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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한국에서는 꽤나 솔깃하게 보이거나 읽힐 성싶은 이른바 “책은 도끼다”는 구호(口號)나 속설(俗說)이, 근래에, 언필칭, 책 꽤나 읽는다거나 독서 꽤나 한다고 은연·공연하게 자부하거나 회자(膾炙)되는 이른바 독서인(독서가; 교양인; 문인)들 사이에서 꽤나, 그리고 어쩌면 광고업계에서는 더 꽤나, 흥행했으리라고 얼추 짐작된다.
그런데 꾀죄한 눈치밖에 갖추잖고도 반란독증(半亂讀症)마저 심심찮게 앓아대는 미욱한 죡변의 야살스러운 눈깔에는 “책은 토끼다”로 초독(初讀)되어버린 ㅡ 이른바 “쉽게! 간결하게!”라는 구호가 워낙 횡행하는 한국에서는, 딸랑 ‘이’만 꼈는데도 못 참아 히스테리부릴 개체들에게는 몹시 성가시게! 길게! 짜증스럽게! 인지되어 무시당할 수 있을 “책은 도끼이다”는 구호보다 딸랑 한 글자 더 짧을뿐더러, 죡변처럼 얄망궂은 시독자(始讀者)에게는 “토끼는(달아나는; 도망치는) 책”이나 “토끼처럼 빠르게 내달리는 책”마저 망상(妄想)시켜버릴 수 있을 ㅡ “책은 도끼다”는 구호의 출처도 꽤나 유명하다.
이 구호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신묘하게도, 그것을 앞세우거나 인용하여 기대어버릇하는 잡지들이나 책들의 은연공연한 ‘자기계발서스러운 실용성’을 후다닥 숨겨버리는 효능을 발휘하고, 그런 매체들의 독자를 이른바 “열린 태도”나 “개방성” 따위의 소유자로 자부시키거나 자처시킬 수도 있을뿐더러 “열린, 개방된, 개명된” 척시킬 수도 있을 효능마저 발휘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신묘한 구호에 애착하거나 기대어버릇하는 독서인(독서가; 교양인; 문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은연·공연하게 후루룩 뚝딱 요구되거나 얼핏걸핏 자랑되는 “열린 태도나 개방성”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닫힌 태도나 폐쇄성이나 자폐성”을 솔깃하게 포장하려는 심정(心情)의 빈말(헛말; 허언)일 확률은 결코 낮잖으리라.
하여튼, 근래에, 적어도 한국에서는, 사실상, 상술상(商術上), 독서시장에서 “거의” 완전히 철수한 ‘(자기계발서스러운) 실용서’의 아류처럼 보이는 책들을 한동안 꽤나 흥행한 ‘인문서’로 보이도록 윤색하는 효험마저 발휘한 이 구호의 원조는 보헤미아(Bohemia) ㅡ 체크 공화국(Czech Republic)의 서반부(西半部) ㅡ 출신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이다.
이 구호의 기원은 카프카가 ㅡ “만약!” 요즘 한국에 있다면 “거의” 확실히 이른바 “다 큰 어린애”로 취급받기 마련일 “겨우(?), 고작(?), 기껏해야(?)” ㅡ 스무 살즈음(1904년 1월 27일)에 그의 김나지움(Gymnasium; 중등학교) 동창 ㅡ 훗날에 체크(Czech)의 예술역사학자가 되는 ㅡ 오스카 폴락(Oskar Pollak, 1883~1915)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글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목격된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물어뜯거나 푹푹 찔러대는 통렬한 책만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우리의 골통을 강타하여 일깨우지 못하는 책을 우리가 읽어서 뭐하겠는가? 그런 책도 자네가 쓰는 책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렇다면 내가 맹세컨대, 우리는 차라리 아무 책도 갖지 않는 편이 행복할 걸세. 물론 우리에게 그런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우리가 그런 책을 직접 억지로 쓸 수는 있겠지. 그러나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책은 우리를 무참하게 괴롭히는 재앙 같은 책,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책, 아무도 없는 적막한 숲속으로 추방되어 쓸쓸히 죽어가는 살기자(殺己者) 같은 책이야. 책은 모름지기 우리의 내면에서 결빙(結氷)된 바다를 쪼개버릴 도끼여야 한다고 나는 믿네.”
그런데 “책은 ...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주장과 함께, 적어도 한국에서는, 여태껏 심심찮게 인용된 “우리의 내면에서 결빙된 바다” ㅡ 이른바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나 “우리 안의 꽁꽁 얼어붙은 바다” ㅡ 라는 글마디(句節)는 카프카가 자신과 친구의 내면은, 결빙되었든 그렇잖든 하여간, “바다”처럼 심대(深大)하다고 생각했거나 상상했거나 자부했거나 자신했을 높은 가능성의 “거의” 확실한 증거처럼 보인다.
이렇다면, 적어도 한국에서는, “책은 도끼다”를 은연하게나 공연하게 들먹이거나 연호하며 자신의 “열린 태도나 개방성”을 암시하거나 과시하는 개체들이나 집단들도 나름의 내면이 “바다”처럼 심대하다고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자부하거나 자신하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게 생각-상상-자부-자신하여 “책은 도끼다”고 은연공연히 자랑스럽게 주워섬겨버릇하는 개체들이나 단체들이 있다면, 죡변의 꾀죄하고 얄궂은 눈깔이 그들의 내면에서 “바다”를 목격하기는커녕 “호수”나 “저수지”나 심지어 “연못, 웅덩이, 둠벙, 우물, 옹달샘”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동잇물이나 자리끼나 접싯물” 따위밖에 적발하지 못할 확률도 영영 없지는 않으리라.
더구나 그들 중에는 자신의 내면은 접싯물조차 담지 못할 만치 옹졸하게 꽁꽁 닫혔는데도, 그리고 때때로 접싯물조차 담지 않으려고 히스테리부려대는데도, 무려 도끼질까지 해야 쪼갤 수 있을 만치 꽁꽁 얼어붙은 “바다”처럼 심대하다고 착각하거나 망상하거나 맹상(盲想)할 개체나 집단도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
아래왼쪽사진에는 1906년에 촬영된 카프카의 모습이 담겼다. 아래오른쪽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Tiziano Vecelli; 티션Titian, 1488~1576)의 1576년작 유화 〈박피형(剝皮刑)을 받는 사튀로스 마르샤스(La punizione di Marsi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