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아드 기지의 탈환에 아라얀 연방의 모든 도시들의 거리에는 정대건 중장의 무공을 칭송하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렸다.
시민들은 열광했다.
제국 본토에서 공수된 비교할 수 없는 출력의 강력한 요새 주포들과 연방의 기술력이 총 동원된
최고의 방위 시스템,적침을 불허하는 강철의 벽 그리고 자국의 기갑보다 폭발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4만의 제국 기갑을 단 3만의 기갑으로 돌파하여 연방 최대의 기갑 생산 기지를 되찾았다는 것에.
언론은 그를 과거의 영웅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제국의 압제 하에서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세명의 건국의 아버지,세명의 백작.
아이엔돌프와 드레이젠 그리고 에드슈트 백작.
그리고 그들의 밑에서 건국 초기10배가 넘는 제국군을 상대로 분투한 뱅크헤드 원수,뱅크헤드 원수 사후
연방 최초의 여자 원수로써 현재 연방령 지도의 모양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코를리어 원수
그리고 20여년의 원수 재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국의 침공을 허용하지 않은 대건의 아버지,정성건 원수.
3월이 시작하는 날,정대건 중장은 헤리아드 점령 작전에서 파괴된 5천의 기갑과 헤리아드 기지에
주둔시켜 놓은 1만5천의 기갑을 제외한 1만의 기갑과 함께 수도인 솔루스 시티로 돌아왔다.
수도 솔루스 시티에서는 승장을 환영하는 거한 개선식이 열렸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콜드웰 거리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해 당당히 그곳을 지나가는 대건의 기갑,불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색종이로 만든
꽃가루를 흩날리기도 하였고 교복을 입고있는 한 무리의 여자들은 불영에 다가가기 위해 전진하다
경찰들에게 진압당하기도 했다.
연방 정부는 통령의 이름으로 표창을 내렸고 군부에서는 대건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지휘하고 있던 01,02부대에 14,15부대를 더하여 총 네개의 기갑 부대를 그의 지휘 하에 두었다.
정대건 대장의 취임식은 몇달 전 겨울의 중장 취임때와 같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오직 평화당만이 정대건 대장의 주가를 올리기 위하여 헤리아드에서 산화한
10만의 병사의 영령을 언론들이 일부러 발표하지 않는다는 논지의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것은 제국의 앞잡이로 취급하는 항의 전화와 극렬 우익 단체들에 의해 평화당 당사 앞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시끌벅적한 시위 뿐이었다.
그 무렵,헤더 해밀턴은 솔루스 시립대에 입학하여 새내기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시절을 모두 여중,여고에서 보냈던 헤더에게는 거리낌 없이 손을 잡고 교정을 활보하는
커플들의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지만 동시에 부럽기도 하였다.
헤더는 그들을 보며 자신의 심장 한구석에 자리잡고있는 남자를 종종 떠올리곤했다.
올해로 마흔이 된 그 남자는 헤더가 태어났을때는 이미 만 19세로 성인이었고,헤더의 아버지인 루크 해밀턴의
아주 친한 동생이어서 헤더가 어릴때부터 자주 해밀턴 가를 들락날락하며 아주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헤더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사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 남자를 가족의 하나로 생각하여 좋아하는 것인지는
잘 구별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닌가 걱정부터 되고 휴대전화의 문자판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가끔 문자를 보내오면 그 무엇보다 기뻤다는것은 알고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았다.
일전에 집으로 찾아온 검은 머리의 여자.
헤더는 그녀를 떠올렸다.
로사…라고 헀던가.
분명 아기가 어쩌고 했었지….
뭐,대건 아저씨도 이제 40이니까 이런거나 저런거 안해봤다는게 더 이상하지.
근데,임신은 좀 심한거아냐?
그리고 그 여자,나보다 가슴도 크고…몸매도…으….
오만 생각을 하던 헤더는 그녀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가 좋은걸까?"
헤더는 한숨을 내쉬며 예전에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친구들과 침을 꼴딱 삼키며 본 포르노 배우의 가슴처럼
자신의 가슴도 성형 수술로 크게 만들어볼까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쪽 어깨에 매고있던 손가방 속에서 잠자고있던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헤더. 잘 있었어?"
솔루스 시티로 돌아온 대건이 가장 먼저 만난것은 정치를 배운다고 장인 밑에서 시달리고 있을 해밀턴의
장녀,헤더였다.
헤더를 만나기로 한 곳은 그녀의 입에 가장 잘 맞는 와플을 파는 솔루스 시립대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혹시 누가 알아볼까 싶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걸치고 대건은 헤더와의 약속 장소로 갔다.
학교에 있던 헤더는 이미 자리를 잡고 대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3분 간격으로 시계를 보고 쉴새없이 두리번 거리며.
만나기로 한 14:30분 10분 전.
헤더가 기다리던 남자가 도착하였다.
"아저씨,오랜만이에요!"
"그래,오랜만이다. 헤더."
대건은 득달같이 달려온 헤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헤더의 앞에 앉았다.
그 후로 코코아와 블랙 커피를 사이에 두고 그들 사이에는 몇분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헤더는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손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고 대건 역시 벗어놓았던 모자를 주물럭 거렸다.
"저기…."
"저기요…."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먼저 말해."
"먼저 말하세요."
몇번의 실랑이 끝에 먼저 말하기로 한 대건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저번에 집에서 본 로사라는 여자 있지. 나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이 가졌다던데…."
"그거 그 여자가 거짓말 한거야. 나는 아직 누굴 임신시키고 그런적은 없어,헤더."
그 말에 헤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어딘가 불안해보였던 표정은 다시 이전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있었다.
대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왜 헤더에게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거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후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는 상당히 풀려 헤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로 쌍둥이 동생인 켈리와 셸리에 관한 이야기와 얼마전 입학한 대학에 대한것이었다.
하지만 대건은 그것을 듣는둥 마는둥하며 생각하였다.
나는 헤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그리고 그것은 헤더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조를때까지 계속 되었다.
해밀턴 집안의 가장인 루크 해밀턴에게는 하루 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술을 좋아해 콧잔등을 벌겋게 하고다니는 그에게 장인인 7선의원 롭 웰링턴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린지 오래되지 않아 자네같은 정치 신인은 이미지로 승부할 수 밖에 없네.
얼굴 깨끗하게 될때까지 잠깐 술 끊어."
한시적이지만 그렇게 시작된 금주령.
그렇지만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가령 친구들과 모임이 있을때 혼자서 안주만 씹으며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담배만 줄창 태우며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는 매일 한 시간씩 거울을 보는것이었다.
거울을 보고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사랑스러운 희노애락의 표정 연기를 해야했다.
이거 골패네. 이 기회에 영화 배우나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보고 히죽거리는 해밀턴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에 찍힌 번호를 확인한 해밀턴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것은 노담이라는 사람으로 해밀턴은 그와 만날 약속을 잡고 대건과 자주 가던 바로 갔다.
집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사람도 별로 없어 조용히 이야기 하기에는 좋은곳이었다.
술을 마시기는 글렀지만.
이미 바 앞에는 노담이 도착해 해밀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의 안내를 받아 바 안의 사람이 없는 방으로 해밀턴과 노담은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가는것을 확인하고 해밀턴이 말했다.
"그래,어떻게 사람은 좀 확보해 놨습니까?"
노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44명만 더 모으면 300명이 채워집니다. 근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중견 정치인들을 몇명 영입하는것을 고려해보시는게 어떨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노담이 몇 사람의 자세한 신상 정보를 적어놓은 종이를 해밀턴에게 내밀었다.
"에이,이 사람들은 안됩니다. 뒷구멍이 안구린 놈들이 없어요."
그것을 읽어보고 손을 내저으며 말하는 해밀턴을 노담은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다.
"총 의원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나간다 해도 어차피 의회에 입성하게 되면 당을 만들게 아닙니까?
장기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관록있는 정치인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아직 보수적이라
30,40대 젊은 사람들이 앞에서 설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해밀턴이 끙끙 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아라얀 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꿈이 정치가였고 어릴적 고아가 된 자신을 아버지처럼 돌봐준 정성건 원수의
죽음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 단순히 생각하고 정치판에 투신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정치란것은 더욱 복잡했다.
"해밀턴씨,정치는 이상이 아닌 가장 속물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암만 깨끗한 초선 의원이라도 2선,3선씩
해먹으면 결국 지금의 노인네들 처럼 새까매지게 되어있어요."
해밀턴이 노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방 통령 르위스 맥피어슨은 이제 대건을 죽이려는 일을 그만해볼까 생각했다.
시작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 후로 죽으라고 내몰은 전장에서의 활약이 의외로 뛰어나 현 정부와
자유당의 지지율에 꽤 도움이 되고있었고 그의 아버지인 정성건 원수가 가지고 있던 서류도 모르고 있는듯 했다.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의 모든 비리가 담겨있는 그것이 공개된다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져
수도없이 설득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는 그 알량한 정의감 때문에 죽은것이다.
그냥 적당히 타협했으면 좋았을것을.
다행인것은 로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 바보같은 아들놈은 아버지를 증오해 오히려 죽어줘서 속이 시원하다고
하고 다닌다는것.
물론 공공연히 말은 못하겠지만.
사실 정대건 대장을 죽인 후 우매한 민중의 관심을 돌릴 새로운 영웅을 조작해 내는것도 번거로웠고 올해의
총 의원 선거와 몇달 후 이어지는 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도박을 하고싶지 않은것도 있었고.
"맥브라이드,이제 자네 동생에게 감시를 좀 느슨하게 해도 될것 같다고 말해놔."
통령이 자신의 뒤에 서있던 안경을 쓴 남자에게 말했다.
라즈그리스에 주재하고있던 자국의 외교단들이 라즈그리스 인들에게 몰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온것도
그 무렵이었다.
라즈그리스에서 죽은 20명의 시신은 연방 수도 솔루스 시티로 옮겨졌다.
59대 법왕,퀴아네 라즈그리스가 친히 작성한 편지와 함께.
편지는 일곱 대신관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 불경한 행동을 한 그들을 단죄하였으며 앞으로도 라즈그리스 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더 이상은 좌시하지 않겠으며 죽은 자들은 그 본보기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여론은 들끓었다.
헤리아드로 출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의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음에도 국민들은 출병을 강력히 원했다.
국방의회는 이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해 국방의회 의장,댄 트리비노가 직접 라즈그리스 인들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야만인이라는 내용의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군부 역시 국방의회와 협의를 해 라즈그리스 침공을 결정할것이라고
언론들에 보도자료를 돌렸다.
군부의 블랙셰어 원수가 라즈그리스 유일의 도시,스반힐트를 점령하기로 결정한것은 3월 20일 저녁 7시였다.
그리고 이 작전에 동원되는 병력은 근접형 단좌식 기갑은 아이언 피스트 7만대,유사시를 대비한 1개 부대
분량의 기갑 1만대였다.
블랙셰어 원수는 정대건 대장을 보내고 싶어했지만 휴식 기간을 조금 가지고 싶다며 거절해 조 베네트 대장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라즈그리스에 가장 인접해있는 헤리아드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4천기의 아이언 피스트 모두를
수도에서 떠난 부대가 인근에 도착하면 합류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3월 22일 오전 11시,연방 기갑 1만대와 아이언 피스트 7만 4천대로 구성된 대 부대를 출병시킴으로써
라즈그리스령 스반힐트 침공작전이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