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선생의 기록과
윗대 선조들과 아랫대 선조들에 대한 전해지는 자료를 볼때
주관적인 자료라 함은 족보와 문집이라 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자료라 함은 고령김씨 집안 밖에서 작성된
개인 문집, 일기, 서간, 지방지, 왕조실록, 향안, 혼인관계가 있는
타 집안의 족보 등은 우리 고령 김씨의 이해관계가 없는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주관적인 자료라 할 수 있는
고령김씨 집안의 자료는 족보와 송암선생 문집이라 할 수 있는데
족보의 첫 간행이 조선 영조 38년 임오년(1762) 때이고
고령 유림들이 제작했던 송암 문집이 초간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송암실기라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료 중에
고령현감인 김해김씨인 김중조 어른과 풍암공의 방계에 현손이신 상자 보자 어르신의 발문이 있는
정조10년 (1786년 병오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송암실기의 재간본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 송암실기는 나중에 또 이야기 하기로 하고..
판본에 내용과 임오년에 발간된 족보에 있는 내용과 동일하고
문집 간행시 자료를 모으는데 쉽지 않았다는 것은
울산에서 간행된 송암실기의 마지막 장의 발문을 쓰신 두와 최흥벽 선생의
문집인 두와선생문집 제 3권에 편지글인 "서" 부분에 학봉 김성일 선생의 후손인
내앞 천정 종택에 경독재 김 어르신(丈)인 용찬 선생께 보낸 편지글을 보면 이때의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령김씨 문중에서 작성한 문헌을 떠나서
객관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송암실기에 인용된 문헌 중에
남평 문씨이신 모계 문위 선생의 일기인 "모계일기"와 당시에 상황에 대해
개인적 일기로 남아 있는 함양의 남계서원을 지키신 고대 정경운의 "고대일기"가 있습니다.
모계일기와 고대일록은 집필자가 직접쓴 일기이고
필사본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기 때문에
중간에 첨삭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때
다른 사료 보다 객관적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고령김씨의 다른 선조어른의 함자는 확인 되지 않지만,
송암 선생과 선생의 아우이시면서 충청도 노성 판윤공의 후손으로 양자로 가셨으며,
송암선생의 부친이신 경원 부사 "世자 文자"어른의 적자이신
"김자(金滋)" 어른의 "자(字)-지화(志和)"가 확인된 다는 점에서 객관성이 높은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고대 선생께서 쓰신 "고대일록"에서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정유년(1597) 2월 임술 초하루에 기록을 보면 " 여러 벗들과 함께 찰방(察訪) 김지화(金志和)를 찾아뵈었다. 김송암(金松庵) 부인(夫人)의 상(喪)에 조문(弔問)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송암 선생의 계비이신 전주이씨 께서 이때 돌아가시고
송암 선생의 아우이신 "滋" 어르신께서 상주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송암 선생의 묘를 이장할때
넓은 형태의 목재로된 외관 안에
송암 선생과 첫번째 부인이신 전주이씨 부인을 부장한 내관이 나오고
다시 거기에 더해진 내관이 하나 있는 것으로 봤을때
계비 이신 전주이씨께서 돌아가신 후에 합장하여
이장 전의 송암 선생의 묘가 이때에 조성됐다는 것을 다시금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작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