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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26,4-1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4 “사제가 너희 손에서 광주리를 받아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수가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6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저희를 학대하고 괴롭히며 저희에게 심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7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8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9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10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0,8-13
형제 여러분, 성경에서
8 의로움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1-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으로 인해 강건합니다>
젊은 시절, 심각한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참다 참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 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 밥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 저런!’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 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절대 금식’이란 표시판 때문인지 한번 먹어보라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생리 구조상 하루 세 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목표하는 특정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 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 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막 걷기 시작한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 중에 악마로부터 받는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긴 단식침묵 개인 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피정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는지 헤아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과 권력과 재물이라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용감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피정을 보면 우리의 사순절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두 개의 ‘신앙고백’과 함께 ‘참된 신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고백이요, 제2독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곧 전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햇곡식을 봉헌하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고 좋은 땅을 주셨다는 신앙고백이요, 후자는 우리의 구원이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통해 구원이 온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의 유혹받으신 장면을 통하여, 앞의 두 독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십니다.
곧 오로지 아버지께만 신뢰와 의탁을 두는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믿는 이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유혹을 이기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인간이 닮아야 할 가장 모범적이고 완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 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광야는 현실적으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쇠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물질적 유혹, 빵에 대한 유혹,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요.”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곡 영적, 신앙적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 곧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성전 꼭대기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정신적 유혹, 영예에 대한 유혹,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루카 4,12)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 35-38)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루카 4,4)
주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게 하소서.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유혹이 올 때,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
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6-18)
이 말은,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유혹을 똑같이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고, 우리를 가엾이 여기셔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천사들과는 달리 유혹에 잘 넘어가는 나약한 존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죄는 유혹에 넘어갈 때부터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나는 절대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퍼센트 교만하고 어리석은 위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신다는 말은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도움 받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관한 말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마르 9,29) ‘유혹’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유혹을 물리치려고 시도한다면, 그 시도는 ‘백전백패’로 끝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루카 17,1-3)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유혹’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일어나야 한다.”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남을 유혹하는 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남을 유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것은 사탄과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즉 유혹하려는 의도로 한 일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유혹한 것처럼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것을 알린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는 양심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1코린 10,24.28-29ㄱ)
여기서 ‘제물로’ 바쳤던 음식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의 제물로 바쳤던 음식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또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이것은 괜찮아.” 라고 말한 것 때문에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면, “괜찮아.” 라고 말한 사람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남을 유혹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들 가운데에서 두 번째 유혹은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더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세속의 권세와 영광은 내가 받은 것”이라는 사탄의 말은 거짓말이지만, 그런 것을 욕심내고 집착하다가 구원의 길을 걷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탄이 바라는 대로 사탄을 섬기는 것과 같은 ‘죄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전쟁 - 영적 승리의 삶>
오늘은 사순 제1주일, 루카복음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기전 하느님과 함께 40일을 지내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던 모세를, 이제벨의 보복을 피해 하느님의 산 호렙을 향해 40일 동안 도주하던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예수님입니다.
이 두 분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 시 함께 대화를 나눴던 분들이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영적전쟁에 승리했던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전사로서 광야에서 유혹하는 악마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역순으로 소개하며, 마지막 대목은 ‘케난은 에노스의 아들, 에노스는 셋의 아들, 셋은 아담의 아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루카 3,38)로 끝납니다.
아담이 누굽니까?
창세기 3장에서 보다시피 악마의 유혹에 빠졌던 하와의 남편으로 하와와 함께 영적전쟁에서 악마에게 패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새 아담인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와의 영적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이 출현하기까지 기다린 하느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오늘 광야에서 악마와의 대결은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전 삶을 요약하며 영적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살아있는 누구도 인생 광야 여정 중 악마와의 유혹을 피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악마와의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 칭하곤 합니다.
예전 수도승들 역시 악마와의 싸움을 위해, 또 주님을 만나러 광야에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광야에 갈 필요가 없으니, 바로 세상 한복판의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악마와의 싸움이 펼쳐지는 광야의 전장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광야 인생 여정 중 성인이 되느냐, 괴물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셋 중 하나’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주변에서 실감나게 체험하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이성을 잃고 미쳐가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작금의 현실입니다.
독일의 문호이자 시성이라 칭하는 괴테는 생애 말년의 대화에서 말합니다.
“시대가 쇠퇴할 때의 모든 경향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모든 일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성숙해 갈 때는 모든 경향이 객관적이다.”
바로 오늘날 모든 경향이 주관적으로 흐르는 혼란한 시대를 접할 때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이성과 상식, 공정과 정의, 진리와 평화가 상실되어가는,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두렵고 불안하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런 광야의 현실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영적전쟁중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좋은 참고가 됩니다.
“모두가 각자의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
<다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면 원망받는 일이 없다.”
<논어>
정말 영적 신사다운, 주님의 전사다운 넉넉하고 품위있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광야 인생 여정중 영적 전쟁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셋을 소개합니다.
첫째, 혼자가 아닌 함께 악마와의 전투입니다.
바로 성령과 함께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또 오늘 광야에서 영적승리를 거두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수호천사와 수호성인이 있고 교회공동체 안에는 무수한 영적 전우들이 있고 날로 두터워지는 영적 전우애戰友愛가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 몸담고 있는 동안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악마와의 치열한 전투에 성령이 시종일관 함께 했음을 봅니다.
복음 초반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빠지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평생 영적전쟁 중 역시 악마의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주님의 기도가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둘째, 주님 안에 자주 머물러 기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성령에 이어 악마와의 싸움에 참 좋은 무기가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셨던 주님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수님의 외딴곳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광야 여정 중 우리 역시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휴식과 충전을 위한 외딴곳의 기도처는 필수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런 고독은 현대인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갈파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기도와 함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사실 언어이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고백 언어입니다.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 찬미의 고백, 감사의 고백등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고백과 기도와 더불어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져 내적 힘도 샘솟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1독서 신명기의 다음 고백을 통해 40년 광야 체험을 기억하여 내면화하고 현재화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견고히 지켰습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 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기쁨과 감사, 믿음과 사랑의 고백의 대가이자 달인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 평생 날마다 말씀공부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악마와의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과 기도에 이어 말씀이 참 좋은 무기가 됩니다.
말씀에 정통할 때 악마와 대화도 하지 않고 단박 그 간계를 간파하여 말씀으로 무찔러 버립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고 악마와 대화하다 보면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본능적 욕구인 식욕에의 승리입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권력욕, 명예욕에 대한 승리입니다.
마지막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이, 시험이 참 간교합니다.
성서를 예로 들어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헛된 욕망, 허욕虛慾에의 승리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도 참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유혹하는 악마와의 영적전투에서 말씀에 의한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입니다.
참으로 아담의 실패를, 사십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영적패배를 일거에 만회한 예수님의 쾌거에 하느님께서도 참으로 흡족해 하시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갑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악마와의 영적 전투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이, 시험이 없으면,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악마의 유혹을, 악마와의 영적전투를 영적성장, 영적승리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또 성령과 기도, 말씀의 무기로, 우리 모두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가 되어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재의 수요일에 많은 분이 재의 예식에 참례하였습니다.
이마에 바른 십자 표시의 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백신’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마에 표시가 돼 있기에 악의 세력이 가까이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비슷한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집 앞에는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양의 피가 있는 집은 건너가셨습니다.
이마에 재가 있는 분들은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들이 받는 ‘훈장’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마에 재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인정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분이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받아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마에 재를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과 ‘왜’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 ‘인왕산에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는 ‘내려와서 칼국수 먹으러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그러자’라고 대답합니다.
이번 주일에 ‘미술관에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저녁에 중국집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친구입니다.
‘왜?’라는 말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과학, 문학, 예술은 ‘왜?’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말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지금 슬픔에 겨워하는 사람에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헤어짐의 아픔을 참고 있는 사람에게는 ‘왜?’라는 말보다는 ‘그러자’라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왜?’라는 질문 대신 ‘그러자’라는 응답으로 주님의 수난에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언제든 다시 찾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유혹을 극복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혹은 마치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처럼, 우리가 약해질 때 다시 다가옵니다.
우리는 돈, 권력, 명예, 쾌락 같은 다양한 유혹 앞에서 계속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그 유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힘드실 때 다시 다가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약한 순간을 노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첫째,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악마와 맞서서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유혹을 외면하기보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말씀으로 답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유혹은 우리 약점을 파고듭니다.
어떤 순간에 내가 가장 흔들리는지, 어떤 상황에서 쉽게 넘어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유혹은 우리의 의지력이 약할 때 더 쉽게 다가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면, 악마가 다음 기회를 노려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혹받을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분의 길을 따라간다면 악마가 우리를 흔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유혹은 한 번 이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우리가 지쳐 있을 때, 외로울 때, 방심할 때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유혹이 반복된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은 우리가 더욱 강해질 기회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통해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 나간다면, 유혹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광야는 ‘이것’ 하나 찾는 장소이다>
사순은 주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 안에 합당하지 않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시간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요?
헤라클레스 신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지닌 인간 여성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의 영웅입니다.
제우스의 정실 아내 헤라는 제우스의 여러 외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매우 싫어했는데, 헤라클레스의 경우에도 특별히 더 큰 분노를 보였습니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헤라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그런데 빠는 힘이 너무 세서 억지로 떼어내야 했습니다.
그때 분출한 젖이 은하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분노한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어 인간으로 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그가 아내 메가라와 자녀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헤라클레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겼습니다.
그는 이에 대한 속죄를 결심하고, 델포이 신탁을 찾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유명한 ‘12가지 과업(노역)’이었습니다.
이 열 두 가지 과업을 모두 완수함으로써 헤라클레스는 죄를 씻고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2가지 사명을 완수하는 중에 머리가 여러 개인 괴물 히드라도 쳐부숩니다.
헤라클레스는 조카인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아 히드라의 목을 자른 뒤 불로 지져 재생을 막는 전략으로 괴물을 무찔렀고, 히드라의 독을 얻어 화살에 바름으로써 강력한 무기를 확보했습니다.
12가지 노역을 마친 뒤에도 헤라클레스는 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영웅적 모험을 이어갔습니다.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켄타우로스 네소스의 계략 때문에 헤라클레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네소스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죽어가면서 히드라의 피가 사랑을 영속시키는 ‘묘약’이라고 말해줍니다.
데이아네이라가 ‘사랑의 묘약’이라고 여겨 헤라클레스의 옷에 바른 독이 그의 살갗에 닿아 끔찍한 고통을 일으켰고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 오릅니다.
떠밀리는 죽음이 아닌 산 채로 자신을 화장시키는 능동적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스가 불길에 몸을 던지자, 제우스는 그의 영혼을 올림포스로 데려가 오랜 고통에서 해방했습니다.
이로써 헤라클레스는 신들 사이에 올라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그를 괴롭히던 헤라 또한 그를 올림포스의 정당한 신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함으로써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에게 다가서기 위해 자신이 평생 해 온 사명의 완수만으로 충분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겸손’을 회복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교만을 태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발을 절뚝일 수밖에 없었고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이나 엎어져 “당신 얼굴을 보는 것이 하느님 얼굴을 뵙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그를 경배합니다.
이에 선물 때문이 아닌 그의 겸손함을 보고 에사우는 야곱을 자신의 땅에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광야에서 세 유혹과 싸우기 위해 단식하며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불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예수님을 인간성인 세속-육신-마귀를 태워버립니다.
결국 광야의 사순절은 우리가 기도-자선-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기 위해 겸손해지는 목적으로 행하는 인간이 신이 되는 과정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6끼를 굶고 느낀 것은 ‘이틀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제가 뭐 대단하다고 예수님께 무언가를 해드린다고 착각했을까요?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고, 자선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며, 단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속에서 유일하게 남는 이 ‘겸손’을 찾는 일이 사순의 의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진짜 명품의 삶을 사는 것>
우리나라 명품시장 규모가 세계 7위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명품을 좋아한다는 것이겠지요.
오늘날 품질과 디자인이 모두 뛰어나고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을 명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명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명품이 되는 것입니다.
내면의 성숙함과 외면의 유려함을 모두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일상에서 충실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사람이 진짜 명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변함없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평가도 충분하지 않은,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귀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명품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 세상을 원망하거나 스스로 포기한다.
둘째, 잠잠히 때를 기다리고 실력을 쌓아 나간다.
여러분은 고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당연히 두 번째 선택에 손을 들어야 명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은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맹자는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 스스로를 버리는 사람은 하늘도 도울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당신을 바라보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고, 이 모두를 이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모범을 보고 또 그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시장한 상태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악마를 경배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이었습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입니다.
우리가 겪는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물질적인 유혹이고, 둘째는 세상 지위에 대한 유혹이고, 마지막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유혹, 즉 기적의 유혹입니다.
이를 성경 말씀으로 모두 이겨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유혹을 계속 받습니다.
과연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이겨내고 있습니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진짜 명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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