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경림(66세)에게서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다. 1956년 '갈대' 등의 작품으로 등단한 이래,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의 시집을 상재하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성정과 가락으로 향후 100년은 독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절창들을 탄생시킨 한국 현대시사의 작은 거인. 음악에는 신중현이 있다면 시에는 신경림이 있다.
그는 외쳐야 할 때는 외치고, 행동해야 할 때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주도하며 군부독재에 저항했고, 민중적 가락의 시들을 써내 '가난한 자'들의 힘을 모아냈으며, 일찍이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환경운동연합'에 공동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열정과 억센 주먹의 젊은 날과 회한과 쓸쓸함의 중년을 넘어 이제 시인의 나이는 이순을 훌쩍 넘겼다. 그는 이제 이렇게 노래한다.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밖은 칠흑 같은 어둠/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나는 대처로 나왔다./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내 망막에는 마침내/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실루엣만 남았다./내게는 다시 이것이/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1998년)
어지러운 세상사에서의 '길 찾기'를 이렇게 읊은 노시인을 1월3일 인사동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올갱이를 안주로 삼은 막걸리집에서 신경림 시인이 손자(최 헌. 6세) 덕택에 최근 맛들이기 시작했다는 피자를 파는 경양식집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3시간 이상 계속됐다.
- 새해다. 신년 계획은?
"시 쓰는 게 본업이니, 응당 시를 열심히 써야겠고. 올해는 동화를 두어 편 써볼까 한다. 어떤 내용이냐고? 손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은 나도 그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는 고백의 시를 썼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가 문학과 삶에 끼친 영향은?
"아버지를 반면교사하려 했다. 아버지는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책읽기는 어머니가 좋아했다. 아버지라... 사랑과 미움이 엇갈리는 사람이다. 이런 애증은 내 또래 사람들에겐 보편적이기도 하고. 돌아가시기 7년 전부터 내가 병수발을 했다. 결국 내 집에서 임종을 맞으셨고."
- 유년 시절 집안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집안 어른 중엔 의사도 있었고, 교장도 있었다. 당숙과 삼촌들도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집안에 책이 많았다. 어린 시절엔 그것들을 난독하며 지냈다. 소학교 2학년 때 일어판 <전쟁과 평화>를 읽던 기억이 새롭다."
- 사숙으로 삼았던 전 세대 작가들이 있나?
"백석, 이용악, 정지용 등이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백석) '북쪽'(이용악) '유리창'(정지용) 등은 내가 애송하는 시들이다. 서정주도 읽었으나 내 정서엔 맞지 않았다. 서정주의 경우 그의 친일경력보다는 독재정권에 영합했다는 것이 더 주요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물론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울 때가 있었다. 영국의 워즈워스와 비슷한 경우랄까..."
- 56년 등단 이래 65년 서울로 다시 올 때까지 공백이 컸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에 절망한 것으로 아는데.
"죽산과 개인적 친분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저 팬이었다. 하지만 함께 독서회를 하던 친구 중에 죽산 밑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 상황이 무섭기도 했고... 그 10년의 대부분은 술을 마시고 자학했다. 이런저런 막일도 많이 했다. 학원강사, 보따리 장수, 광산의 서기 일까지. 65년에 김관식(시인. 작고)이 "함께 서울 가서 시 쓰자"고 했고, 그 길로 홍은동 무허가 판자촌으로 올라와 정착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시기였다."
- 7권의 시집을 포함 많은 책을 썼다.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저서가 있을텐데.
"<농무>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바람의 풍경> 정도다. 시란 쓰고 나면 부끄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의 책들은 거르고 걸러 만든 것들이라 그 부끄러움이 덜하다."
- 추천하고 싶은 시들이 있는가?
"무슨 내가 내 시를...(웃음) 굳이 추천하라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목계장터' '갈대' '파장' '길' 등이다."
- 시집 <농무>엔 '작부와 뒷방에서 치는 육백' '묵내기 화투' '국수내기 나이롱 뻥' '골방에서 섰다' 등 엄청나게 많은 노름(도박)이 등장한다. 실지로도 도박에 취미가 있는지.
"나는 아버지의 도박에 치가 떨렸던 사람이다. 노름은 전혀 못한다. 단지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70년대 속에 맺혔던 이야기들을 푸는 재미에 시작한 등산이 취미라면 취미다. 아직도 현기영(소설가), 정희성(시인) 이부영(국회의원) 임채정(국회의원) 등과 자주 산엘 오른다."
- 당신의 시를 일관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힘이나 어조는 무엇인지.
"시란 일관적인 사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온다. 이념을 규정해 놓고 쓰는 시는 경직되기 십상이다. 시인은 사상가가 아니다. 시인은 이데올로기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접근해야 한다. 시는 사상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는 그 하나하나가 이미 우주다."
- 시를 통해 당신이 세상에 발언하고 싶은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또 아직도 시가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가?
"말이란 그 자체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다. 시는 말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말 자체가 가지는 힘이 시에서 발휘될 수 있다. 나는 시란 지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시의 지향은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독자들은 안다. 제대로 된 시 속에는 그 시인까지 보인다는 것을."
- 요새 젊은 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대한 생각은?
"일단 너무 가볍고 쉽게만 쓰려 한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성도 없어 보이고. 이미지와 어조 등이 비슷비슷한 것도 문제다. 이는 즉물적이고 즉흥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스피드에만 경도된 세태와도 관련이 있다. 변화에만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가며 모든 걸 보는 통찰력도 중요하다. 너무 비판만 했나?(웃음) 하지만 젊은 그들의 감각은 높이 살 만하다."
- 주목하고 있는 젊은 시인이 있는지.
"안도현, 이윤학, 김기택, 송찬호, 신현림 등이다."
- 앞으로는 어떤 시를 쓸 것인가?
"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더라'라는 나름의 작은 깨달음은 있다. 그 깨달음을 시로 쓸 것이다. 이제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삶과 죽음의 문제에도 접근하고 싶고, 참된 가치와 진실된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노래해 보고 싶다."
- 다가올 미래에서도 우리가 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시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어쨌든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저변에는 '시적 마인드'가 깔려 있다고 말하더라. 시대가 바뀔 때마다 시는 절망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나는 시의 미래를 낙관한다. 인터넷 시대가 시의 독자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작년(2000년) 서정주와 황순원, 김병걸, 손춘익 등 많은 문인들이 타계했다. 소회가 없지 않을텐데.
"개인적으로 황순원 선생은 가까운 사이였다. 훌륭한 작가가 돌아가신 것이라 많이 애석했다. 김병걸은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동지였다. 고문도 많이 당했고... 안타깝다. 무척이나 청렴하고 맑은 사람이었는데. 동화작가 손춘익도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고향인 포항으로 문인들을 자주 불러모아 술도 사고, 위로의 말도 전한 의인이었다."
- 세칭 '동인문학상 파동'에 대한 생각은?
"수상은 개인적 선택의 문제다. 이문구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문구는 민주화운동의 실천적 인물이고, 문학적 업적도 대단한 사람이다. 진보적 문학인인연하는 사람 가운데 실지로 행동은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문구는 문학과 민주화운동, 작가적 삶 모두가 일치를 이룬 사람이다."
- 인터넷 시대에 시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시대가 변한다고 시의 역할이 변하는 건 아니다. '참된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터넷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6살 먹은 내 손자도 인터넷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봤다고 할 정도니. 그 애 앞에서 나는 문맹(넷맹)이다(웃음)."
- 최근 인터넷에 문화관련 강좌를 개설한 '디지털문화예술대학'(www.artnstudy.com)의 학장을 맡은 걸로 아는데.
"경제적 문제로 문학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참여했다. 그들에게 대학, 대학원 수준의 강의를 들려줄 계획을 잡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문학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데도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
- 김대중 정부에 대한 나름의 견해가 있을텐데.
"일단 인사정책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거기에 DJ의 자만이 합쳐져 지금의 난국이 도래했다. DJ에겐 일종의 '관료 콤플렉스'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대통령이 보수주의자들에게 둘러싸일 위험을 초래한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갖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니 큰일이다. '20:80의 사회'로 간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향후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의 실업자 양산을 어쩔 것인지... 문화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 정부는 고급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게다가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하는데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더 문제다. 인권상황은 절대적 기준에서 볼 때는 나아졌지만, 국가보안법 개정은 왜 안 하는지..."
- DJ 정부가 잘 하는 것도 있지 않은가?
"통일 정책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통일의 기반을 닦은 것은 칭찬 받아야 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런 기조는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기 대통령도 DJ가 닦은 토대 위에서 통일 정책을 이어갈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경제 안정의 대안을 가지고 있고 문화적 심미안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겠지."
-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서 찾아지는지.
"다른 나라를 여러 곳 여행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이 민주주의도 비교적 성숙되어 있고, 치안도 안정적이란 것을 알게됐다. 경제 위기만 넘기면 좋은 세상이 또 오지 않겠나. 어디에서 희망을 찾느냐고? 희망이든 절망이든 결국 사람 속에서 찾는 게 아닌가."
- 40년 넘게 시를 쓰고 있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가?
"45년 동안 시를 썼어도 시가 뭔지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다. 시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시인 신경림을 있게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시란 무언가의 결핍에 대한 갈구이고 시인은 그 결핍을 노래하는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
- 주량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무슨...(웃음) 소주 두 병은 마신다. 얼마 전 소설 쓰는 현기영하고 변산반도엘 갔다온 적이 있다. 아침부터 마셔댔는데 밤에 서울로 돌아와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우리가 어디를 갔다온 거지?"라며 웃은 기억이 난다."
-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언가?
"사람 중심이 아닌 속도와 개발 중심의 굴절된 발전지향이다. 이제 시골에 가도 흙을 밟기가 힘들다. 온통 아스팔트 천지다. 게다가 서울만 벗어나면 지천으로 널린 '러브 호텔'과 '가든'을 보면 환멸스럽다. 빨리 달리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다. 느린 것도 인정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 '러브 호텔'과 '가든'에서 도덕적 타락을 보는 건가?
"그렇지 않다. 환경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다. 도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백지영에겐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혼전 섹스가 일상화된 마당에 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디오 테잎을 공개해 인터넷에 올린 자에게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 오히려 윤리적 타락과 도덕적 해이의 죄를 물어야 할 사람들은 위정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견결하지 못한 주제에 지나치게 성도덕만을 강요해 왔다. 장정일의 작품(<내게 거짓말을 해봐>)도 마찬가지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지 왜 문화를 법적 잣대로 왈가왈부하는가."
- 시인 신경림으로서의 고민은 없는지.
"작년부터 시가 너무 잘 쓰여져 고민이다(웃음). 살아 있는 한 꾸준히 쓸 생각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올해는 동화도 쓸 것이다. 최근엔 내 할아버지가 쓰신 한시를 읽고 있다."
- 네티즌과 독자들에게 덕담 한마디 들려달라.
"인터넷의 속도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채워질 내용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책을 읽어라. 내용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서뿐이다. 선별해서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인사동 '전통술집'에서 올갱이와 함께 시작된 인터뷰는 신 시인의 파격(?)적인 제안에 따라 '피자집'으로 이어졌다. 손주따라 입 대기 시작한 피자가 이젠 술안주 단골메뉴가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