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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건 빛 칼럼 ] 교회 안의 우상 숭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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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건 목사 / 빛 교회 담임, 조직신학, Ph. D.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안고 살고 있다. 사람의 제문제(諸問題)를 풀기 위해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사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전거는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사람에 관계된 중요한 사실을 이해함으로 사람이 가진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살고 있다. 이 우주 속에 스스로 존재하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른 모든 것은 그의 피조물로서, 그 존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요, 사람은 그에게 그 존재와 생명이 의존되어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사람이 스스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때,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떠날 수 없다. 마치 혼자 풀 수 없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두고 쩔쩔 매는 학생과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에 안식과 평안을 제공해 준다(히4: 3). 우리 생명을 돌보아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을 항상 편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삶의 원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로 계시하신다.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마6: 32), 우리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시는 분이시다(마10: 30).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약 1: 17). 적어도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이런 사실이 허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고백이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와 구원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신 분이시다. 그 독생자를 내어 주신 분이 어찌 다른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물으신다(롬8: 32). 사람의 불안과 두려움은 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복된 사명을 위해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일이요(창1: 28),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삶을 위해 지음 받았다(신 6: 13, 마4: 10). 사람은 이 복된 사명의 수행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가장 깊이 체험하게 된다. 반면, 이런 사명을 모르고, 자기 소욕대로 사는 삶은 결국 무가치한 삶으로 내어 버림을 받게 된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만족과 목적을 위해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없음이 당연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을 위한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리, 곧, 사람의 존재의 방법과 목적을 바로 아는 일은 신앙인이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성경의 주요한 원리라 할 수 있다. 우리 사람은 우리 조상의 타락과 함께 엄청난 변화를 우리 속에 갖게 되었다. 사단의 유혹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보다는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 것과 함께, 삶의 목적을 하나님 대신 사람 자신에게 둔 것이 타락의 근본 내용이다. 그 타락 이후,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살기를 원하며, 삶의 목적은 자신에게 두고 살고자 한다. 자신의 만족, 자신의 영광과 성취가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그런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다. 우상 숭배는 이 잘못된 시작의 연속으로 따르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을 인식하기보다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되기 원하고, 그 대상을 자신이 결정하거나 컨트롤 하기 원한다. 그 한 가지 예가, 시내 광야 여정에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었던 “금 송아지” 우상이다.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없음에도 사람은 그 하나님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형상화하기 원한다. 그것도 사람이 쉽게 길들이고 컨트롤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모든 우상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숭배하고, 사람이 컨트롤하기 원한다. 오늘날 우상 중의 하나, 돈을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숭배하고, 사람이 컨트롤하기 원한다. 그러나 그 우상 숭배 속에서 사람이 정말 자신의 삶의 깊은 의미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성경은 그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요, 그 돈을 좇아 가는 삶은 결국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찌른다고 경고한다 (딤전 6: 10).
우상이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대신, 사람이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수단이다. 역사 속의 여러 형태의 우상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황폐화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상과 더불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우상이 소리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창조자(Creator)시요, 보존자(Sustainer) 이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돈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는가! 이 우상숭배를 말할 때,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 안의 기복신앙이다. 이 기복신앙, 복을 추구하는 신앙은 우상숭배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그를 가까이 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주시는 물질과 축복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대신,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 거기에 기복신앙의 허구와 잘못이 있다. 이러한 기복신앙을 전파하는 목회자들의 드러난 삶을 볼 때,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비움과 섬김의 삶”을 내버리고, 돈과 돈이 가져오는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인들 속에서, 자기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 땅 문제로 시비가 있었을 때, 롯에게 선택권을 주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대신, 불법적으로라도 땅과 물질을 차지하고자 한다. 아브라함의 고상한 기개는 어디서 찾을까? 그러고도 교회 안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면, 하늘에서 아브라함이 얼굴을 찡그릴 것 같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말씀한다(롬 14: 18).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수단이 되어 버린 사람에게는 오히려 정죄와 비난이 따름이 당연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분들은, 창조의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여,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심고 뿌리는가, 그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은 열매를,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의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다(갈 6: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