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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7.-31간 목포.고흥.보성 여행이야기.
(여행 개요)
고향 친구가 농사짓는다.120마지기의 벼농사를 짓는다.이 친구는 목포시 아파트에 살면서 농장 근처의 시골에는 농사용 집이 따로 있다.그래서 농사철에는 거의 시골의 농사용집에서 살기 때문에 목포시 아파트는 거의 비워두고 있다.내가 이 빈 아파트를 이용해서 남도 여행 기간중 숙박지로 이용하면서 목포시 고흥군 보성군 여행에 나섰다.
(목포해상케이블카 관광 불발)
10.27일 아침 07시33분경에 서울 도봉동 집을 나서서 목포시로 향했다.물론 조수석에는 집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교대로 했다.목포시에서는 우선 (1)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 (2)이난영 공원 (4)갓바위공원 (3)자연사박물관과 문예역사관 순으로 관광계획을 잡았다.
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장을 찾아갔다.인터넷상에서는 해상케이블카 주차장이 검색되지 않았다.061-114번으로 전화해서 목포해상케이블카 안내소를 물어서 061-244-2600번이란 안내소 전화번호를 알아냈다.이 번호로 전화했더니 음성안내멘트가 연결되었다.음성안내멘트는 케이블카 주차장 주소가 “목포시 죽교동 516-101”이라고 알려줬다.이 주소를 네비에 찍고 찾아갔다.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오늘이 일요일이라서 관광객이 몰린 것 같았다.일요일이 아닌 평일에 다시 찾아올 계산으로 포기해버렸다.
(이난영 공원 관광)
별수 없이 삼학도 이난영 공원으로 향했다.사전에 검색한 이난영 공원 주소 “목포시 삼학로 92번길 25”를 네비에 입력하고 떠났다.찾아가서 보니 이난영 공원은 삼학도에서 제일 큰섬의 서쪽 비탈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이난영 가수는 백일홍(배롱나무) 나무밑에 수목장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이 백일홍 나무 앞에는 “이난영 나무”라는 오석 표지석이 서 있었다.파주시 용미리에서 2006.3.25.자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이난영 가수는 1916년생 이옥례(이난영의 본명)라는 이름으로 목포 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배우의 꿈을 안고 목포공연을 하던 태양극단을 따라나선 것이 가수의 출발이었다.이후 오케이 레코사에 등용되어 1935년에 부른 “목포의 눈물”이 히트하면서 성공한 가수가 되었다.가수도 성공하면 이렇게 대대손손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예술인이 되었으니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대대손손이 악명으로 기억되는 역사적 인물도 – 을사오적신 같은 인물등 - 얼마나 많은가.
(목포시 삼학도 제일 큰 산 서쪽 비탈에 있는 이난영 공원
모습.백일홍 나무밑에 수목장으로 안장된 모습)
(갓바위 공원 관광)
나는 60년대 초부터 6년동안 갓바위 부근에서 살았다.그때 살면서 갓바위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 뜻은 몰랐다.왜 갓바위라고 부르는지를 몰랐다.갓바위가 있는 산에 소풍가서 산위에서 놀았지만 산 아래 남쪽 바닷가 비탈에 위치한 갓바위는 보이지가 않했다.반드시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까이 지날 때만 보이는 그런 곳에 있는 바위가 갓바위였다.그래서 갓모양의 바위들이 바닷가 비탈에 붙어있는 지도 모르고 그 세월을 살았다.그런데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 갓모양 바위 존재를 사진으로 구경한 나는 꼭 그 실물이 보고싶었다.그래서 이번에 갓바위 공원을 찾았다.
이제 와서 현장을 보니 도로변에서 갓바위까지의 진입로를 비롯해서 이 갓바위 앞 바다위에해상 데크까지 만들어져 있어서 관광객들이 걸으면서 바다에서 갓바위를 바라볼 수 있게 잘 만들어져 있었다.갓바위 실물은 꼭 갓을 쓴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그래서 갓바위란 지명이 생겼음을 알았다.해상데크 뒤편으로는 영산강 하구둑 서쪽 바다와 이 바다 건너 영암군 삼호면 대불산업지 등이 아련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갓바위공원을 해상 데크에서 바라본 갓바위 모습.갓을
쓰고 있는 바위가 있는 곳이라서 갓바위라고 함)
(갓바위 해상데크에서 바라본 영산영 하구둑 모습과 그 우
측으로 영암군 삼호면의 대불산업단지 모습)
갓을 쓴 바위에는 아름다운 전설도 있는데 그 내용은 효심이 많은 젊은이가 아버지 시신을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으려고 관을 옮기다가 실수로 그 관을 바다에 빠뜨렸다.이 젊은이는 하늘을 볼 수 없는 큰 죄책감 때문에 갓을 쓰고 이곳에서 저 갓바위의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갓바위에 대한 안내문과 구전되는 전설내용을 설명하고
있음 표지판 모습)
(자연사 박물관과 문예역사관)
갓바위 구경을 마친 우리는 인근에 위치한 자연사 박물관과 문예역사관 구경에 나섰다.자연사 박물관에는 공룡화석류 바다조개류 산호초류 육지동물류 등이 잘 진열되어 있다.바로 옆에 있는 문예역사관에는 유명한 남농화백의 작품과 오 00 화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이런 작품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고흥군 관광- 소록도)
10.28일 10시30분경에는 목포시 친구 아파트를 출발해서 고흥군 관광에 나섰다.차량 네비에는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를 입력시켰다.목포ic-죽림분기점(jc)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벌교ic에서 고흥군쪽으로 향했다.고흥군 녹동항에서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 한센병 박물관에 도착하니 월요일이라서 휴관이었다.하는 수 없이 생활자료관1, 생활자료관2,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등이 있는 소록도 중앙공원을 둘러봤다.
생활자료관1,2에서 알게된 내용들은 대충 아래와 같았다.
(1)한센병이란 한센균에 의해서 발병되는 질환이며 호흡기로 전염되지만 한센균에 대한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서만 발병하는 질환이다.따라서 일반인은 한센병 환자와의 접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한센병은 약물로 치료되는 병이며 약을 복용하면 타인에게 전염되지 않는다.5년이상 치료하면 완전히 낫는다.
(3)한센병은 한센병 자체 치료와 한센병 후유증 치료로 나눈다.소록도 입원환자는 대부분이 한센병 후유증의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4)모집이란 1930년대 전국적인 한센병 환자의 강제수용을 의미한다.
(5)무독지대와 유독지대란 무독지대는 직원거주지, 직원지대, 1번지,라고 하는 직원들의 체류장소이고 유독지대는 원생거주지역, 환자지대, 2번지,라고 부르는 한센병 환자들의 체류지이다.
(6)문씨,한씨란 문씨는 문둥이병 환자를 의미하고,한씨는 한센병환자를 일컫는 말이다.결국 같은 말이다.
(7)미감아는 한센병에 전염되지 않은 아이들이다.(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들을 의미함)
(8)정착촌은 한센병이 치유된 음성환자들이 자립해 사는 마을이며 전국에 80곳이 있다.
(9)dds형제는 소록도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원생들끼리의 결의형제를 의미한다.
(10)영선은 사회에서 소록도 선착장까지 와서 솔가지를 태워 연기로 신호를 보내면 소록도에서 배가 나와서 그 신호를 보낸 사람을 소록도로 태워오는 연락선을 의미한다.(슬픈연락선이라함)
(11)본병,객병이란 한센병은 본병이고 객병은 한센병 이외의 병을 의미한다.
(12)가입원이란 일반사회에서 소록도로 들어오면 입원이고 소록도 마을에서 통원치료를 받다가 상태가 악화되어 치료본관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가입원이라고 한다.
(13)호사란 소록도내의 7개 마을에 흩어져 사는 원생들의 집번지를 일컫는 말이다.10번호사.11번호사라고 부른다.
(14)가정사와 독신사는 원생들 중에서 부부의 연을 맺어 사는 사람은 가정사이고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들이 몇 명씩 모여사는 집은 독신사라고 한다.
(소록도 중앙공원내에 있는 자료전시관 1,2의 모습.)
(소록도 중앙공원내 한하운 시비)
소록도중앙공원에는 한센병 환자인 시인 한하운씨의 시비가 널다란 돌판위에 새겨져 있다.한하운 시인이 자신이 한센병임을 알고 소록도로 들어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일반사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무척 안타갑게 느껴진다.
보리피리(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靑山 어릴 때 그리워
필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人寰=인환=인간의 애환)
필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幾山河=기산하=수천의 산하)
필닐니리.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기록하고 있는 널다란 돌판
모습)
(소록도 중앙공원내 개원40주년 기념비)
소록도 병원에서는 4대 원장이 일본인이었는데 이 원장의 이름은 스오 원장이었다.이 스오 원장은 병원 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노역과 금품 탈취 등을 일삼았다.또 스오 원장은 공원내에 자신의 동상을 건립하고 이 동상앞에서 매월 참배를 강요했다.이에 분노한 한센병 환자 이춘상은 스오 원장을 강제참배일에 살해하였다.그후 스오 원장 동상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은 소록도 병원 개원 4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4대 일본인 원장의 동상을 세우고 강제로 월1회씩 참배
를 원생들에게 강요했다가 살해되고 동상은 철거된 자리
에 개원40주년 기념비 모습)
(4대원장 일본인 스오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이춘상씨의 의거
내용 요약 게시문 )
(소록도 중앙공원내 월례정기 면회사진)
1950-60년대 소록도에서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누고 2km정도의 철조망을 쳐 이를 경계선이라 불렀다.
병사지대의 원생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한센병 전염을 우려해 자녀를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시켰다.그리고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이 경계선 도로 양편에 서서 한 달에 한 번만 면회를 허용했다.이때 미감아 아동과 부모는 도로 양편으로 갈라 서서 직원들 통제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나야 했다.서로를 만지거나 안아 볼 수가 없었다.이런 슬픈 삶의 역사가 이곳 소록도에 있었다.물론 지금은 아니다.
(이 사진의 왼쪽은 한센병환자들이 낳은 자녀들.오른쪽은
한센병 환자로서 아이를 낳은 부모들 모습.월1회 정기 면
회하는 모습.낳은 아이는 미감아이기에 감염을 막기위해
낳자마자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로 강제 격리하
고 월1회씩 면회시켰다고함)
(소록도내 있는 국립소록도 병원 모습)
(소록도내에 있는 입원환자들의 주거지 모습)
(고흥군 녹동항에서 소록도로 연결된 소록대교 모습)
(외나로도 우주센터)
이렇게 소록도 관광을 마친 우리는 녹동항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외나로도 우주센터로 향했다.차량 네비에는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480(지번주소)”을 입력시켰다. 외나라도 1교와 2교를 건너서 우주센터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쩐지 너무 조용했다.알고 보니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정기 휴관일이라 했다.우주센터에서 외형 사진 한 장만 찍고 떠나야했다.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센터 모습)
(보성군 관광-용추계곡)
10.29일 10시30분경에는 목포시 친구 아파트를 출발해서 보성군 관광에 나섰다.먼저 보성군 용추폭포 계곡을 찾았다.차량 네비는 용추계곡 주소인 “보성군 웅치면 용추덕림길 89-84”를 입력시켰다.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주차장은 텅텅 비었고 조용했다.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용추계곡은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계곡 같았다.물길 좌우로는 평면의 바위돌이 넓게 깔렸다.보성 주민들이 여름철에 돗자리 깔고 피서하기에는 아주 좋은 계곡 같았다.
(보성군 웅치면 소재 용추계곡 모습.서쪽으로 미림산이
위치해 등산객이 많이 찾는 곳임.)
이곳 용추계곡 서쪽에는 해발 667,5미터의 일림산이 있는데 등산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평일인데도 등산객이 보이고 먼지털이 장비도 설치되어 있다.등산로 안내판도 잘 비치되어 있다.
(보성군 관광-한국 차 문화 공원)
이렇게 용추계곡을 둘러본 우리는 “한국 차 문화 공원”으로 향했다.차량 네비는 “보성군 보성읍 녹차로 775”를 입력했다.이곳에 도착하니 우선 한국 차 박물관 건물이 화려했다.1층은 차 문화실,2층은 차 역사실,3층은 차 생활실,5층은 전망대였다.차에 대한 문화,역사,생활이 정말 상세하고 세밀하게 진열된 박물관이었다.차에 대한 깊은 식견이 없는 나에게는 먼나라 얘기처럼 보였다.
(보성군 보성읍내 위치한 한국 차 박물관 모습)
5층 전망대에 서서 보니 동남쪽 언덕에 붉은색 양옥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저기에 무슨 화려한 양옥집들이 있는 것인가 하고 가서 살펴 봤더니 고급 리조트였다.아마도 예약하고 이곳에 와서 1박 내지 2박씩 숙박을 하면서 휴양하는 곳 같았다.
(보성군 보성읍 차 박물관 옆에 위치한 보성 리조트 모습)
(보성군 벌교읍 홍교)
다음에는 보성군 벌교 홍교를 찾아나섰다.차량 네비는 벌교 홍교 주소지“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154-1”을 입력했다.출발 전에는 보성군 관광 명소 리스트에 올라 있는 벌교 홍교라는 곳이 과연 무엇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벌교읍은 순천만 연안에 있는 보성군내의 한 개의 읍이다.벌교라는 말의 어원은 뗏목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인 이곳에 원래 뗏목다리가 있었다.이 뗏목다리를 한자로 바꿔쓴 것이 벌교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뗏목다리는 보통명사인데 이렇게 보통명사가 벌교라는 지명의 고유명사가 된 예는 벌교가 최초라고 한다.
또 이 뗏목다리 즉 벌교를 석교인 虹橋로 (돌다리로) 대신 건립한 사람이 순천 선암사 승려인 초안과 습성이라는 사람이었다.이 홍교의 건립년도 조선 영조 5년 1729년이라고 했다.
또 특이한 점은 이 다리는 큰물이 나면 즉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끊어져 통행이 불가했다.그래서 끊어질 때마다 이 다리 즉 虹橋를 중수 내지 보수하고 그 사실을 석비에 기록해 강뚝에 세웠다는 점이다.지금도 중수내용을 기록한 비석 5개가 강뚝에 세워져 있다.그러나 내용판독은 일부만 가능하다고 했다.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홍교 모습.지금 보수중임.홍교는
돌다리라는 뜻이며 옛날에는 이 자리에 뗏목다리가 있
었으며 벌교라는 지명은 이 뗏목다리에서 유래함.)
(벌교 홍교는 큰비가 오면 자주 끊어졌고 그때마다 보수를
했으며 보수한 세부내용은 반드시 비석을 세워 기록했고
홍교 보수 기록 비석들이 지금도 5개가 강뚝에 서있는 모
습.)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 문학공원)
벌교읍 북쪽 산비탈 도로변에는 또 태백산맥 문학공원이 있었다.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소설 배경이 이곳 벌교읍이라고 한다.이 문학공원에는 주차장이 있고 옆에는 조정래 작가의 문학경력과 태백산맥의 요약서 1부,2부,3부,4부가 석판 5개에 기록되어 비석처럼 세워졌다.이 비석 같은 5개의 석판을 읽어보면 누구나 쉽게 조정래 작가의 문학정신과 태백산맥 소설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보성 군민들이 조정래 작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가를 알 수 있다.
(조정래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표지판)
(조정래작가의 대표작 태백산맥1,2,3,4부의 요약서를 기
록한 석판 모습)
(조정래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조정래 작가는 1943년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나 광주서중.서울보성고.동국대국문학과를 졸업했다.1970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대하소설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이 대표 장편이며 이외에도 중편 단편 등의 소설도 다수다.최근에는 중국을 소재로한 “정글만리”라는 장편소설도 썼다.이밖에도 산문집 다수와 이순신 등의 위인전도 많이 쓴 작가라고 했다.
(재시도한 목포해상케이블 카 관광)
일요일인 10.27일자 1차 시도했던 목포해상케이블카 관광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관광을 포기한 바 있다.그래서 일요일이 아닌 수요일인 10.30일에 다시 목포해상케이블카 관광을 하고자 10시30분경에 목포해상케이블카 주차장(목포시 죽교동 516-101번)에 도착했다.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알아보니 오늘도 1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매표는 성인 1인당 22,000원씩 44,000원인데 노인할인액 2,000원을 공제하고 42,000원을 지불하고 성인 왕복표 2장을 샀다.케이블카를 타고 죽교동 탑승장에서 유달산 정상을 거쳐 바다 건너 고하도까지 갔다가 다시 죽교동 탑승장까지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40분이라고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부근에서 바라보는 목포시는 삼학도와 갓바위까지는 매립되어 시가지로 변모했다.삼학도 남쪽의 영산강 입구는 목포시의 외항으로 변해있다.또 갓바위에서 남악리 전남도청까지도 종전에는 썰물 때 갯벌이고 들물 때 바다였는데 이제는 매립해서 지금은 하당이라는 신도시로 변했다.그리고 하당 신도시 북쪽에서 영암 삼호면쪽으로는 영산강 하구언둑이 영산강물을 막아 하구둑 서쪽은 바닷물이고 하구둑 동쪽은 민물의 영산호수로 변해 있다.
유달산 정상부근에서 서쪽을 보니 서북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압해대교가 압해도쪽으로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목포북항을 거쳐 고하도쪽으로 목포대교와 연결되었다.고하도는 이제 배를 타고 가는 섬이 아니고 목표대교로 연결된 육지가 되어 있다.
이렇게 목포해상케이블카를 타고 죽교동 탑승장에서 고하도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역으로 죽교동 탑승장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12시12분경이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목포대교-고하도-영암군 삼호면 한라조선소까지 연결된 도로망은 내가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고 싶었다.그래서 우리는 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 관광을 마친뒤 케이블카 주차장을 빠져나와 서해안 고속도로ic로 진입해서 목표대교쪽으로 달렸다.고하도에 도착하니 아직은 개발이 유보된 황량한 항구였다.동서로 연결된 고하도내의 간선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다.
고하도 동서의 직선 간선 도로 남쪽은 목포신항이라는 이름으로 수출용 자동차가 부두에 잔뜩 쌓여 있다.이 자동차 수출항구 바로 옆에는 인양된 세월호가 붉게 녹슨 모습으로 부두에 서 있다.세월호 부두 입구에는 추모객이 붙여놓은 노란색 리본이 1킬로 미터의 도로변 철망에 가득히 붙어서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었다.
고하도의 동서 직선도로를 타고 목포 신항을 지나 다시 다리를 건너니 영암군 삼호면내 한라조선소였다.또 여기서부터의 도로망은 해남 진도쪽으로 연결되었다.해남 진도는 이제 서해안고속도로와 고하도를 경유해서 바로 직진할 수 있는 이웃되어 버린 것 같았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시 전경.오른쪽 작은 산이 삼학
도 모습.그 왼쪽 산이 갓바위공원 뒷산.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물이 영산강 하구둑 서쪽 바다 모습.)
(목포 북항쪽에서 고하도로 연결된 목포대교 모습 )
(목포시 고하도 신항부두에 올라와 있는 세월호 모습 )
(목포신항 세월호 부두로 들어가는 입구에 붙어있는 리본
모습)
(농업기계화로 변한 농촌 모습)
목포해상케이블 관광을 마치고 목포대교와 고하도까지 구경을 마쳤지만 시간이 아직 남았다. 그래서 고향친구가 농장에서 나락을(벼를) 수확한다고 해서 고향친구의 농장으로 찾아갔다.농장에서 친구는 트랙터로 나락을 수확하고 있었다.
트랙터 바퀴는 타이어가 아니고 궤도차량이었다.수직으로 논바닥에서 서있는 나락을(벼를) 트랙터의 칼날이 잘라내서 옆으로 눕힌 뒤 안쪽으로 끌어당겨서 나락 알을(벼 알을) 털어내서 트랙터 내부 저장고로 보내고 볏짚은 트랙터 뒤쪽으로 보내서 논바닥으로 배출시켰다.밖으로 배출된 볏짚은 논바닥에 가지런히 놓였다.
트랙터 내부 저장고에 저장된 나락알갱이는 (벼알들) 나중에 다시 길가 트럭위에 있는 큰 포대속에다 트랙터내의 강풍기가 센 바람으로 쏟어넣었다.그러면 길가의 트럭은 다시 농장 저장고로 나락 알갱이를 싣고 가서 말린뒤 정미소로 보내서 쌀로 정미시킨다고 했다.농업 기계화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목격한 날이다.옛날의 농업방식과는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농촌이었다.
(논바닥에 있는 트랙터에서 나락알갱이들을 길가에 트럭
위에 있는 큰 포대 속에 강풍으로 불어넣는 모습)
(논바닥에서 트랙터가 나락을(벼를) 잘라서 안으로 끌어
들여 나락알개이들을 털어내어 내부 저장고에 저상시키
고 볏집은 트랙터 뒷쪽으로 배출시키는 모습)
이렇게 목포시 고흥군 보성군 관광을 잘 마친뒤 10.31일 서울로 귀경하니 15시30분경이었다.
(1)5일간 주행거리는 1512km.
(2)평균연비는 23.9km/리터.
(3)휘발유값 1512km/23.9km*1495원=95천원
(4)고속도로 통행료는 하이패스 후불(미정)
(5)기타 점심값.주차비.매표비등 108천원
(6)계 95천원+108천원+고속도통행료(후불).끝.
첫댓글 ㅎㅎ 존 구경 마니하셨네요 늘 가보고 싶은 목포지라ㅎㅎ 글을 읽고 나니 나도 그곳에 다녀온듯한 느낌이드네요 천사대교도 생겼는디 신안에도 좀 다녀오시지 그랬어요~~늘 건강하셔서 좋은 곳 많이 다니세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