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대해서 하겠는데, 이 책제목은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거기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가운데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양쪽에는 두 명의 천사들이 보디가드로서 나오고 말이다.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사실에 대해서 실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데로 찾아오시는데, 식사를 대접받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친구처럼 그렇게 밀접한 관계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 기도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를 더욱더 낮춘다는 것이다. 즉 "저는 티끌만도 못한 주제이지만, 감히 기도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정말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기도도 하지 말고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지, 기도는 무슨 기도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줄 알지만 기도를 하는데, "의인 50명만 있으면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 하지만 심판은 차질 없이 !!
결국은 창세기 18장과 19장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심판은 사전에 협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감행하시는데,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래서 50명에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그리고는 10명으로 점점 줄여 가는데,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이 심판은 차질 없이 그대로 감행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은 그대로 진행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구원이 진행되느냐는 것인데, 유황불이 그렇게 내리는 가운데서 말이다.
◈ 소돔과 고모라, 과연 그 대비책은?
우리가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떨어뜨려서 심판을 하는데, 그런데 과연 천사가 직접 오지 않고 그냥 심판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①방공호를 판다. ②교외로 잠시 대피한다. ③물을 충분하게 준비한다.
사실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될 때, 그런 하나님의 심판행위는, 거기에서 구원될 수 있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행위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라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즉 "심판만 알려주시면 그 나머지 대피하는 것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는 깜깜 !!
따라서 십자가로 구원이 된다고 할 때, 즉 구원문제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런 심판행위에 대해서도 ①심판과 ②구원을 전혀 우리가 모르는데, 여기서 1번을 안다고 해도 2번은 우리 인간들의 머리에서 전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1번과 2번이 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할 때, 그런데 신약에서는 십자가로 구원한다고 2번에 대해서 그 해결책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1번은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지금 1번은 어떻게 되었기에 2번으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심판에 대해서 인간이 그 어떻게 대처를 해도 대처가 되지 않는데, 그러니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심판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그 심판 앞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전부가 다 하는 말이, "바위야 내 위에 덮쳐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누가 피하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는 납득할 만한 그런 구원론이 전혀 허락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는 말이다.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왜 아브라함은 말꼬리(?)를 달았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왜 이러한 발언까지 하면서 까지 자꾸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저지하려고 했는지, 정말로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그냥 꼬꾸라져 있으면 되는데, 왜 자기가 티끌만큼도 못하다고 분명히 말은 하면서도, 그렇게 뒤에 말꼬리를 달면서 참견하듯이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방식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방식은 무엇인가? 의인만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의인이 어떻게 악인과 함께 심판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에게 합당하느냐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그런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 의인이 누구인고 하니까, 약속의 사람이 바로 '롯' 인데, 즉 롯이 엄연히 있는데 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려야만 하는지, 그러니 제발 그 심판을 연기하든지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나님께 무려 6번이나 간청을 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이다.
◈ 과연 '의인' 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참 의외의 방식인데, 하나님은 소위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런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면서 그 중에서 의인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까, 이것이 더욱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즉 "저는 의인입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겠고, 이런 심판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은 오직 하나님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서 의인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는 의인이 맞습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심판에서 빼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의 반응을, 어느 정도로 심판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나야 하는고 하니, 순순히 그 심판에 대해서 순응할 정도가 되어야만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심판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말이지 합당합니다" 라고 말이다.
◈ 의인과 악인의 동시심판을 통해서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의견수정에 들어가는데, 즉 "의인이니까 악인과는 함께 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생각이고,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식이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란 말이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생각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의인이 의인다움이 거기에서 피어난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심판을 이야기하게 되면, "의인인데 왜 심판을 합니까?"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맞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이다.
◈ 왜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현 씨의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제목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내용도 맞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창세기 18장에서 그런 제목을 따온 이유는,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가 죄인이라고 해도, 즉 인간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그렇게 대들 수(?) 있는 권한까지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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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현 -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MTS, 문리대학원 종교학부 Ph.D.를 마쳤다.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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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과 주제도 그러한데, 주제가 바로 '인간론' 인데, 사실상 440페이지를 넘어가는 두껍고도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앞으로 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철학과 신학을 모두 전공한 사람이기에, 그것들이 다 농축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신학도 철학의 연장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저자,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하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기존신학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이 책은 1999년도에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다음으로 나온 두 번째 책이고, 이것 말고 '신학은 인간학이다' 라는 것을 비롯해 그 뒤에 계속해서 나온 책들이 있는데, 아무튼 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이렇게 안경을 쓴 이 저자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이 한국에서 자기 신학을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한국에서 말하는 신학들이 이미 철학에서 모두 다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신학의 상황에서, 자기는 이미 그런 것을 다 마스터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학을 첨가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자기 신학을 능가할 수 없다는 자신만만함으로 이러한 글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철학이고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외국으로 나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십자가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책의 뒷부분은 그가 말하는 십자가 신학인데, 즉 복음을 모르는 인간이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교재를 살펴보자.
**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그리고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 철학, 신학, 복음 ??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학과 신학의 차이점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인간학이란 것은, 즉 철학이란 인간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리고 신학은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학은 신을 먼저 우선하는데 비해서 철학은 인간을 우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것은, 신을 우선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신 개념을 철학적으로 따져서 해체를 시켜버리면 다시금 인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철학이고, 신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신학인데,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서 인간으로 다가가면서, 그 인간에게 무엇이 있는가? 그 인간에게 신이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인데, 그러면 결국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철학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첫째는, 이렇게 신에게서 인간으로 나가는데,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신을 규명하고 말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을 끄집어내어서 인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인간은 바로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철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높이는데, 그것이 어디까지인고 하니까, 신의 경계에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굳이 성경에 나오는 용어대로 하면, 드디어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인간이 그렇게 높여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높여졌는데,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철학을 공부해보고 또 신학을 공부해보니까, "아하, 인간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도대체 인간이 신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대답하기를, ①'인간에서 인간'을 철학으로 보고, ②'인간에게서 신'을 신학으로 보고, ③'신에게서 인간'을 복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그야말로 자신만만한데, 자기는 여기 있는 이 1,2,3번으로서 그 질문에 대해서 모두 다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철학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신학도 아니고 복음이 아닌, 그냥 철학이라는 말이다.
◈ 목사님, 여기 아침햇살 1박스 !!
그러니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물론 너무나 어려워서 탈이지 말이다. 얼마나 어려운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 문장 한 문장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A4 7페이지 분량으로 노축해서 요약하다보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저는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섰으니 그 노고를 좀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ㅋㅋ)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겠는데, 다시 교재를 보자.
**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 고대철학의 시발점 -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이렇게 철학은 '진리'와 '존재'를 연결시키는 작업인데, 즉 자기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인간다움인지, 그것이 바로 고대철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에게 맞닥뜨리는 것이 신이 아니고 대자연인데, 자연은 인간보다 강하다는 말이다. 즉 태풍에 인간은 허약하고, 가뭄에 인간은 목말라하고, 거센 파도에 인간은 도저히 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한 수 배워야 할 어른이 누구인고 하니, 곧 '대자연' 인데, 그렇게 자연에게서 한 수 가르침을 얻으려고 하면 대자연의 원리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이 자연의 원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정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 대자연 - 고정과 변화, 어느 것에 우선권이 !!
이런 "고정이 우선인가, 변화가 우선인가?" 라는 싸움에서, 그 두 가지 흐름이 나란히 가는데, 그 주도권은 '고정' 쪽이 쥔다는 것이다. 그 고정됨을 '존재' 라고 하고, 변화됨을 '운동'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존재와 운동이 어느 것에 우선권이 있느냐고 할 때, 존재의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선풍기가 이렇게 돌아갈 때는 변화하는 것 가지만, 그러나 끄게 되면 프로펠라가 선풍기 몸체에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낮에 활동할 때는 마구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밤에 잠을 잘 때는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움직이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고정되어있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사실은 그 두 가지 다가 나름대로 인간다움이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질 때, 사람이 잠을 자야 원기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경우에는 "휴식에서 노동으로, 그 노동에서 휴식으로", 그렇게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시 인간에는 고정된 존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자연도 인간도 존재에 합당하게, 변화를 무시하고 존재를 우대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리에 가장 근접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학이고 말이다.
◈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뭐예요?
이런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저께 우리 집에 있는 사랑스러운 딸 진주가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한 마디로 뭐예요?" 라고 하면서, 아주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졌는데, 그 엄청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말해달라는 것이다.
◈ 진주야, 그것은 바로 '개별자' 란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별자' 인데, 이에 반해서 플라톤은 개별자를 무시하는데, "이 모방체가 어디서 까불어?" 라고 말이다. 즉 인간이 중요하지 철수나 영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수나 영희는 죽으니 말이다. 그렇게 죽으면 남아있는 것이 인간의 모상(模像)인데, 즉 인간의 본질이 중요하지, 개별자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일단 그것은 안다고 치고 더 연구해보니 개별자를 따로 더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자체보다도 개별자를 하나 하나 연구해서, 이것을 다시 종류별로 구별하는데, 성질 급한 놈, 더러운 놈 등등으로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귀납법적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논리적으로 연역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와 개별자 !!
이렇게 개별자를 강조하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데,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경말씀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민중들은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고, 설령 성경이 있다고 해도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것이다. 프랑크의 토속 민족들만 있으니 말이다.
◈ 기억하자, 플로티누스 !!
그럴 때는 교회가 전체적인 교인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별자로부터 출발을 해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의 존재, 즉 신플라톤주의인 플로티누스의 주장처럼 하나의 절대신에게 향하는 그 여정을 사다리처럼 서열화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지금의 이데올로기인 정치적 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목사, 장로, 집사",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의 권한과 절대권위가 이렇게 서열화를 시킴으로서 더욱 더 굳어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 중세에서도 당연히 환영을 받았는데, 이런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서양의 고대나 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하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인데 그를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조금씩 다른데, 도대체 누가 가까운가? 역시나 성경을 독점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아니까, 그들의 말을 들어야 질서가 잡히고 나중에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 ??
오늘날 목사들이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겁 없이 함부로 점점 더 강조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으로 안 된다는 말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놈이라고 안다고 하는 자체가 건방지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바울이 욕을 듣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내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을 하니까, "아니, 우리도 모르는 것을 니 혼자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갖다 붙이자는 말이다. 복음도 믿어야 되고, 행함도 있어야 하고, 성령의 삶도 있어야 하고, 열매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두 가져다 붙이면, 설마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붙여놓았으니, 아마도 한 개보다는 두 개가, 또 세 개가 더 진리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듣는 교인들이 헷깔리든 말든 그것은 관심도 없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잖아" 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과 자기 변명에 치중해서, 자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된다 ??
이것이 중요하니,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렇게 "십자가 복음만으로 안 된다" 라고 했을 때, 이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십자가의 복음을 철학으로 다 변질시켜놓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저자에게 "당신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믿기는 믿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 통과한 과정을 조사해보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고 했으니, 자기 딴에는 통과를 했을 것이란 말이다. 즉 어떤 십자가로 간주하고 통과했기에, 십자가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즉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100%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가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라야만 옳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한 것이 십자가에서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 무인도에 떨어진 성경책 한 권 !!
제가 서울에서 첫 번째 시간에 이런 강의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 섬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야자수가 있고 물이 있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다다다' 하면서 헬기가 한 대 떴는데, 거기에서 성경책이 하나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무인도에 성경책이 떨어지고 난 뒤 2년쯤 후에 그 근처를 지나던 어선이 그만 커다란 파도에 난파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헤엄을 쳐서 이 무인도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양반이 마침 이 성경책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누군가가 2년 전과 동일하게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대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역시나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의 구원과 말씀성취가 무슨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점인데, 인간이 성경책을 보던 말던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이 세상은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니, 무인도에 어떤 인간이 겨우 상륙해서 목숨을 부지해서 성경책을 본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말씀에서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가 없다고 하는 이런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과해야 안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의 중심이고, 그래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성경의 중심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냐는 것이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더 이상 자기 구원은 !!
그러니 이런 십자가를 정말로 통과했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구원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주에 서울에서 이 무인도를 한 예로 던지고 두 시간을 강의했는데, 아마 이것이 의존교회 교인들에게 상당히 어려웠던 것 같은데, 끝까지 이것을 처음 것과 연관시키는 게 힘들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이 상당히 난해한 문제인데, 제가 그것을 예상하고 강의 중간 중간에 헬기를 다시 띄우고 했는데, 사람이 자기를 전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교인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보기에 첫 번째 있는 이것을, 즉 무인도 사건(?)을 성경전체에 들어맞게 이해를 했는지 말이다. 물론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아무튼 의구심이 좀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었을 줄로 인정을 합니다만.
그러니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먼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무인도에 헤엄쳐온 인간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은 왜 여기에 왔을까? 아하, 나를 구원시켜주려고 왔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했으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더 어려워졌습니까?
"아하,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주신 것은, 그것을 내가 읽고 구원받으라고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자기가 없어도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잘 돌아가는데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도중에 물레방아에 '나' 라는 것이 그 하나로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구원 위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이장우 목사님의 명설교 !!
어제 이장우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들어보니 얼마나 제 마음에 쏙 들든지, 너무나도 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좀 남기고 싶은데, 그 내용이 어떠한고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불을 던지러 왔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아버지가 자식과 싸우는 대목을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띄우는고 하니, 프란체스카의 '평화의 기도'를 도입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설교자 모습인데, 평소에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운을 띄워서, 거기에서 동의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제가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이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는 부분인데, 그런데 성경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을 딱 대입시켜서 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는 육에 대한 견해를 충분히 실어주고 있는데,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냥 성경본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육에 대한 부분을 먼저 끄집어내어서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힘은 좀 들겠지만 말이다. 제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 바로 꼭 맞게 나왔다는 것이다.
'평화의 기도'를 먼저 실어줌으로 말미암아서, 교인들로 하여금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잘못된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정에 불화를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그동안 안일하게 교회에 그냥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지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수정하지(?) 아니하고 그냥 밀어 부치려고 한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워도, 당연합니다 !!
그러니 불화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다 평화를 선호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불화하게 하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이 그렇게 불화하게 하는 것을 두고 박수를 친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싸우게 하신 것도 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시어머니와 친할 뻔했네. 아비가 자식과 싸우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를 부셔버리는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는 설교를 하면서 먼저 자기 자신의 선입관을 박살내는 것인데, "역시 하나님은 결코 내 말을 듣지 않고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철학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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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For Peace
- St. Francis of Assisi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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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철학이 중세철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아는 것이고, 그 기본에다가 더 첨가할 것이 없느냐고 연구를 해보니, '어떻게' 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라는 것이 없었는데, '무엇이냐' 라는 것이지 말이다.
◈ 어떻게? - 근대주체사상의 시작 !!
그러니 이렇게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되면, 즉 그동안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거 중세철학이라면, 이제는 달을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달을 알지?" 라고 한다면, 즉 그 동안은 달을 보다가 이제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이 책이 그런 이야기를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 '어떻게'라고 묻는 그 주체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 근대 - 주체가 객체로, 객체는 주체로 !!
이제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무엇' 이라는 것이 그동안 진리였는데, 이것이 그만 주체에서 객체가, 즉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객체이었던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내가 아는가?" 라는 '내'가 또 하나의 객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객체가 몇 개인가? 신과 하나가 되었던 시대에서, 신이 객체가 되는 순간에 뭐도 객체가 되는고 하니, 또 '나1', '나2'가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객체가 되면서, 즉자존재가 되고 대자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즉자(卽者), 즉 '나'로서의 '나'와, '나'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분리된다는 것이다. (어휴!)
이렇게 되면 신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신은 따로 여기(?)에서부터 다시금 출발해야 하는데, 또 다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귀찮다고(?) 그런 것도 하지 않는데, "신은 알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Cusanus - Bewusstsein des Nichtwissens !!
15세기 사람으로 대주교인 쿠자누스(Nicolaus Cusanus)는 말하기를, "무지(無知)의 지(知)를 알아야 한다" 라고 했는데, (원래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서, Bewusstsein des Nichtwissens), 즉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이다"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이 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신을 아는 것과 같은데, 그것이 최고의 앎(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부정신학(否定神學)' 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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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신학 [否定神學, negative theology] - 무신론이나 반신론(反神論), 불가지론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규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그리스도 신학의 한 분야. -두사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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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 무슨 상관이 !!
이것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 인데, 즉 새언약으로서, 옛날에 약속했던 바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 무지의 지가 어떻고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신학으로 들어오니, 예수의 복음은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믿는지, 다시 자기의 인식론 문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교회가 인식론 문제로 들어가야 하는가? 한 놈이라도 더 꼬셔서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한데, "이렇게 하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믿음은 그 정도면 되었고, 삶을 조금만 더 추가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이광호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그런 것인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적인 사랑은 말고, 성령에 의한 사랑을 하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정말 두 가지 사랑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나온 것이 사랑이지, "여러분, 성령의 참된 사랑을 합시다" 라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합시다' 라는 행위 속에 자기가 절대화되어서, 즉 자기가 신이 되어서 존재하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부인된 상태에서 해야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긍정되는 가운데서 백 날 사랑을 이야기해봐야, 그 사랑을 쪼개보면 그 안에 자기 절대화가 그대로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랑이 거절되면, "아니, 내 사랑도 몰라주고" 라고 대번에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나를 불신자로 만드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안에 '나'가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저는 나름대로 쉽게 쓴다고 했는데, 이것보다는 더 쉽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아무튼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교재의 다음 부분을 보자.
** 나아가 칸트에 이르러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적 우위를 선언하는 선험성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 칸트 -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칸트철학을 굳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것을 조사하는 것인데, 곧 그것이 그 유명한 칸트의 3대 저서로서 잘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 이라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인식에 관한 문제이고, '실천이성비판'은 인식으로 되지 않으니까 실천으로 나가자는 것인데, 여기서 '비판'은 평가하는 의미가 아니라 한계를 지운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판단력비판'은, 이것저것보다 더 숭고한 것은 현상계에서 예지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방법은 차단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한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조금 전에 말한 비판 말이다.
◈ 칸트 - '예술'이 곧 우리에게 남아있는 신적 요소 !!
따라서 현상에서 나온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지계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숭고의 미(美)' 라는 것이다. 정의로움의 미, 즉 예술인데, 이 예술이 바로 우리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신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술은 이성의 한계밖에 있어서 따질 수가 없는데, 칸트에 의하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장미는 빨갛다" 라고 한다면 이성인데, 왜냐하면 이성은 빨갛지 않은 것과 대비를 하니 말이다. 장미가 노랗지 않고, 파랗지 않고, 하얗지 않기에, 그래서 빨갛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저 장미는 빨갛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주관적인데, '아름답다' 라는 것은 본인이 아름답다고 느끼면 아름다운 것이고, 아니면 말고 말이다. 즉 아름다움이 그 주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김태희는 이뻐, 최진실은 저리가 !!
김태희를 보고 "아, 예쁘다" 라고 하면, 옆에서 "이쁘다고 하지마" 라고 하면, "알았어. 이쁘다고 하지 않을게. 그래도 김태희는 이뿐데"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최진실은 인간성도 그렇고 별로 이지만, 그러나 김태희는 너무나 이쁘다는 것이다.
"목사님, 연애를 신자하고만 해야 합니까? 불신자하고 해도 됩니까?" 라고 한다면, 신자든 불신자이든 사랑이란 주관적인 것이 주체이고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설령 아슬람이라고 해도, 그 누구이든지 간에 이 사랑 앞에서는 아무도 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땡기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 프로이드 - 의식보다 우월한 게 땡기는 무의식 !!
프로이드는 이러한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땡김을 두고서, 즉 의식보다 우월한 '무의식' 이라는 것이다. 이 무의식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의식이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중세와 근대에 다 나온 것을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더 세밀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백 날 철학을 해도 플라톤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는 말이다.
◈ 지금 우리는, 진실은 없고 모방만 춤추는 세대에 !!
이것이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의 다양체인데, 모방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 네 개, 그렇게 늘어나는데, 거기서 모방만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즉 진실은 없고 모방만 춤추는 세대인데, 이 모방이 우리의 창조력을 자극하는 세대, 그 새로운 모방이 등장함으로서 자극을 받는 세대, 그 세대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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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메시스(mimesis) - 플라톤에서 이데아와 개물(個物)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모방(模倣), 흉내와 함께 예술적 표현도 의미하는 수사학(修辭學), 미학 용어다. BC 5세기경 피타고라스파(派)에 따르면 음악은 수(數)의 미메시스(모방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個體)는 개체가 되도록 한 형상(形相: idea)을 흉내낸다고 하여, 이에 의해서 현상계(現象界)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계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는 주요저서 《국가론(國家論)》에서 목수나 화가나 작가가 모두가 집을 짓지만, 목수의 집에 비교해서 화가나 작가의 집은 허구(虛構)이며, 이것을 가상(假象)이라 하여 예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오히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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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가 넘실거리는 세대 !!
그렇게 자극을 받는 세대의 힘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즉 돈이고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런 힘에 의해서 농락을 당하고 있는데,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런 세대를 두고 저는 감히 '자아가 넘실거리는 세대'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 십자가가 바로 그 자아를 박살내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 자아를 그렇게 부셔버리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복음인데,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기적은 바로 요나의 기적으로, 즉 '십자가' 라는 것이다.
◈ 우리는 낙담케 하는 메시야 !!
이 요나의 기적은 그야말로 수치와 절망감뿐인데, 민중들이 원했던 그런 영웅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아주 수치스럽고 처참하고 비참한, 그리고 죽어버림으로서 우리를 실망케 한 메시야라는 것이다.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조차도 실망을 해서, "당신이 먼저 내려가서 우리를 구원해라.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메시야라고 믿을게"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한없이 낙담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런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밉상을 받던 요나가 3일만에 다시 물고기 배속에서 튀어나오는데, 우리는 아직도 물고기 배속에 있고 말이다. 주님만이 먼저 튀어나왔는데, 우리는 컴컴한 물고기 배속에서, 즉 자아가 넘실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건져내는 힘은 넘실거리는 우리 자아를 박살낼 수 있는 유일한 해머(?)인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욕과 육체를 못박는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보는가? 나중에 끝에 가면 재미가 있는데, 얼마나 십자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지, 철저하게 인간을 깔아뭉개면서도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전형적인 철학자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자기 딴에는 "이 정도면 낮아졌겠지" 라고 하는데, 물론 엄청나게 낮추는데, 그러나 그렇게 낮추기는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 있으면 촛대뼈(?)라도 그냥 까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아직도 젊은 나이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부상과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피히테와 쉘링을 거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 구상적 자아로서의 위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겔에 이르면 '있음'과 '앎'이 같다는 것을 선포하게 된다.
◈ 칸트,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 !!
이것을 좀 설명해보면, 여기 피히테와 쉘링이 나오는데, 먼저 피히테는 자아 절대성인데, 이 세상은 자아가 구상한 것인데, 우리 교재에 나오는 대로 '세계 구상적 자아'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자아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자아는 자아다" 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늘은 오늘 치의 세계를 구상하고, 내일은 내일 치를, 그리고 모레에는 모레 치를 구상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 김 권사님이 혈압이 조금 높은데, 아마 어제는 고혈압이 낮아지는 세계를 구상했지 싶은데, 그렇게 혈압이 좀 낮아지면, "우리 어디에 놀러가지?" 라고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그 입원한 세계가 있을 것이고, 퇴원할 때는 또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는 것이다.
◈ 피히테는 절대자아, 쉘링은 대자연의 합의 !!
그러한 구상에 대해서 쉘링은 주장하기를, '대자연의 합의' 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피히테는 '절대자아' 라고 하면, 쉘링은 거기에서 나아가서, 자아는 대자연에 소속되어서 그렇게 대자연과 합의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대자연과 합의를 하는데 절대이성으로 끌어오려고 한 것이 헤겔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 헤겔 이후 철학은 없다 !!
그래서 서로의 연도가 비슷한데, 즉 "칸트,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의 순서인데, 이 헤겔에 와서는 자연과 인간은 절대이성 앞에서 모든 것이 다 통일된다는 것이다. 정반합(正反合)으로 통일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겔 이후에 철학은 없다" 라고 하는데, 이미 다 끝을 내었다는 말이다.
◈ 헤겔이 말하는 절대이성은, 바로 '성육신' !!
그렇다면 헤겔이 주장하는 절대이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제가 부산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헤겔의 절대이성은 자기를 곧 성육신(?)화 하는 것인데, 즉 자기를 내어주고 다시 회수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성육신이 아닌가?
바로 그 이론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나오는데, 하지만 제가 보기는 이 책이 제 아무리 뭐라고 해도 헤겔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너무나 어려워서 오늘은 다 못하지 싶은데, 아무튼 다음 시간에 헤겔과 하이데거를 공부해서 연결을 제대로 한번 시켜보자는 것이다.
◈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
아무튼 이 다음부터는 모든 철학들이 헤겔에게 시비를 거는 방향으로 전개가 되는데, 즉 헤겔이 변증법을 주장하니, 이에 반대해서 '아도르노' 라는 철학자는 부정변증법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은 인간이 구상할 때 구상하기 위해서 짜투리로 내버려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두피를 만들 때 보면 작은 둥근 그릇을 가지고서 동그랗게 찍어내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짜투리가 생기는데, 그것은 수제비를 만들든지 하고 말이다.
◈ 짜투리, 짜투리, 짜투리 !!
바로 그것인데, 사람은 이렇게 뭔가를 할 때, 즉 자기 세계를 구상할 때 배격해야 할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을 배제하면서 자기는 신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도르노가 보기에는 반칙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도르노가 주장하기를, 이렇게 자기 입장에서 쓸데없다고 내버려둔 사건들이, 자기가 구성한 세계를 반대로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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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르노 [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9.11~1969.8.6] -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로서 프랑프푸르트 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체계성을 거부하고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부정적 변증법(否定的辨證法)》등이 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빈에서 음악에 종사하였으나, 1931년 모교의 철학강사로 취임하였다. 1934년 나치스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49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다시 독일로 귀국,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50년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파시즘연구를 주제로 한 《권위주의적 인간》을 간행하는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체계성을 거부하고, 각 이데올로기 영역에 내포된 정신의 변질적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해내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또 현대음악성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주요저서로는 위에 기술한 것 외에 《현대음악의 철학》(1949), 《Soziologica》(1962), 《부정적 변증법》(1966) 등이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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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예수님은 배척을 당했는가?
저는 이런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십자가 사건이 문뜩 문뜩 떠오르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배척했는가? 예수님은 자기 이스라엘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를 정복하면 메시야로 인정해줄 텐데, 그것이 예수님이 당한 광야에서의 두 번째 시험인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으면, 로마와 싸움을 할 때도 칼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 같으면 충분히 로마를 정벌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처럼,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 먹여 살릴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펼치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경제문제가, 즉 생존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이웃사랑과 구제가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구상하는 세계에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켜 가는데, 이렇게 비켜감으로 결국엔 버림을 받았고, 그러나 버림받은 그것이 부활로 다시 찾아왔을 때, 그래서 버림을 받게 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고 저주를 당할 때, 과연 그러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고, 인정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
아도르노가 이렇게 주장했을 때, 하버마스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아도르노를 반대하고 나오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버리면 도대체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즘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환장하겠는데) 그렇다면 이 하버마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짜투리로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있을 때, 이러한 짜투리를 모으면 세계구상에 기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논리' 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현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 인데,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나 전두환을 배제시키지 말고, 그런 배제된 사람을 참여시키면 더욱 더 진리에 접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즉 의사에 참여함으로서 새로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회를 긍정하는 이론이 또 하나 등장했다는 말이다.
◈ 들뢰즈와 니체 !!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간은 그렇게 참여해서 운동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런 참여된 것에서 벗어나는, 즉 탈영토화 작업을 한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는 '권태' 라는 것을 왜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 사람은 진리가 아니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
이것은 니체가 발견한 것인데, 사람들이 사회이니, 교회이니, 병원이니, 국가이니, 가족이니, 말들은 다 그렇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인간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권태' 라는 것이다. 의외로 진리는 그런 권태에 있다는 것인데, 사람은 결코 이 지루함을 이기지를 못하는데, 즉 사람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에서 좋은 말이 참 많이 나오는데,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심심해서 일하는데,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서 말이다. 아무리 복음적이라도 같은 설교를 3번만 해보라는 것이다. 다들 자고 있지 말이다.
보통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기도를 하면 교인들이 왜 자는가? 물론 장로님의 기도가 길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매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주여, 주일학생에서부터 장년부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라고 하니 그냥 모두들 다 잔다는 것이다. 언제 아멘을 할지 대충은 아니 그때 맞추어서 눈을 뜨고 말이다. 아무튼 지루하다는 것이다.
◈ 항상 새로운 소재를 찾아서 !!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왜 힘이 드는가? 새로운 소재를 개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번에 히트를 쳤다고 해서 다음에도 히트를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을 그들은 아주 고상하게 말을 하는데, '창조' 라고 말이다. 다른 말로는 '창작' 인데, 창작이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의 말이 맞다는 것이다. 우리가 니체 강의를 언제 했지요? 아마 또 잊어버렸지 싶은데, 안개(?)에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그것까지는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헤겔 이후 현대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왜 '참'을 묻는가?"라는 실존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 헤겔의 복음은 십자가가 아닌 성육신 !!
이것이 일리가 있는 말인데, 이 헤겔의 제자가 누구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인데, 그것이 바로 지루함인데, 헤겔이 이렇게 다 이루어놓으니까, 이 헤겔을 공부할 때 알겠지만 이 헤겔은 빈틈이 없고 완벽하다는 것이다. 왜 완벽한고 하니, 철학에 복음을 집어넣으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은 복음이 아니지만 말이다.
◈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
헤겔이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가 아닌 '성육신' 이라는 것인데, 즉 신의 인간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신의 인간됨, 즉 존재론적인 복음으로, 이 복음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언약이란 말은 없고, 다만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논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 과정을 추적한 것이 헤겔의 철학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인간은 그 낮아짐을 통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낮아짐에 대한 역설로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보편성과 자존성을 근간하는 하는 본질과는 대비해서 이제 실존이라는 개별성과 우연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 보편성과 실존 - 어렵다, 어려워 !!
이제 이렇게 '실존'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되면 보편성과 자존성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이렇게 실존이 되면 흔들리는 '나', 날마다 변하는 '나', 이렇게 실존이니 '나' 속에서 보편성과 자존성의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 이전에는 '나'와 더불어서 자연의 보편성이, 즉 보편적인 진리가 무엇이며, 거기에서 '나' 라는 개별성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즉 "나는 어떠한 인간인가?" 라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인식을 하느냐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보편성이 날아가 버리면, "내 안에서 '나' 라는 보편성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라는 문제인데, 도대체 "이 '나' 라는 것이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인데, 그렇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것을 막상 이야기하려면 없는데, 희한하게도 "그래도 나는 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보편성 찾기의 문제와, 그러면서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하니까, 오늘의 '나'의 보편성이 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일이 되면 내일 또 있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 바깥의 문제가 안으로 들어온 것인데, 바깥에서 해소된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 바깥에 있던 문제가 이제는 인간 실존의 내부로 들어와서, 복잡하게 얽혀서 티격태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저자는, 인간의 실존문제에서 복음을 !!
그래서 지금 이 책의 저자인 정재현 씨는 주장하기를, 이러한 인간 실존문제에서 복음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이 성경말씀을 다시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다시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보면, 즉 이렇게 하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고 성경이 있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생각하든 예수님을 생각하든 성경을 보든 간에, 자기 안에서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보편성과 자존성의 문제가 그대로 어디로 이어지겠는가?
그것은 바로 성경해석에 그대로 이어져서,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고 할 때에, 그 예수님의 십자가 갈등을 자기의 갈등과 그대로 연관시켜서 볼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신의 아들 됨도, 그 보편성을 자기의 보편성과 연관시켜서 볼 것이고,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이 발달한 만큼 신학도 발달하게 되는데, 즉 신학을 백 날을 뛰어도 철학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손오공이 부처님 손안에 있듯이 말이다. 자기 딴에는 구름을 타고 신나게 날아서 기둥까지 가서 글을 쓰고 폼을 잡았는데, 결국은 그것이 부처님 손가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은 백 날을 해봐야 철학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것은, 인간이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누가'가 규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개별적 주체의 시공적 상황성을 포함시킬 때만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 삶의 정황(Sitz im Leben) !!
"인간이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누가'가 규정된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삶의 정황(Sitz im Leben)' 이란 것인데, 환경이 인간을 지배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지 말이다. 아니면 서로 교류하고 되먹임을 하든지 말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 정답은 서로가 되먹임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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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정황(Sitz im Leben) - 성서비평학에서 쓰는 개념으로, 독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삶의 자리'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성서 구절이 기록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자주 성서의 '양식(genres)'이라고 불린다.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간단한 예시는, 편지, 애가(哀歌), 비유, 시, 그리고 노래들의 구체적인 유형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헤르만 궁켈에게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이 용어는 신학적 연구 밖의 다른 영역에서도 사용되며, 특정한 텍스트의 사회학적인 상황을 규명하려는 관점을 지닐 때 필요한 개념이다. 언어학에서 삶의 정황은 어용론(語用論)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다 같이 박자를 세는 것이 담고 있는 삶의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그들이 놀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그 박자 내지는 구절은 단지 무궁화 꽃 한 송이가 피었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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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따끈한 DNA 이야기 !!
여기서 DNA 이야기를 조그만 하면, DNA가 메신저 RNA를 전사(복사)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근까지의 이론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생물학에서는, 이 DNA는 메신저 RNA가 하는 전사의 영향을 받아서 DNA가 고쳐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 세포내의 단백질을 만들려고 하면 그 원(原) 정보가 어디인고 하니 DNA인데, 그런데 이 DNA가 인간의 세포 핵 속에서 메신저 RNA를 보내어서, 즉 'M' RNA를 보내어서 복사를 해서, 이 'M' RNA는 거기 DNA에 합당한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도 다시 생겨나고, 피부 트라블도 다시 회복이 되고, 호르몬도 조절하고 말이다. 그렇게 단백질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DNA가 확정된 이상은 그 사람의 역량, 즉 각 세포의 치료역량도 자기의 타고난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서 확정이 되었다고, 그렇게 결정론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는 그렇지 않는데 이 아들의 경우에는 다쳐서 피가 나도 딱지가 잘 붙더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더라는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 이유를 각 환경이 달라서 그렇다고 보았는데, 하지만 이제는 환경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M' RNA가 DNA를 복사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냥 복사가 아니라 아예 복사지가 복사하려는 그 내용자체를 바꾸는 결과를 초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아이디어인데, 예를 들어서 이렇게 책을 복사하면, 즉 흰 종이를 넣으면 원본인 책과 같은 내용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백지가 복사하는 원본 책의 내용을 그만 뜯어고치고 말았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주장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측정해서 되풀이되면 하나의 진리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아직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지의 문제가 남아있어서 노벨 의학상까지는 타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이론이 맞다고 한다면 노벨상을 타고도 남을 이론이라는 말이다.
지금은 이러한 아이디어까지 등장한 시대인데, 사실 이 매카니즘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 A4 용지가 그 원래 글자내용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인데,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조금 전에 말한 만두피에서 그 짜투리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마치 만두피처럼 되는 것만 해결하지 나머지는 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빼려고 하는 것이 현재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루에 커피 3잔 이상은 마셔야 !!
전에는 하루에 커피 3잔 이상을 마시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하루 3잔 이상을 마시면 간에 좋다고, 이것을 영국에 발표했는데 (정말?), 그러면 커피를 많이 마시라는 것인가? 아니면 마시지 말라는 것인가? 포도주의 경우도,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마시면 몸에 좋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술은 무조건 몸에 해롭다고 한다는 것이다. 한 10년 뒤에는 담배를 피면 오래 산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렇게 과학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데, 이것을 철학이 계속해서 메우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변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전에는 '무엇-어떻게'에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누가-언제/어디서'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 즉 '무엇-어떻게'가 '왜?'라는 질문을 고리로 하여서 하나로 연결지어진 것이다.
◈ 왜, 왜, 왜 !!
교재 처음 1페이지에선 '무엇이' 라는 것에서, 1페이지 끝에서는 '어떻게' 라고 되었다가, 2페이지 중간에 가면 '무엇이-어떻게' 라는 것이 처지고, '누가-언제-어디서' 라는 것으로 되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왜' 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아직은 모르는데, 이 '왜' 라는 질문으로 인하여서 하나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연결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에 물이 있는데, "왜 있는가?" 라고 물으면, '왜' 있느냐는 것과 '어떻게' 있느냐는 것은 약간 다른데, 여기에 이렇게 물이 있는 것은 천 목사님이 갖다 주어서 있다고 한다면, "왜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수천 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하면 한 가지밖에 없는데, 천 목사님이 가져다주어서 있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있어야 하는가?" 라고 하면, "목이 말라서" 라고 하든지, 그 답변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답변이 없는 물음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런 '보편적 인간'이라는 같음의 대표 단수성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 개별실존은 명사적이 아니고 동사적 !!
여기 '대표 단수성' 이란 것은, 철이와 영희는 없어지고 인간만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다름의 복수성'은 소위 현재 참여정부와 같은 것인데, 어떤 특정인간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으로서, 명사적이 아니고 동사적이란 것이다. 즉 기능적이라는 말이다.
◈ 저 인간은 무슨 짓을 해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다시 말해, "저 사람은 지금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가?" 라는 것으로, "저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본질인데, 그런데 그런 인격을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저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임스의 '실용주의' 인데, 그리고 존듀이의 '도구주의' 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나에게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다" 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는 도구로서만 말이다. "저 사람을 만나서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익으로만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즉 "저 사람이 하는 행위가 나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라는 것으로 모든 다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기존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있는데, 또 한국 중심당과 한국 창조당이 줄줄이 생겨나고 말이다. 이명박을 욕할 때는 정동영과 이해찬이 그렇게 한 목소리를 내다가, 또 노무현을 욕할 때 박근혜와 이명박이 그렇게 합창으로 욕을 했는데, 그런데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정신없이 싸우다가, 또 하나가 지고 나니 또 서로 협조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정체성을 도저히 감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전부가 다 하나같이 멍멍이 !!
이러한 다름의 복수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직까지도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나는 목사니까 너와는 다르다" 라고 한다든지 하면, 아무튼 전부가 다 하나같이 '멍멍이' 라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할 때도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삶의 열매가 어떻고 저떻고 하게 되면, 이 열매의 경우에도 반만 있는 자가 있고, 조금 더 있는 자도 있고 하니, 또 차이가 나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은 명사적 완결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동사적 '사람됨'이다.
◈ 애완용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세요 !!
아무튼 말이야 얼마나 멋있게 잘하는가?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나' 라고 하는 인간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제 아침 설교시간에 이렇게 말했는데, "내 안에 예쁘장한 애완용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 고양이 사료를 얻기 위해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
그러게 인간은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자기에게 사료를 준다는 말이다. "나야, 오늘도 돈을 벌어왔다. 나야, 맛있게 먹어"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키운다는 것이다. 물론 왜 키우는지는 모르는데, 그냥 어릴 때부터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 정말이지 자기밖에 모르는데, 가면 갈수록 더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자신을 명사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자기구축 작업으로 인해 '자기동일성'으로 목적으로 삼게 되고, 이렇게 되면 타자를 자기 안으로 예속시키든지 아니면 타자를 자기로부터 몰아내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 헤겔철학은 비동일성을 척결하고 !!
참 어려운 말인데, 여기에 '동일성' 이라는 것은 헤겔철학으로서, 이 헤겔철학은 비동일성을 척결하고 전체를 동일성으로 동일성으로 몰아넣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아도르노는 반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동일성은 아까 말한 만두피의 동그라미 안에 있는 것이고, 바깥에 있는 짜투리는 비동일성이라는 것이다.
◈ 동일성, 혹은 비동일성의 진리인가?
그런데 이 비동일성은 서로가 맞지 않다는 것인데, 즉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성의 진리인가? 아니면 비동일성의 진리인가?" 라고 하는 싸움이라는 말이다. 만약 자기가 동사적이 아닌 명사적 존재가 된다고 하면, 즉 자기가 목사라고 한다면, "어제도 목사이고, 오늘도 목사이고, 내일도 목사일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복음과는 상관없이 목사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런 더러운 버릇이 들어있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지저분한 버릇인지, 오직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세워주면 목사이고, 다른 때는 목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사라는 것이 고유명사가 되려면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당한데, 예를 들어서, 코끼리라고 하면 어느 부분을 만져도 코끼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타자(他者)를 자기 안으로 예속을 시키든지, 아니면 타자를 자기로부터 몰아내려고 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가 빠졌는데, 타자를 자기 주인으로 삼든지 말이다. 자기 주인으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한다.
◈ 싫어하는 쪽으로 밀어냄으로 '나'의 윤곽을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파당을 짓는다는 말인데,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가 싫어하는 쪽으로 밀어냄으로서 '나' 라고 하는 윤곽을 대충해서 잡으려고 하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저자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저쪽 니체와 같은 경우에는 뭐라고 하는가? '지루해서' 라고 하는데, 과연 어느 쪽이 맞는가? 사람의 행동은 지루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루해서 말이다.
◈ 호모 루덴스 - 인간은 노는데 천재 !!
네들란드 역사학자인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 라는 책이 있는데, 즉 인간은 노는데 천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학자 융에 의하면, 인간은 에덴동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마구 놀았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쫓겨났기에 부지런히 설치고 일해야 먹고살고, 겨우 짬을 내어서 놀 수가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에덴동산에서는 그냥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노는 것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내 살 중에 살이고, 뼈 중에 뼈이다" 라고 하면서 마구 마구 놀았다는 말이다. 그 흔적이 원형으로, 그 원형을 '아르케' 라고 하는데, 융은 무의식 속에 이 원형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틈만 나면 놀고 싶어서 열심히 일을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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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루덴스 (라틴어, Homo ludens) -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인간관.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하가 제창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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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기는 노는데, 자극을 받으면서 놀아야 !!
그런데 제가 보기에 뭔가가 빠졌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노는데 그냥 놀면 재미가 없으니 자극을 받으면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지루하면 견디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자극을 받아서 노는 것 중에 하나가 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가, 놀다보면 지루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짬을 내어서 말이다.
4,50대의 아줌마들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보면, 그런 사람들은 일을 해도 자기 일처럼 하지를 않는데, 심심해서 일하기 때문에 말이다. 돈이 좀 모이면 그만두고 놀고, 또 그렇게 하고, 그것을 반복하는데, 그런 경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
이제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자기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서 자꾸 차이가 나는 것을 배제하는데, 사람은 서로 분류하는데, 그렇게 해서 적이지 동지인지 구별을 하는데, 이런 짓을 매일같이 한다는 것이다. TV 드라마의 내용도 그런 것인데, "저건 내 타입이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은, 자기 타입이 무엇인지를 정립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 여보, 이 옷이 어울리는지 좀 봐줄래?
여자들이 옷을 입을 때 보면 시간이 엄청 걸리는데, 이 옷을 입었다가 벗고, 저 옷을 입었다가 벗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런데 그렇게 입어보면서 "이 옷이 어울리나?" 라고 하면서 자꾸만 물어보는데, 꼭 진주 엄마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는가? "제발 그냥 니 마음대로 좀 입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번 봐도. 보는데 시간이 걸리나?" 라고 하지만, 그러나 어디 물어보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그 얼마나 지루한지, 사람은 지루하면 하기 싫다는 것이다. (설마 그렇게?)
◈ 저는 최 집사님을 믿습니다 !!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최 집사님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가 잘 사는지 말이다. 이제 퇴직도 하고 시간이 제법 많을 텐데, 그 많은 시간에 무슨 계획이 있는지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는데, 물론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만, 아무튼 그 비결을 한번 물어보고 싶은데, 저도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여분)야말로 바로 실체의 자기 충족성이 지니는 폐쇄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차이'의 자리이다.
◈ 낯선 사건을 통해서 '나'를 !!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까, 낯선 사건이 부딪치게 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아, 내가 모두가 아니구나" 라고 하는 새로운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자꾸만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않으면 지루하기에 못산다는 말이다. (그래서 젊은 나이가 시골에 너무 오래 있으면 지루해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한 평생을 같이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지 말이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공히 둘 다 똑같은데, 세월이 한 10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이제는 무엇을 맞추는 것도 지겹다는 것이다. 이미 볼 것 다 보았고 알 것도 다 아는데, 그러니 더 이상 맞추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
그렇게 되면 그때는 '묻지마 관광'을 가던지 해서, 그렇게 유부남을 만남으로 인해서 새로운 계기를 갖는데, 그런데 그 유부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유부남을 통해서 "아하, 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네" 라고 하는, 즉 자기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이다.
◈ 칸트 - 즐거움을 잊어버리면 인간이 아니다 !!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인간이 사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즐거움'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즐거움을 잊어버린다면 인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가 그 두껍고도 무지막지한 '실천이성비판' 이란 책을 써놓고,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즐거움을 잊어버리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즐거움이 일종의 고급예술인데, 그 당시에 모차르트가 나오고 할 때이니 말이다.
이 모차르트의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주가 피아노를 연습한다면서 칠 때, 물론 처음에는 시끄러운데 그런데 나중에는 그 소음(?)에서 예술이 나오니까 그 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흐름을 다 파악이 되고 말이다.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 진주야,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라도 !!
그래서 진주에게 그 예술을 카페와 같은 곳에 가서 실행하면 안 되느냐고 하니,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했다고 면박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런 어려운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밥이고 뭐고 다 중단하고 그 예술에 함께 공유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표하는 이 예술의 깊은 맛에, 모든 것을 다 중지하고 참여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트로트와 박 마담과 쌍화차 한 잔 !!
그래서 시골의 읍내다방에 가면 의지가 마주보고 있으면서 트로트가 나오지만, 그러나 도시의 고급 카페에 가면 클래식이 나오면서 의자도 음악이 나오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골다방에서는 뽕짝은 뽕짝대로 나오고 늙은 마담은 쌍화차를 한 잔이라도 더 팔려고 수다를 떨고 말이다. 그러니 음악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극은 좀 받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클래식을 전공하고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놀러가서 한 잔을 마시고 노래방에 무엇을 부르는고 하니, 트로트를 부른다는 것이다. 왜? 지루하니 말이다. 그래서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만남이란 말이다.
◈ 현대인들 - 오프라인에서는 침묵하고, 온라인에서는 밤새도록 대화하고 !!
그래서 현대인들은 두 가지의 경향이 있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자기를 감추어버리고 없어지게 만든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사라지고 해놓고는 무지무지하게 만나는데, 어디에서인고 하니까, 인터넷에서 만난다는 말이다. 전혀 문밖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는 무지무지하게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모순되는 이중성이란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서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그냥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리고 이제는 실제로 만나서 말하는 것조차도 피곤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집으로 가서는 인터넷으로 밤새도록 채팅을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오프라인에서는 마구 침묵하고 온라인에서는 밤새도록 대화하고 말이다.
◈ 들뢰즈 - 정신분열증적인 자본주의적 현상 !!
이것을 두고 들뢰즈는 정신분열증적인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는 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즉 자기의 절대화를 돈으로서 확인하고, 또 권력으로 확인하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
앞으로 점점 더 이렇게 되는데, 사람이 사는 집의 경우에는 전원주택이라는 것이 등장하다가, 이제는 아에 집이 숲 속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런 커다란 숲 속의 나무 위에다 집을 짓고, 여기에 흔들다리를 만들어서 땅으로 내려가도록 하고 말이다. 아무튼 어릴 적에 한번쯤 꿈꾸었던 그런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또 주택업자는 이것에 착안해서 나무를 왕창 심어서 이 나무 위에다 집을 지어서, 집과 집을 곧바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해서 또 연결응 하고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서 집을 분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집안에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게 되는데, 그 나무의 가지 중간 중간에다가 가구를 배치하고 말이다. 그러니 집 자체가 바로 나무이고 숲이라는 것이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아예 이 거대한 숲을 통 채로 사서 나무를 베지 않고 집을 짓는데, 나무를 베지 않으니 집 짓는 허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무는 나무대로 살리고, 그리고 이 나무에다가 주택에서의 기본적인 가구나 꼭 필요한 주방기구 같은 것들만 군데군데 배치를 한다는 말이다. (말이 쉽지, 어떻게 설치하지?? 나무나 엄청나게 큰가??)
◈ 바람이 통과하는 구멍 난 아파트 !!
인간들이 머리를 얼마나 잘 쓰는지, 결국은 아이디어의 싸움인데,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그것이 또 하나의 '권태'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좋던 아파트도 이제 권태로운데, 앞으로 어떤 아파트가 나올지 기대가 되는데 말이다. 아마도 바람이 통과하는 구멍 난 아파트, 뭐 이런 것이 나오지 싶은데, 아니면 말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숲 속의 주택을 나무 위가 아닌 나무를 파고 들어가서 짓지 않을까 싶은데, 그 나무가 실내의 공기를 다 정화시켜주고, 그러니 더 이상 맑은 공기걱정도 할 필요가 없고, 또한 나뭇잎으로 말미암아서 습도도 조절되고 말이다. 앞으로 우리교회를 그러한 나무 속에다 지었으면 하는데, 우리 장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무 안이라서 벌레가 걱정이 된다구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런 것을 세스코(?)에게 맡기고 말이다.
◈ 잉여지대(여분), 차이, 다름 !!
이제 이것만하고 마치겠는데, 교재에도 나오듯이, 바로 이런 만남을 통해서 잉여지대, 즉 여분이 발견되면서 '차이'가 생기는데, 거기에서 창조적으로 만나서 만들어지고, 또 새로운 자극을 받아서 새롭게 날마다 '다름', 즉 차이와 차이를 생산하는 시대, 바로 이런 시대가 '누가-언제-어디서' 라는 것이 적용되는 시대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자아가 살아있는 이상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자아를 꾸며야 할지, 걷잡을 수 없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점점 더 멀어지는 이 시대에, 이 복음을 아끼지 말고 제대로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2008,03,04 심야 00시 55분에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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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루덴스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호모 루덴스>는 한 위대한 학자의 평생의 연구 결과를 자연스럽게 결산하는 학문적 소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행위양식의 본질 규명에 새롭게 도전하는 기념비적 저서이다.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모 루덴스라는 것이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 언어학, 철학, 심리학, 종교학 등을 광범위하고 다채롭게, 또 거시적으로 구사하여 새로운 인간관 <호모 루덴스>를 제시한다.
[저자] 요한 호이징하 (Johan Huizinga) -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Groningen)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흐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 어,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스트 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허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el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목차]
001. 문화 현상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의미
002. 놀이 개념의 언어에서의 표현
003.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서의 놀이와 경기
004. 놀이와 법률
005. 놀이와 전쟁
006. 놀이와 지식
007. 놀이와 시
008. 신화적 시의 요소
009. 철학에서의 놀이형식
010. 예술에서의 놀이형식
011. 놀이의 아종으로서의 서구 문명
012.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