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첫째 주)
사랑으로 흔들어 깨우시다
사43:1~7; 행8:14~17; 눅3:15~17,21~22
오늘은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이자 주님수세주일입니다. 우리가 매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력으로는 1월 6일 주현절을 지납니다. 주현절은 부활절 다음으로 기독교가 소중하게 여겼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람으로 현현하셨다,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이지요. 2세기부터 지켰다고 하니까 기독교 아주 초기부터 지켜왔던 절기입니다. 주현절은 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현절인 1월 6일은 동지와 소한 사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시기입니다. 동시에 그 긴 밤은 이제 점점 짧아지겠지요. 그래서 주현절에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간절히 “빛”을 기다리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때 또한 우리는 새로운 빛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해돋이를 보면서 한해의 소망을 빌기도 하지요.
우리가 한 해를 맞게 될 때, 어떤 때는 희망 가운데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게 되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매우 지치고 탈진한 모습으로 새해를 맞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새해라는 기분이 전혀 없이 무감각하게 맞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안정감을 가지고 출발을 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갈 길을 다 잃어버리고 혼돈 속에서 맞이하는 때도 있지요. 나를 안내할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는 막막함, 연료가 다 떨어진 느낌으로 출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요? 그러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었던 길을 되돌아보고,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떤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양식은 준비되어 있는지, 내 체력은 든든한지, 우리의 손에는 분명한 지도가 들려 있고 갈 길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지, 번거롭고 짐만 되는 잡동사니들을 무겁게 끌고 오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면서, 우리의 여행방식을 바꾸거나 다른 길로 가야되지는 않는지를 한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일을 꼭 새해에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주기적으로 이런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례력에서 주현절부터 사순절까지의 기간은 바로 이런 일들을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안에는 신성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살아가게 하고 생기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불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불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잠시 살게 하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켜 놓으신 불꽃입니다. 우리 안의 성전에는 이 불꽃이 늘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시선이 밖으로만 향해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성전의 불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불꽃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불꽃의 모양과 성질은 많이 바뀔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은은하고 고요한 등불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고요한 등불, 이것은 우리 삶이 더욱 온전해 진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꽃 자체가 완전히 감추어지면, 문제가 다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삶을 긍정하기가 매우 힘들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이 다 사라지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전6세기에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의 백성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굴욕적으로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좌절 가운데 깊은 회한과 죄책감을 품고 그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서서히 바빌론에 동화되어 갔고, 마르둑 신전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성전의 등불이 꺼진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의 등불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의 촉수는 밖으로 향해 있었고, 밖에서 오는 위로와 양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뜨거워져가는 물속에 헤엄치고 있는 개구리처럼, 그들은 오히려 그곳이 안락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은 바로 이런 유다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흔들어 깨우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은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43장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그 앞뒤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오고(1절, 5절), 이들을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아니 그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인지를 두 번, 처음과 마지막에서 밝힙니다. 즉 1절에 “너를 창조하신 주님”, “너를 지으신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마지막 7절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내가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히브리어 성경에는 “내가 빚은 사람들, 내가 만든 사람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중심 말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은, 좌절하고 등불이 희미해지고 의미마저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망하여 그렇게 먼 이국땅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 것은 네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망해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래전 유다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들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부끄러워하지도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직역하면,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내었다, 너는 나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각 사람들의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잠들어 있고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깨우시고 밝히시는 분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일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조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바라), 조성하셨다/빚으셨다(야짜르)는 말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계시며,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시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가령 보배롭고 존귀하여 여겨 너를 사랑하였다는 말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시는 중이라는 말이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너를 창조하고 빚으시는 중이라는 말씀이며, 너의 이름을 불러내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라는 말씀도 지금 너를 창조하고 빚으시는 중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어 깨우시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너를 창조하고 빚으시는 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 곧 우리의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바로 영원한 시간, 곧 지금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시는 것을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고 빚으시는 것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창조하시고 빚으시고 계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싯구처럼, 우리는 은연중에 ‘우린 여기가 제일 좋아’, ‘평화롭고 안전한 걸; 꼼짝하지 않겠어.’ 고집을 부리거나, ‘싫어, 나더러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 라고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자주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천히 기다리시며 ‘너희들은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일어나라!’ 하시며,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며 다시금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롭게 빚으십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나가야 할 때도 있고, 강을 건너야 할 때도 있고, 불 속을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망하게 하고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여기서 여러분도 알아차리셨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시는 데는 우리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는 동의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실 때 자신들을 그대로 맡겨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고집을 부리거나 저항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창조자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창조하고 빚으시도록 맡겨 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도록 맡겨 드린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집도 부리고 저항도 할 것입니다. 좌절도 할 것이고 여러 가지 나름의 판단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서서 “아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돌아서 “아멘” 하는 연습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하는 기도(향심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 묵상과 예배입니다. 아마도 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너무 식상한 말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알아차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 하나 하나가 갖는 함의를 알아차리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동작 하나, 우리의 말 한 마디 속에 담겨 있는 함의를 알아차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좀더 진정성 있는 방향으로 한걸음씩 옮겨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때 들으셨던 말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지금도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켜있는 고요한 등불입니다. 이 고요한 등불이 켜져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동작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고요한 등불이 우리를 밝히고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것 하나하나까지도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내 삶이 보배롭고 존귀한 삶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의 삶에 등불을 밝혀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으로 흔들어 깨우실 때, 우리가 동의하고 깨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