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수안(遂安)은 황해북도에 있는 지명이다. 고구려에는 고소어(古所於)·장새(獐塞)였으며, 748년(신라 경덕왕 7) 장새현으로 개칭하여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수안현(遂安縣)이 되어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다시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는 수주(遂州)로 승격되었다.
1417년(태종 17) 수안군(遂安郡)이 되었다가, 1653년(효종 4)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었다.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암면·공포면·도소면·수구면과 대오면의 일부지역을 연산군에, 율계면을 연탄군에 이관시키고 신계군 사진면의 신리·석교리·산북리·사이곡리를 통합하여 군경계를 조정하였다. 1954년 곡산군 서초리가 평원리에 흡수되었고 용포리의 일부를 좌위리로, 옥치리의 일부를 도전리로, 도전리·산북리의 일부를 용현리에 흡수하였다. 1963년 산북리·석교리의 일부를 분리하여 주경리를 신설했고 1974년 조양리를 옥치리에 통합시키고 조양리는 폐지하였다.
성씨의 역사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 초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재직하다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명으로 조선에 예학(禮學) 전수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후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져서 수안계씨를 창성(創姓)하였다. 수안계씨는 계석손 대에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에 집거(集居)하다가 그 아들 대에 이르러 전국으로 이거(移居)하게 된다. 계석손의 큰 아들인 계원우(桂元祐)는 선천(宣川)으로, 둘째 아들인 계원조(桂元祚)는 강화(江華)로, 셋째 아들 계원시(桂元禔)는 강동(江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이후 16세손 계덕룡(桂德龍)이 삭주에 터를 잡았고 그 자손은 의주까지 퍼져가서 계씨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계씨가 경기도 양주(楊州)에 이거한 때는 20세손 계극수(桂極秀) 때라고 전한다.
분적종 및 분파
선천장파(宣川長派) 외 군현파(群賢派), 대산파(臺山派), 산안파(山安派), 정문파(旌門派), 동면파(東面派), 원동파(院洞派), 대목파(大睦派), 봉곡파(鳳谷派), 인동파(仁洞派), 봉산파(鳳山派), 녹산파(鹿山派), 강계파(江界派), 강화파(江華派), 강동파(江東派), 수안파(遂安派), 평양파(平壤派), 성천파(成川派), 은산파(殷山派), 용강파(龍崗派), 증산파(甑山派), 영유파(永柔派)가 있다.
주요 세거지
평안북도 선천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수안계씨는 1,951가구 총 6,24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