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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주일 전부터 카페에 들어오면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
도무지 편치 않았다. 항상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카페의 문을 열곤 했다. 그것은 나도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느낌은 경험으로 인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생각에 대한 느낌이다.
영의 감각이 조금 발전하면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을 알고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회에 가보면 사람들의 의식 수준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그 중에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이들은 어느 정도 있는지, 이들이 무엇을 알고 느끼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카페에 들어올 때 느끼는 불안한 느낌은 카페에 대해서 분노하고 불쾌하게 느끼는 이들의 마음을
나의 영혼이 감지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이 공격적인 글을 쓰려고 하면 실제로 쓰지 않아도
그것은 나의 레이더에 감지되었다. 생각만 해도 상상만 해도 그것은 나에게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많이 모이게 되면 나는 많이 아프게 된다. 고통을 느끼며 불안하다.
기도하고 물리치지만 다시 또 쌓이면 다시 물리쳐야 한다. 솔직히 그러한 싸움은 피곤한 일이다.
주님께서도 그러한 일을 많이 겪으셨다. 사람들이 생각만 해도 고통을 느끼시는 것 말이다.
주님은 병을 고치시면서 마음 속으로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그들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씨.. 마음 속에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나?
하지만 영계에서는 생각이나 상상이 실제의 행동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것은 똑같이 영의 흐름을 가져온다.
물론 말하고 표현할 때 그 기운이 좀 더 강렬해진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은 역시 하나의 생명이며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생각이 순결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순결이 아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기만 해도 그것은 범죄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아이들이 생각과 영이 좋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지적하고 정화시킨다.
그들의 마음이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으면 같이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차츰 흥분과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게 된다.
아내는 때로는 웃으면서 말한다.
짜증을 낸다거나 반항을 한다거나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생각만 해도 그것이 제재를 받는 데는
우리 집 밖에 없을 거야.. 라고..
하지만 그것은 좋은 환경이다. 아이들은 이제 훈련이 되어서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불쾌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거나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면 그것을 처리하려는 기도를 하게된다. 그리고 처리한 후에 기뻐하면서 웃는다.
아이들은 이제 영적 전쟁이 곧 마음의 전쟁이며 마음의 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지킬 때 항상 천국의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예원이가 3년 전인 중학교 1학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예원이가 이쁘다는 소문이 많이 나서 3학년 남학생들이 사귀자고 자주 교실로 찾아왔다.
아이가 자랄 때는 음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딸에게는 아빠와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며 아들은
엄마와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성 에너지를 공급하며 충족시킨다.
그래서 이성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아이는 이성 에너지에 대해서 굶주리지 않으므로 여유가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모자란 사람들은 이성에 집착하고 빠지게 된다.
남자 아이는 포르노와 같은 것에 빠지게 되며 여자 아이는 남자친구에게 빠지고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이성에너지가 모자라면 잘 자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향은 죽을 때까지 간다. 어렸을 때 아빠의 애정이 부족한 딸은 평생을 그러한 굶주림 속에서 살게 된다.
성의 중독과 같은 증상의 근원도 이러한 원리이다.
물론 이것은 주 안에서 해결책이 있는데 아무튼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니까 넘어 가기로 하자.
이것은 나중에 자녀 교육의 영성에 대한 책을 낼 때 다루어야 하는 문제다.
예원이는 아빠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에게 빠질 염려는 별로 없는 아이였다.
배가 부르면 군것질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선배들이 무서운 때니까 하도 권하는 바람에
자기 친구들하고 그 남자 아이들하고 여러 명이 어울려서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다.
아는 노래가 없으니까 다른 이들의 노래하는 것을 보다가 왔다. 두 번을 그랬다.
보통 때보다 귀가 시간이 늦은 것은 아니지만 아빠에게 혼이 날까봐 예원이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자기 몸에 묻은 안 좋은 기운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혼이 나는 것보다도 예원이는 아빠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원이는 두 번 다 아빠에게 혼이 났다.
나는 아이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한 지는 몰랐지만 그녀의 기운이 너무 좋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영의 상태가 나쁘냐고 혼을 냈다. 네가 이렇게 영성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집에서 너를 키울 수 없고
기숙사로 보내겠다고 까지 말했다. 에고.. 그 말은 좀 심하기는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며칠을 아팠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바깥에는 온갖 악령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므로 긴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영의 침투를 겪지 않지만 집안에서는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있기 때문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면 방어하지 못하다가 앓을 수도 있다.
그 때 예원이는 많이 놀랬다. 그래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세상적인 물이 들면 아빠가 많이 아프겠구나 생각하고 놀랬다.
그 때 예원이는 많이 울고 다시는 그러한 곳에 가지 않았다.
영적 기운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음과 생각은 물질세계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에는 녹음된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 동기를 보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인정받는 것과 영계에서 인정받는 것이 다른 것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은 드러난 것을 보지만 영원한 곳에서 주님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시고 드러내신다.
영이 자라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모든 이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며 감사하게 되고 희생과 헌신을 기뻐하게 된다.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이들의 유익과 즐거움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영이 눈을 뜨지 않으면 보이는 것과 물질과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초조하며 화를 내고 미워하며 경쟁하게 된다.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어서 썩어질 제한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사랑하고 구할 때
점점 영혼이 빛을 떠나 어두움 속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물질은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될 뿐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썩어질 것을 구하다보면 그 마음도 같이 썩게 되는 것이다.
영을 느끼게 되면 사람들을 외적 조건으로 보지 않고 그 영혼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보게 된다.
발달할수록 그에게서는 천국의 향취와 보화가 나타나게 되며 발달하지 않을수록
미움과 고집과 악성과 지옥의 악취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이 발달할수록 그 사망의 냄새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외모가 아름다워도 지성이 훌륭해도 지위가 높아도 그 냄새가 견디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외모가 아름답지 않고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내면의 보화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는 인기가 없지만 영의 느낌이 있는 이들은 이들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아직 2-30대의 젊은이들은 영혼이 열릴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으로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경험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아직 충분히 육성이 후패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의 분량이 부족하고 고통의 분량이 부족하다.
아직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로 아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좀 더 많은 심장의 찢김과 눈물이 필요하다. 반신불수의 몸이라든지..
그래서 특별한 절망 상태에 있거나.. 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대체로 2-30대는 영적으로 애굽 상태에 있다.
영혼의 깨어남과 발전은 은사를 몇 개 경험하고 몇 년 금식하고..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바르게 알고 그 길을 가며 순종하며 꾸준히 가야 한다. 성질이란 한 순간에 죽지 않는다.
아무튼 죽는 순간에도 여전히 어린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비참한 재앙은 없다.
삶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사소한 것에 삐치고 고집을 부리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주님을 의뢰하는 법을 모르며 사소한 일에 근심한다면.. 그는 정말 많은 세월들을 허비한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성장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편하게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카페에 나쁜 흐름이 점점 더 많아져서 아프고 힘들어졌다. 표면에 영의 흐름이 좋지 않은 글들도 있었지만
나타나지 않은 흐름의 압박도 점점 더 많아져서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전에 카페의 여러 혼란스러운 글과 공격적인 쪽지들로 인하여 몹시 힘들었던 날..
모임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아프고 힘들 때 찬양을 드리며 집회를 인도하면 좋아지기 때문이다.
감사와 찬양은 원래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 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보좌에 올라간다.
얼마 전에 간수치가 140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정상이 40이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밀 검사를 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40도에 가까운 고열이 몇 주간 계속되어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옷이 물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하루에 열 번이 넘게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하지만 그 때 이를 악물고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인도했을 때 열이 다 사라져 버렸다.
눈물 속에서 온갖 악을 쓰면서 두 번의 예배를 드렸을 때 거의 다 치유가 되어 버렸다.
강단에 올라갈 때는 비틀거리면서 걸어갔고 앉아있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중에는 일어나서 마구 뛰었다.
예배란, 찬양이란 그런 것이다. 편안할 때 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울면서 감사를 드리면 언젠가는 웃으면서 감사할 때가 온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원망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혀를 깨물고 악한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과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한다.
그것이 하늘 보좌에 올라가며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왕궁에서의 찬양보다 감옥에서의 찬양이 좋은 것이며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 날도 예배를 인도하고 아주 좋아졌다. 기쁘고 회복되어서 집으로 왔다.
그 날 밤에 다시 카페로 들어와 글을 읽었다. 순간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칠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기침을 했더니 가래에 섞여서 피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나는데 마음 같아서는 밤거리를 질주하면서 미친 듯이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데구르르 구르고 싶었다. 좌우간 안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 글이었다. 그러나 그 글에서 흐르는 기운이 악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고통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낄 때 나는 글을 읽기 전부터 내용을 알기 전에 그것을 느낀다.
내가 어느 책이 좋다고 느낄 때 나는 책의 내용을 읽기 전에 그렇게 느낀다. 그 책의 영적 기운을 먼저 느끼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이 영적이고 좋아도 저자가 주님을 모르면 나는 그 책에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이 너무 끔찍해서 잠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다. 2시가 넘은 시간이다. 정말 아내를 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잠자고 있는 아내를 깨운 것이 결혼 20년 동안 지금까지 1-2번 정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잠자는 아내를 깨우지 않는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고통 때문에 피곤한 아내를 깨운다면 그것은 좋은 남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아내가 아픈 어깨를 주물러줄 때마다 나는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것이 그녀의 기쁨이라고 하는데도 아직도 어색하고 미안하다.
나는 아내에게 깨워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기도해달라고 했다.
아내는 놀라서 기도해주고 마실 것을 가져다주고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했다.
나는 이제 도저히 더 이상 카페를 운영할 수 없다고 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통이 며칠 정도 더 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내의 도움으로 인하여 많이 좋아졌다.
그러한 고통은 최근 몇 개의 글 때문이 아니라 5년 동안 비슷하게 쌓여왔던 고통이 이제 한계점에 이른 것 같았다.
한동안 아내는 내 곁에 오지 못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심장이 너무 아프다고 조금 물러섰다. 아내도 영이 많이 예민한 편이다.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만 고통을 짊어지셨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이 죄 많은 땅에 오시는 그 순간부터 이 죄악의 땅은 그분에게 고통이셨다.
그 공기를 마시는 것부터 그분에게는 고통이셨다. 단지 그분의 사랑이 고통의 무게보다 컸을 뿐이다.
그분은 온 몸이 부서졌어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죄악의 냄새들은 그분에게 엄청난 고통이 되는 것이었다. 빛은 어두움을 힘들어한다.
며칠동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쥐어뜯으면서 카페의 정리에 대한 글을 썼지만 간신히 글을 올렸지만
하루만에 100개가 넘는 덧글들이 순식간에 올라와 그들의 아픈 마음을 쏟아내는 것을 읽으면서
도저히 카페를 닫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죽었지 이 사람들에게 아픔을 줄 수는 없었다.
아내는 문을 닫더라도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것은 비겁하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이 맞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다시 카페를 계속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계속 운영해가야 한다.
이제 끝내려고 하던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또 다시 통증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야기 한 가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주님을 아프시게 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주님이 아프실 때 이 카페에도 나에게도 같이 통증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기본 원리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무서워서 글을 쓰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나쁜 기운이 나온다면 어디에서 나오는가, 왜 나오는가,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궁금할 것이다.
나는 간략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부정적인 고백이나 근심 걱정을 늘어놓기, 남을 비판하거나 험담하는 것.. 그러한 말이나 글은 그 공간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어두움들이 있다.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나의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이다.
그녀는 영적으로 몹시 예민하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다.
그녀가 버스를 타면 주님은 그녀에게 그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상태와 문제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그를 많이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라..
그러면 누나는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 간혹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난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은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
주님은 그녀에게 중보의 사명을 주셔서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셨다.
그녀가 어느 날 거리에서 구걸하는 이들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서 주님께 말했다.
그녀는 동정심이 많았다. 힘든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소유욕이란 아예 없었다.
어릴 때부터 누가 그녀를 보고 [언니.. 그 시계 이쁘다..] 하면 [너 가져..]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주님께 [주님.. 저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사람은 그리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얼마의 기간 동안만 시련을 겪으면 거기에서 나오고 고난이 끝나게 될 것이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다.
나를 모르면서도 자기가 잘 믿고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나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다.]
그 말씀은 그녀에게 충격이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젊은 나이로 하늘 나라에 갔다.
그녀는 사람들을 돕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체험에 대한 책도 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환자가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주님은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녀의 사명은 신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에 거절했으나 계속적인 강권에 결국은 가서 기도해주었고 아주 건강하던 그녀는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이 되지 않아서 하늘나라로 갔다.
영적으로 예민해진다면 그는 세상보다 하늘에 가깝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귀들의 공격도 많고 사람들의 요구도 많다. 그러므로 주님께 순종을 하지 않는 다면 그는 아주 위험하다.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자기의 사명을 넘어서면 안 된다. 그 마음과 생각이 순결하지 않다면, 영계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무엇이 정말 불쌍한 것인가. 무엇이 정말 주님을 아프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높은 마음이다.
그것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유지할 수 없다.
영이 예민한 사람들은 세상이 워낙 악하고 험한 곳이기 때문에 항상 다른 곳에 가면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아프고 그럴까?
아주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깨지기 쉬운 그릇같이 힘든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다르다.
누나가 영적 세계를 경험하고 사람의 마음과 영에 민감해지면서 확실해진 인식이 있었다.
그것은 거칠고 사납고 무식하지만 소박한 사람들. 예를 들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든지
노가다를 하는 사람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따뜻함을 많이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세련된 이들의 앞에서는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교회 밖의 세상보다 교회 안에서 그녀는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로마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박사 학위의 의미가 없어져서 중단했으니까
지성적인 인물에 속할 것이다. 그녀는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고 기억력이 우수해서 한 두 페이지 정도는 한번 들으면 외웠다.
어학실력도 뛰어나서 짧은 시간에 원어민처럼 언어를 구사하는 편이었다.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어릴 적부터 글 쓰기도 아주 좋아했다.
그러니 성향적으로는 거칠은 사람들보다 문화적이고 세련된 사람들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세계를 경험하면서 그녀는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세련된 이들과 같이 있는 것을
몹시 힘들어했다. 주님이 그런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하신다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번 말하곤 했다.
그것은 나의 경험도 비슷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온갖 악한 영들의 역사가 많다. 나도 악한 문화와 적지 않게 접촉했다고 할 수 있다.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해본 기억도 많고 조폭같이 폭력적이고 거칠은 이들도 많이 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밤 새워 포장 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도 내게는 즐거웠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니 사이다를 대신 마시지만 그들은 혀꼬부라진 소리도 기독교에 대해서 물어보고
나는 장난을 치면서 대답을 하곤 했었다. 그것은 내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악한 문화가 많다. 포르노와 같은 더러운 문화, 잔학한 살인 장면들, 괴기 영화의 장면들..
인터넷을 접하다 보면 그러한 악한 장면들과 자기도 모르게 접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조심하고 깨어있는 한 그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오래 전에 한 동안 기원에 출입하면서 폭력적인 사람과 교제를 나눈 적이 있었다. 덩치도 몹시 크고 주먹도 아주 강해서
화가 나면 사람을 반 죽을 정도로 심하게 때리곤 했다.
게다가 웬 여자 관계가 그리 복잡한지 만날 때마다 자랑하면서 온갖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에게 부드럽게 당신은 가정 파괴범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놀라서 온갖 변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때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에게 잠간 기도를 해주었는데 이상하게도 무서운 고통이 그에게 임했다. 우습게도 덩치도 크고 폭력적인 사람이
겁은 무지하게 많아서 너무 아프다고 온갖 엄살을 부리더니 그 다음부터는 자기도 신앙을 가지겠다고 한 동안
나의 보디가드 식으로 따라다녀서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골치가 아팠던 것은 그가 따라다니는 것이 전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도를 하는데 옆에서 인상도
험악하게 생긴 덩치가 큰 사람이 [좋게 말할 때 믿어!]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노려보고 있으니 도움이 될 리가 만무했다.
아무튼 그는 내가 해주는 주님과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고 계속 해달라고 졸랐다.
인상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순박한 면이 있었다.
교회를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는지 교회가 시끄럽다고 트랙터를 몰고 교회 건물을 받아버려서 무너뜨린 적이 있는
사람이 아래 층에 살던 적이 있었다. 그는 교회와 목사를 아주 미워하고 싫어했는데 이상하게도 나와는 친하게 지냈다.
그도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이고 입도 험악한 사람이었는데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도와주곤 했다.
나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그냥 그의 집으로 놀러가서 바둑도 두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는 그러한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목사와 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의외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이러한 사람들이 좋았다. 거칠은 사람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상의 사악한 분위기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고통을 느끼는 곳은 교회였다.
거칠고 사납고 막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따뜻함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자기 신앙이 좋다고 느끼는 이들,
멋진 언어를 구사하며 기도를 길게 하면서 온갖 세련된 냄새를 풍기는 이들에게서는 그 영혼의 냄새로 인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상하게 차가운 느낌이었고 영혼의 온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현하기는 이상하지만 세상의 막가는 사람들은 비록 표면은 악하고 거칠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다. 말하자면 내적인 겸손이 있었다.
그러나 신앙인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던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선민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은 옳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며 세상의 사악한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것은 바른 마음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높은 마음이다. 그리고 자기 의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있는 곳에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
그들은 영적인 실제를 가지고 있었을까.. 내가 느끼기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을 [더러운 것들..] 하고 정죄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와 천국의 실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내가 느끼기에는 그들의 영혼은 막혀 있었다. 나는 그러한 기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워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신앙의 모범생으로 여겨지는 이들 중에서 나는 그러한 고통을 많이 느꼈었다.
그들의 영혼은 과연 안전한 것일까. 그들은 주님과 천국과 가까운 것일까.. 오직 주님 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누나나 내가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수록 동일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주님은 외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보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어린아이같은 사람들을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외식하는 것을 싫어하시며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며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영혼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단순한 영혼들이 신앙을 가져도 곧 쉽게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앙의 기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낮아지는 것이다. 절망하는 것이다. 낙심하고 절망할 때 주님은 임하신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처럼 낮고 상한 마음, 지친 사람에게 주님은 임하신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없다.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가. 없다.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주님이 임하실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주님의 임하신 결과이지 우리가 애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갈망은 절망한 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기술이 아니고 대책이 없는 사람이 갈망하는 것이다.
갈 데가 없고 대책이 없으니 주님 앞에 엎드러지는 것이다.
왜 갈망이 없는가. 그것은 아직 충분히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자신감이 있다.
아직도 자신은 괜찮은 사람인줄 안다. 그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자기 신앙이 대단하고 자기 지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
어디서나 툭하면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기간이 필요하다.
낮아지지 않는 한 사람은 죄 가운데 죽는다.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람들을 괴롭힌다.
자기를 드러내고 지옥의 영으로 산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음란죄가 있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 그러나 음란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그것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더 심판을 받는다.
살인죄가 있다. 그것은 악한 죄이다. 그러나 그 죄를 짓는 사람보다 그것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더 심판을 받는다.
죄는 악한 것이지만 죄인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동일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죄를 지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분노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자기의 안에도 같은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분노한다.
온유한 자는 혈기 있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며 순결한 자는 음란한 자를 정죄하지 않는다.
마음이 넉넉한 자는 인색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같은 속성만이 서로 미워할 수 있다.
강아지가 다른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같이 짖듯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기 속의 동일한 죄성이다.
그러므로 남이 잘못에 대하여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잘못을 통하여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좋다. 심판은 주님의 권리이며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심판하는 것은 무서운 죄다.
음란죄보다 살인죄보다 강도 짓보다 도둑질보다 더 무서운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높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가르치려고 한다. 잘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한 이들은 용서받기 어렵다. 한 가지 죄, 높은 마음, 교만한 자세만이 용서받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다.
성령을 거스르고 훼방하는 것도 교만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마귀의 타락도 교만에서 온 것이다. 우주 최초의 죄는 바로 교만이다. 그것은 천국 문을 닫으며 지옥 문을 연다.
계속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낮아지면 그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낮은 마음을 품기만 하면 주님은 곧 다시 그를 용서해주시며 그에게 임하여 주신다.
그것은 영계의 원리이다. 주님은 교만한 이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오고 싶어도 오실 수 없으시다.
교만한 마음에서는 쉽게 짜증이 올라오고 남을 판단하고 미워진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주님이 저 멀리 계시고 마귀가 가까이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낮아지고 엎드리고 나면 죄인들이 불쌍해보이며 정죄하지 않게 된다.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싶으며
아름답게 보이고 남을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높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높은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죄에도 높은 마음에서 오는 죄가 있고 낮은 마음에서 오는 죄가 있다.
높은 마음에서 오는 죄는 교만, 판단, 강퍅함, 시기, 분노, 질투 등이다.
낮은 마음에서 오는 것은 죄라기 보다는 눌린 것이다. 슬픔, 낙심, 두려움, 좌절, 염려, 근심과 같은 것이다.
후자는 눌린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을 통하여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 그것도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므로
넓은 차원에서는 죄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을 주님은 용서하신다.
그러나 높은 마음의 상태에서 짓는 죄는 용서받기 어렵다. 그것은 대가를 지불하고 터져야 한다.
그러므로 높은 이들에게는 고난이 많다. 인생의 풍파를 좀 더 많이 겪게 된다.
강퍅한 것이 깨어지고 낮아지도록 많은 고난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두 번째 상태라면 주님의 위로와 은총을 경험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상태라면 당신은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것에는 위로와 치유가 있지만 강하고 높은 것에는 징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임에서는 낮고 눌리고 연약한 자를 받으며 사랑한다. 그리고 강건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
그러나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말씀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나 물질, 질병이나 환경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통과하고 조금 낮아지고 부드러워지면 우리는 그들을 받아줄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비로소 메시지를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100% 잘라서 어느 쪽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사람은 대체로 강성과 약성으로 나뉘어진다. 어느 한쪽에 기우는 것이다.
강성에 속한 사람은 대체로 분노가 많고 약성에 속한 사람은 낙심쪽이 많다.
당신이 주로 분노가 많고 분노쪽의 문제로 넘어지는 편이라면 당신은 강성에 속한 것이다.
당신이 주로 낙심쪽으로 넘어진다면 당신은 약성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약한자는 위로하고 힘을 주시고 일으키시지만
강성에 속한 자는 그의 혈기와 고집과 분노가 주님의 손에 다스려지기 까지 그에게 깊은 은총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한 자는 주님의 힘주심과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지만 강한 자는 주님 앞에서 낮아져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훈련이며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가 되어서 주님의 손 안에 엎드러질 때까지
주님은 그를 기다리신다.
오늘날 이 시대는 높은 마음, 강퍅한 마음이 아주 많다. 부드럽고 온유하지 않으며 공격적이고 날카롭다.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받으며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것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한 가르침은 사람을 점점 더 강퍅하게 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점점 더 공격적이며 거스르며 강퍅해진다. 그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오직 상하고 낮은 자에게만 오신다.
오늘날 자기 신앙에 대해서 확신하는 이들이 많다. 자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으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대단한 진리이며 남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확신은 주님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확신은 엎드림을 가져오지 않는다.
다윗이 잘 나가고 복을 받게 되자 마음이 높아져서 범죄를 했다. 그가 지적을 받고 터지고 울면서 그는 고백했다.
[오.. 주님.. 주님을 얻는 것은 낮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인데.. 제가 그것을 잃어버렸군요..]
누구나 마찬가지다. 낮고 상한 마음, 갈망을 잃어버리면 그는 주님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낮음과 절망과 상함과 엎드림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주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신다.
모세가 그의 능력으로 사역을 했는가. 그의 위대함으로 역사를 했는가. 나는 할 수 있다.. 위대한 비전.. 그러고 있을 때
그는 정말 무능했다. 광야에서 갈 데까지 가고 절망할 데로 절망하고 주님 앞에 엎드러져 있을 때 주님이 그에게 임하셨다.
모세가 쓴 시편에 [사람의 수명이 70이고 강건하면 80]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다. 그런데 80이 되었을 때 주님이 오셨다.
모세가 묘자리 알아보고 있는 데 주님이 임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다.
[주님.. 저 이제 다 끝났는데요. 오실려면 진작 오시지.. 저 이빨도 다 빠졌어요. 틀니도 해야해요..]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왔다. 네가 끝났으니 이제 내가 너를 사용해야 겠다.]
모세가 이를 악물고 방방거리고 있을 때 주님은 임하시지 않았고 그가 지치고 피곤하고 빌빌거리고 있을 때 주님은 임하셨다.
이 원리는 성경 어디에나 동등하다.
사울이 집 나간 암나귀 찾아다니면서 빌빌거릴 때 주님이 [너 왕 해라] 하셨다.
사울이 대답하기를 [저.. 그런데 관심 없거든요? 그저 나귀만 찾으면 됐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말하셨다. [시끄럽다. 너 왕을 해라.]
사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저 나쁜 놈의 자식이 내 왕위를 빼앗으려고 해요. 저 놈 죽여버릴 거에요..]
사무엘이 [당신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그러다가 죽었다.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버림을 받으며 낮은 곳에 있을 때 주님은 임하신다.
나는 회원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러분들이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면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임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의 말과 글에서는 악한 냄새가 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글들은 주님을 아프시게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판단과 생각은 주님을 아프시게 한다.
그러한 마음과 생각과 글이 주님을 아프게 찌른다. 주님은 불신자로 인하여 아프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 그 중에서도 자신이 잘 믿으며 옳으며 신앙이 좋다고 믿는 이들로 인하여 깊은 고통을 당하신다.
주의 이름으로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당신이 주님이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고백한다면 주님은 임하실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상하고 괴롭다면 주님은 오실 것이다.
당신이 고백하기를 나는 더럽고 악한 자이며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이며 음란하고 죄 많고 한심스러운 자라고 고백하면
주님은 오실 것이다.
당신이 배부른 사람이라면 주님은 당신에게 임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이 진지하게 낮은 자세로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이 왜 임하시지 않느냐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가까이 오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너무나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주님은 오실 수 없다.
한없이 낮아져 오직 파수군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하인이 주인의 손을 기다리듯이 엎드러져 있을 때 주님은 오신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고.. 나는 주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눈물로 고백하면 주님은 임하실 것이다.
주님은 상한 마음에 가까이 오신다. 주님은 눈물이 많으신 분이다. 주님은 눈물 앞에서 결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내가 쓰레기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성질도 더러웠고 인내심도 없었다. 친구도 없고 재능도 없고 환경도 나빴고 건강도 나빴고 학벌도 없고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갈 데도 없었고 오라는 데도 없었다.
좋아해 주는 사람도 불쌍하게 여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디에서나 왕따였다.
할 줄 아는 게 있다면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울었다. 많은 밤들을 울고 또 울었다.
주님.. 저에게 임해주세요. 하고 울었다. 그러자 주님이 내게 은총을 베푸셨다.
그것은 간단한 원리다. 주님은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쓰레기 가운데 임하신다.
나는 쓰레기인데 게다가 울고 있으니 불쌍하게 보시고 주님이 임하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다.
엎드려서 아파하고 주님 앞에서 우는 것은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순간들을 많이 겪었다. 수 천 갈래 조각 조각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었다.
아플 때는 기도하고 우는 것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심령 깊은 곳에서
황홀경에 가까운 기쁨과 달콤함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의 모든 찢김들이 황홀한 보석과 같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으로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이 속을 썩일 때 나는 고통의 마음을 부여잡고 아파하고 씨름할 때가 많다.
그런데 눈물의 시간을 보낸 후에 나는 그들이 대부분 회복되고 좋아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역이란 곧 피를 흘리는 것이며 고통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의 분량만큼 역사는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은 사역자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이다. 사역자가 그것이 싫다면 사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죽는 것이 싫고
고통 당하는 것이 싫다면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 고통과 찢김을 즐거워해야만 사람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과 피흘림은 사역의 원리이다. 주님의 사역이 그러했고 모세나 바울도 그러했다. 모세나 바울이 위대한 능력으로
손쉽게 사역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심히 아파하며 눈물로 살았다.
모세는 내가 저들을 낳았느냐고 항변하기도 했고 바울도 인내와 눈물로 사역했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고독과 버림받음, 찢기심 그것 자체도 사역이었다.
피흘림과 고통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역의 원리이다. 그것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고통과 찢김에 대한 준비가 없이 사역자나 사모가 되려한다면 그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 그 원리가 형성되었다. 주님은 아담에게 이제부터는 땀을 흘려야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와에게 고통을 겪지 않고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피와 땀과 고통을 통해서만 영혼이 자라고 깨어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영혼의 깨어남과 성장에 대한 가르침이며 원리에 대한 묘사이다.
성경은 본래 영성과 영혼에 대한 것인데 이것을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상징화되어 있고 알아듣기가 어렵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씀은 영혼의 상태와 자람과 원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많이 닫혀 있는데 아마 천사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물질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에고.. 또 주제가 다른 데로 간다. 언젠가는 이러한 부분도 다루는 책을 낼 것이다.
절망과 상한 심령은 우리의 무기이다. 그것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
낮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믿지 않는다. 나에게 대하여 감사와 존경.. 그러한 글이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속으로
[웃긴다. 저들은 나를 모른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썩은 인간이다. 지옥 불에 들어가 마땅한 놈이다] 하고 되뇌인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며 속에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사람들의 찬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고 있으면 나는 곧 바로 영혼의 어두운 구덩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제 독자님들은 어떠한 글이 위험한 글인지 어떠한 마음의 상태가 위험한 상태인지 대강 아셨을 것이다.
낮은 마음은 천국과 통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주님의 임재와 은총이 임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고백해보라.
[주님.. 저는 악하고 더럽고 못됐습니다. 저는 강퍅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주님.. 저는 당신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임하신다.
바리새인이 [주님.. 저는 저 세리와 같은 놈과는 종자가 다릅니다. 저는 기도도 많이 합니다. 금식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그러나 주님은 그를 받지 않으셨다.
세리가 감히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할 때 그는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
가장 무서운 죄는 자기 의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인보다
간음보다 도둑질보다 온갖 종류의 악보다 나쁘다. 그에게는 주님이 임하실 수 없다.
자기 의가 있는 곳에는 주님의 의도 은혜도 임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은 혼자 살라는 것이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이 함부로 가르치려 한다. 남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정죄한다. 대접하지 않으면 분노한다.
부디 잘난 척 하지 말라.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면 갈 데가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갈 데가 없다.
글을 쓰고 조회 수는 얼마나 되는지 덧글을 누가 어떻게 달아주었는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라.
그러한 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글이나 표현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글에는 멋지고 화려한 문장이나 세련된 언어의 구사가 필요 없다. 진실성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쉬우면 된다.
간단하고 솔직하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고백이 좋은 것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의식에는 악한 기운이 틈타게 된다.
어떤 이는 영적 경험을 많이 했다고 자기의 신기한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문제의 요소가 있어서 글을 삭제했더니
온갖 악담과 저주를 해왔다. 그러한 것은 높은 마음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은사자들은 특히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 세계를 경험했다가 거기에서 떨어지면 그 나중은 정말로 비참하다.
은사와 능력이 많은 것보다는 겸손하고 착한 것이 낫다. 그리고 안전하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한심스러운 우리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신다. 그러나 높은 마음을 가지면 우리는 주님의 대적자가 된다.
파괴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없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은혜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다.
남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면 안 된다. 아프면 우는 것이 좋다. 주님 앞에서 울면 주님이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신다.
외로워도 다른 데서 사람에게 도움과 위로를 구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우는 것이 좋다. [주님. 외로워요..]
그렇게 말하면서 울라. 그러면 주님이 그 공간에 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다. 내가 여기 있다.] 그렇게 주님은 오신다.
아직 외로움과 고통의 분량이 부족하면 더 있어야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량이 차면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
힘들 때 엎드리라. 주님은 반드시 도우신다. 나중에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오셔서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엎드리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 주님은 약자에 약하시다.
올 해 말쯤에 나는 [은혜의 원리]라는 책을 쓰려고 한다. 그것은 낮고 상한 마음이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메시지를 좀 더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다. 높은 마음이 멸망과 지옥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그런 식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세상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잠시는 기분이 좋은 것 같지만
어느 사이에 영혼이 완악해지고 갈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속는 것이다.
높은 마음만 조심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통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아프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 버림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항상 낮은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천국의 기쁨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자꾸 미워지는 것, 자꾸 남이 꼴 보기 싫어지는 것.. 자꾸 남의 단점이 보이는 것.. 걱정 근심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자꾸 짜증이 생기는 것.. 그러한 증상들은 그의 영혼이 지금 지옥 근처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 어서 주님 앞에 엎드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음이 높아진 것을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엎드리고 회개할 때 주님은 임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음이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아주 사랑스럽게 보이며 살아있는 이 순간 순간이 너무나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영혼 속에서
감격과 희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그러한 감동이 무럭무럭 일어나는 것을 그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지금 그러한 상태에 있다면..
축하드린다. 당신은 지금 천국의 문턱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낮은 마음 상한 마음 갈망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면
당신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천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이 괴롭히고 사람들이 괴롭혀도
당신은 그 천국의 기쁨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부디 낮은 마음으로 갈망하고 또 사모하며
우리 영혼을 언제나 주님의 임재로 채우자.
그 천국을 유지하자.
주님은 너무나 아름다우시며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자.
할렐루야.
-정원목사님 -
첫댓글 하지만 영계에서는 생각이나 상상이 실제의 행동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것은 똑같이 영의 흐름을 가져온다. 물론 말하고 표현할 때 그 기운이 좀 더 강렬해진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은 역시 하나의 생명이며 에너지이다. ...공감합니다....
정말 깊은 깨닫음을 얻게한 글이었습니다 ..유익한 영혼의 글 감사해요,,
이 글은 저에대한 이야기 이네요... 완악하고 교만했던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항상 정곡을 찌르는 목사님의 영적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아~~영의 흐름을 뚜렷이 알게 됨을 감사드림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점이 그대로 말씀하심을 알았습니다 이 카페에 잠깐 들렸지만 어떤 곳에서는 영의 흐름이 좋지 않아서 저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카페를 운영하신 분은 얼마나 힘들을까도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곳은 항상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운영하신는 분은 가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엄청 찔리네요... 주님앞에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근데 주님사랑해요님이 정원목사님인가요? 아님 다른 카페를 말씀하시는건지?
저는 정원목사님이 아닙니다. 이전에 정원목사님이 운영하시던 카페입니다~ 지금은 내려놓으시고 문서사역에만 전념하고 계십니다.
아~네 아무튼 너무 감사해요
^^정말 영을 깨우게 되는 말씀 입니다..담아가요 ...^^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면 갈 데가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갈 데가 없다. 아멘 주여!!!!!!!
정말 주님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고,순종하는 사람,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 , 죄인이라는 고백을 주님께 항상 하는 사람 ,주님께 사랑받기원합니다.
저의 얄팍한 믿음으로 남을 가르치려 했던 것, 그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정죄한 저를 주님 용서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해드린 것 용서하소서. 겸손하게 하소서. 낮아지게 하소서.
주님,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ㅠ ㅠ.....
얼마나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말을 하는지요. 일상중에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는지요. 너무 죄가 많습니다. 살인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저에게 없습니다. 저는 죄와 함께 그들도 미워합니다. 나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해서 죄인에 대해서 역겨워하는 것 같습니다. 정원 목사님의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모든사람과의 관계속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은혜롭게 하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주님앞에 너무 죄송하고 저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하시는 주님을 느낄수 있었습니다.....ㅠ ㅠ.... 주님만을 찬양하며 나의 속사람이 더욱 강건 해질 수 있도록 말씀 보며 기도로 무장해야겟습니다. 주님..사랑합니다....
난...아닐거야..하는 교만함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명심하겠습니다...좋은글 담아갑니다...^^
내 영혼을 울게하는 글이네요 .나는 바보 였네요. 나는 쓰레기 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 지적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자신을 의식하고 남을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너무나 귀하게 여기며 보호합니다. 주님이 하실일을 제가 하려고 하고, 내가 해야될일을 주님이 하게하는일을 멈추게 해주세요. 오랜시간 회개하며 묵상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성령님 예수님에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부끄럽습니다..귀한글 담아가서 깊이 묵상하며 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
정원목사님께서 문서사역에 전념하신다고 알고있는데 어디가면 목사님 문서사역을 열람할수있는지 아시는분 알으켜주세요~~
너무나도 귀한말씀의 글을 대할 수있게하시어 내영혼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게되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많은잘못을 깨닫게하시니 감사하고 주님앞에 겸손할 수 밖에는 없네요! 주여!!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제가 죄인입니다!!깨끗게하시고 정결케하소서!!오 주여! 항상 저에게 깨닫을 수있는겸손함을 주시고 행할수있도록 도와 주소서!!
너무나도 귀한말씀의 글을 대할 수있게하시어 내영혼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게되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많은잘못을 깨닫게하시니 감사하고 주님앞에 겸손할 수 밖에는 없네요! 주여!!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제가 죄인입니다!!깨끗게하시고 정결케하소서!!오 주여! 항상 저에게 깨닫을 수있는겸손함을 주시고 행할수있도록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