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 어떻게 해야 하나?
‘참선(參禪)’을 선(禪), 선정(禪定), 지관(止觀)이라고도 한다.
선(禪, 禪定)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의 속어 형 jhāna가
서북 인도에서 jhān이라고 발음이 된 것을 중국에서 한자로 선나(禪那)라 번역한
그것을 줄여 선(禪)이라 하게 됐다.
또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해서 정(定),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 정사유(正思惟)라 하기도 한다.
참선(參禪)이란 말은 선을 참구(參究)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본성(本性) 자리를 밝히는 데에 있다.
참선의 목적도 견성(見性)이요, 방법도 견성이며, 결과도 견성에 있다.
나아가서 명심견성(明心見性),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 보기 위한 수행,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간파하기 위해 ‘깊이 생각한다’
‘고요히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관찰해 체득하는 것이
선의 일차적 의미이다. 이에 따라 무아적정(無我寂靜)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삼매(三昧)는 선정(禪定)과 거의 같은 뜻이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생명 진여불성(眞如佛性)과
하나 되는 것이, 이른바 참선의 목적이다.
삼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쉬어서 하나로 통일해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해 본 사람들은 짐작하겠지만,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나. 별별 생각이 다 나오지 않는가.
그 생각을 하나로 모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나.
그렇게 어려우니까 화두(話頭)란 법도 나왔다.
타고난 사람이거나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은, ―
마조(馬祖), 임제(臨濟), 백장(百丈) 선사와 같은 분들은 그냥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 가능했다.
그냥 바로 내가 부처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범상한 사람들은, 잡다한 정보과다시대여서
좀처럼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기가 어렵다. 이른바 삼매 참선에 들기가 어렵다.
참선은 보통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아서 하는 좌선이 일반적이고,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들어감을 중시한다.
바로 삼매에 들어감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의 경우는 화두나 공안을 활용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는 좌선(坐禪)을 통해 본래의 불성을 스스로 깨닫는 수행법이다.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하면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간(看)하는 공부 방법이다.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간화선이라 한다.
즉, 간화선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불교적으로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간화에서 ‘간(看)’은 주시하다, 참구(탐구)하다는 뜻이다. 간(看)이란 대상을
그냥 스치듯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 그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깨칠 수 있어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할 때, 성품을 보는 견(見)의 구조 역시 확실하고 정확하게 본질, ―
핵심을 꿰뚫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저것 주변 상황에 한눈팔지 않고, ―
딴 생각하지 말고, 목표한 것에 정신을 집중해서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은
논리를 초월하는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의 참선법이다.
그리하여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인데,
이와 같이 화두 의정(話頭疑情)에 몰입하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고, 자세와 호흡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점에서 건강 위주의 호흡수련, 요가수련과 구별된다.
예로부터 참선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①신심(信心) ― 부처님도 깨달았듯이 나도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②의심(疑心) ― 화두는 의심이 생명이다.
의심은 지속적인 지구력을 도와주고 답을 찾게 되는 원동력이다. 의심이 없으면 답도 없다.
③용맹심(勇猛心) ― 백수의 왕인 사자와 같은 돌진력과 지구력을 말한다.
공부는 이런 용맹 정진심이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다.
그리고 불교에서 자기를 상실한 인간에게 참된 자기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참선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이 한국 불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간화선이란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화두(話頭)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수행해 나가는 참선법을 말한다.
“화두를 잡고 있으면 처음에는 사나운 소나 말처럼 마음대로 달아나고
망상 잡념이 생기고 또 해태심까지 생긴다.
그러나 퇴전하지 말고 계속하고 또 계속해 용맹정진을 다하면
반드시 화두라는 의심뭉치가 가슴에 꽉 차게 된다.
즉, 늙은 쥐가 쌀 창고를 파고 또 파면 반드시 그것을 뚫고 쌀을 먹게 되는 것과 같이
참선법도 역시 이와 같다. 결심을 하고 또 계속하면
번뇌 망상의 물결 파도가 아무리 세지만 화두를 찾는 힘에는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대중들은 해태심을 내지 말고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으로 화두만 잡고 매(昧)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언하대오(言下大悟)하리라.”
― 전강(田岡, 1898~1974) 스님
선불교에서의 ‘화두(話頭)’는
진리를 깨우친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기도 하다.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선 공부의 문제지라고도 할 수 있다.
참선하는 이가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화두에는 1,700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무자(無字)’ 화두다.
중국 당나라시대 한 학승이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께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에 대해 조주 선사 내린 답이, “무(無)”였다.
그런데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조주 선사가 왜 "무"라고 대답한 것일까?
바로 여기서 조주 선사가 무엇 때문에 무(無)라고 말한 것인지?
그 ‘무(無)’를 화두로 해서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이 의심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밖에 못 깨닫는다. 육신이 거짓 ‘나’라면, ‘참나’는 누구인가?
분명히 말하고, 듣고, 슬프고, 괴로운 줄 아는 이것은 거짓 ‘나’인가? ‘참나’인가?
육신의 송장을 끌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나’는 무엇인가?
이런 의심이 들어야 화두(話頭)가 들린다.
의심이 든다고 해서 알음알이로 풀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선어록(禪語錄) 좀 봤다 해서 아는 체 하면 큰일 난다.
화두 깨치기는커녕 자신의 마음 자락 한 조각도 잡을 수 없다.
알음알이 잣대를 화두에 대는 순간, 착각에 빠지고 만다.
착각에 빠진 도인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참선 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야 한다.
언제 깨달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도 수행인에게는 큰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여러 공안(公案)을 천착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이 뭐꼬”, 내일은 “판치생모(板齒生毛)”, 모레는 “무(無)자” 화두를 들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나의 화두에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화두를 들어보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법향(法香)을 맡을 것이다.
그 법향은 교리(敎理)를 통해 느껴본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선(禪)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하듯
정진해 보면 부처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불자라면 자비를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것도 용해시킬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비심은 깊어진다.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이 천지를 움직일 것이다.” ― 정여 스님
“마음은 어린애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낼 줄 아는 마음자리는 백 년 전 이 세상에 태어나던 첫날이나
백 년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 날까지 늘고 주는 일 없이 항상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마음자리는 아득한 옛날 그 어느 시간에 비로소 생겨나온 것도 아니고,
자동차나 기계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낡아서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찾는 공부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 공부다.” ― 청담 스님
그런데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과 대승불교의 참선(參禪) 사이에는 다소 괴리가 있다.
불교에서 수행은 “명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참선을 한다고 해서 사유와 숙고를 빼버렸다.
동작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골고루 이야기하셨다.
걸어 다니고, 서 있고, 앉아 있고, 누워 있고, 부처님이 특정한 자세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참선한다. 자세도 한 가지를 오래 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다.
행주좌와 어떤 자세든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 ― 전재성
참선 공부는 무엇보다 자기가 발심(發心)을 하고, 마음을 내서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가르치신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선을 통해서 역시 동일한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믿음이 있고 직접 그런 공부를 해보고자 한다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발심, 믿음, 선지식의 가르침,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고, 다른 건 필요 없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판단에 의지해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반드시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서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왜냐면 아직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자기 생각에 의지해 자기 판단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바른 길로 갈 수가 없다.
깨달음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다.
그러므로 이미 그 길을 간 분의 지도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 김태완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