,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이 참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였는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곡」은 추방당한 삶 속에서 자기 자신과 하느님에게 충실했던 한 인간이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말한다. 「신곡」은 이탈리아만의 고전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고전이 된 것이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9살 때 베아트리체라고 하는 한 소녀를 처음 만난다. 소녀는 소년에게 하느님의 기적처럼 보였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딸이 아닌 신의 딸처럼 보였다.” 단테는 18살 때 다시 한번 천사와도 같은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불행히도 1290년 향년 24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지상에서 피렌체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단테의 마음의 하늘에서 그녀는 하느님의 지혜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모해갔다. 단테는 1283년 이미 다른 한 여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들을 낳아준 아프리카 여인의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이름 역시 단테의 책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젬마 도나티’. 단테는 그녀에게서 3남 1녀를 얻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삼형제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애제자들의 이름이다. 또 천국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구술시험 문제인 향주 삼덕 신망애(信望愛)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딸 안토니아는 라벤나에서 베아트리체 수녀로 재등장한다.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에 걸려 있는 도미니코 디 미켈리노 ‘단테의 신곡’(1465).
베아트리체 사후 10년간 단테는 거짓 즐거움에 속아 하느님을 떠났다가 1300년 이후 정치적 불운이 계기가 되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영적 여정을 체험한다. 그 체험의 회고적 반성이 「신곡」인 것이다. 단테는 그 정치적 불운 덕분에,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헤맨 이스라엘 백성처럼, 지옥 같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거의 20년간을 이곳저곳을 문전걸식하며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마음 깊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떠나야 할 것이니, 망명의 활이
가장 먼저 쏘는 화살이 그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또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곡:천국」 17, 55-60 이하 김운찬 옮김)
종신 유배는 단테에게는 쓰라린 불행이었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단테는 피렌체 귀환이란 환상마저 버렸다. 단테는 자국 이기주의를 초월해 보편적인 시야를 얻는다. 지옥 편과 연옥 편을 대부분 끝냈던 1308-1313년 사이 단테는 모든 도시국가를 분열시키는 폭력에 대한 유일한 합법적인 보증으로서 제국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그는 황제 하인리히 7세를 새로운 정치적 메시아라고 믿었다. 그러나 황제는 1313년 이탈리아 원정 중 급사하고 말았다. 베로나에 머물던 1315년 단테는 영주 칸 그란데 델라 스칼라에게 헌정한 천국 편을 시작하지만, 제17곡에서 영주의 환대에 대해 감사하며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1319년 마지막 유배지가 된 라벤나로 향한다. 왜 그는 황제 대행이 있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로 갔을까? 라벤나는 제국의 뒤풀이 같은 곳이다. 보에티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대한 기억, 관상가 베드로 다미아노의 영적 현존, 산 비탈레와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 모자이크엔 비잔틴미술의 잔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가족들과의 재회, 천국 편을 마무리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을 수도 있다.
단테의 일생은 숱한 패배와 영원한 승리의 합주곡이다. 그는 영적 탐구의 꾸불꾸불한 길을 걸으며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웠고 마침내 그 끝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었다. 도미니코 미켈리노가 그린 단테의 초상화는 지금 피렌체 두오모에 걸려있다. 단테의 왼손에는 피렌체에 대한 선물로 「신곡」이 펼쳐져 있다. 반면 오른손은 저 너머 세상의 세 영역 지옥, 연옥, 천국을 가리키고 있다. 그 도시의 문들은 굳게 닫혀있다. 이제 그 문들을 열고 그 안의 비밀스러운 풍경들을 들여다보자.
◆ 단테는...
1265년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난 단테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시인이다. 문학과 학문으로 높은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던 그는 이를 기반으로 당시 공화국이던 피렌체의 정치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300년에는 피렌체를 다스리는 6명의 행정장관 중 1명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당대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겪고 험난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망명 생활 중에도 창작에 매진했던 단테는 죽기 전까지 「신곡」을 창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단테는 결국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1321년, 향년 56세로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김산춘 신부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1985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신부는 1993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연구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가톨릭문인회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