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라고 할 때 마음을 돌이킨다...
또는 죄에서 돌이킨다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성령께서 친히 중생과 회심을 주관하실까?....... 조심스럽지만..
<죄를 청산한다> <마음의 변화> 를 일으키게 하심 보다는
<믿음과 회개의 대상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 으로 해석 해 보면 어떨까요?
중생과 회심 전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는 막연한 하나님,
또는 <성경의 지식을 스스로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거를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은 웨스트 민스터 대 요리문답 4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스스로 믿지 않고 / 하나님을 믿고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님>께서 <성경 속 하나님>을 증거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회심을 주관하시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성경과 더불어 증거 하시기 위함이라고 볼 때
회심의 참된 의미는 믿음의 대상 / 회개의 대상이
진실로 성경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시고 증거 하시기 위함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누구나 다 당연하게 알고 믿는 성경 속 하나님을 굳이 성령님께서
확인 시켜 주실 이유가 있나? 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 너무나 당연하고 / 큰 가치가 없는 것 같아도
항상 모든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해져야 회개와 기도의 대상도 분명 해집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말미암고
이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첫번째 신비이자 확신을 주는 체험입니다.
.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굳이 성령님의 역사가 없어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율법을 통해서도 믿음과 회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에 있어 그 대상이 명확해야 함은
그 무엇보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성도의 믿음은 그냥 스스로 믿음이 아닌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은혜의 믿음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도 아니거니와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누구나 얼마든지 성령님의 인치심 없이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속의 하나님을 스스로 믿으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알미니안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믿음이 얼마나 신비한 은혜인지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값싼 구원이 아닌 값싼 믿음 > 같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배우고 읽고 연구하고 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믿는 것은
택자가 아닌 그 누구도 가능한 자기 신념의 믿음이라고 생각 합니다.
스스로는 그 깨달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깨달음이라고 주장 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하며
성경을 통해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교회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믿음으로 중생과 회심을 체험 한다면 과연 그 믿음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중생과 회심을 통한 믿음과 동일 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알미니안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경 속의 하나님을 스스로 믿다가
성령의 역사로 중생과 회심을 한다면 개혁주의의 것과 같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같다면... 그들의 주장도 이단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간증들도 하나님을 믿다가 성령님의 역사로 회개하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진실로 놀라운 변화가 맞지만 /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로 중생 하며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간증들은 매우 찾아 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간증들로 본다면 / 구원론은 스스로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성령님의 역사인
중생과 회개가 일어난다고 바뀌어야 정상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증들은 분명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먼저 믿고 / 배우고 읽을 때에
회개와 거듭남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혹은 성경을 읽고 배울 때에 믿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생과 회심이 없다면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회개가 일어남은 신비한 성령님의 역사를 의식하나 /
믿음도 신비한 성령님의 역사로 얻었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대부분의 체험들이 이렇다면 성령님의 역사인 < 믿음>은 어떻게 얻나?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실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중생과 회심을 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들이지요....
수 많은 신자들의 공통된 경험이 이 같다면 구원론과 교리는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믿음./ 중생 / 회개 의 순서로 말 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생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미니안의 신인 협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천주교의 자유 의지론과도 차이가 없습니다.
한번 교회의 모든 간증들을 보십시요
믿다가 중생 / 믿다가 회개 후 중생 / 믿다가 회심 등입니다.
웨민, 신조도 유효한 부르심 즉 소명과 중생이 없는 믿음과 회개는 없다라고 증언 합니다.
종교 개혁 때 외침 <거듭나지 않고는 믿음도 회개도 소망도 사랑도 없다> 입니다.
그럼에도 믿다가 중생을 얻고..?? / 하나님을 믿지만 중생 아직 못하고 등등..의문이 듭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 믿음을 얻은 자들은 아주 분명하고 간단하게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의심이 생기고 믿음이 흔들릴 때 항상 붙들어 주는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지고 이 세상이 가루처럼 부숴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을 믿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님 되심>이라는 첫번째 얻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동앗줄로 묶으시는 관계의 믿음이라고 생각 합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맨 처음 마음 속 각인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중생과 회심때 얻게 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아닌지요?
이 믿음은 죄를 청산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는 회개만큼 평생 또렷한 기억이 됩니다.
이 믿음의 대상에게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해야 회개의 대상과 방향도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믿음이 회개 보다 단 1초라도 앞설 수 밖에 없다고 생각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약해지고 희미해져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의 믿음과 회개는
점점 도리어 또렷해지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바로 이 믿음은 모든 믿음의 뿌리가 되어주고 근간이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다른 것은 다 잊혀질지라도 회심만은 잊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구원의 관계는 <수표와 현금>의 관계로 비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내 놓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스스로 만든 자의적 믿음을 내 놓을 때 하나님의 방법은 ?
수표도 < 믿음도> 하나님께서 발행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선물로 받은 / 구원을 얻는 믿음 > 아닌가요?
이들의 글과 대화를 보면 무엇인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믿음의 출처>는 성경과 교리에 있고 / 애매 모호 합니다.
바람과 같은 성령님의 구체적 역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회개> 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회개란 막연한 하나님 , 스스로 믿는 하나님이 아닌/
분명한 믿음의 대상에게 돌이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믿는 것은 택한 자 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욥, 이사야 등등에게 나타나실 때
가장 먼저 하신일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믿게 하셨습니다.
성도로 택하여 부르신 자들에게도 가장 먼저 하실 일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쳐 주시는 일이 가장 먼저 성령님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 아닐까요?
엄마가 아기를 낳았을 때 가장 먼저 가르치고 싶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내가 바로 네 엄마고 너는 내 아들이란다>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이 엄마는 무슨 일을 하고 / 어떤 사람이고/ 등등 입니다.
중생과 칭의와 양자는 이 원리와 유사하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먼저 가르치시고 /. 성도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칭의와 양자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100%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랄 때 까지 엄마 처럼 가르치시고 보호 하십니다.
믿음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이후 어느정도 장성하면 어린 아이의 것을 버립니다.
예를 들어 믿음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입니다.
때로는 이를 위해 성령님은 회초리를 드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박 영선 목사님도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를 <하나님을 아는 것> 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아는 것은 성경과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성경과 성령님은 계약서의 원본과 사본처럼 짝을 이룹니다
둘 중에 하나만 있다면 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진실로 그렇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성경과 성령님이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상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이 인쳐 주시는 것입니다.
<네 믿음은 내가 주었다>는 것처럼... 이것이 선물로 받는 믿음 아닐까요?
바로 이 짝을 이루는 시작이 중생과 회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성도는 점점 더 많이 알아 가며 믿음의 분량이 자라 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죄인이었기에 의인을 삼으시고 성도가 아니었기에 백성 삼으시고
아들이 아니었기에 아들 삼으시며 구원이 없었기에 구원을 시작 하십니다.
전부 성경속 내용만이 아닌 /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의 시작인 회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중생과 회심이라는 성령님의 역사로 믿음을 주십니다만
스스로 믿는 믿음과 은혜로 얻는 믿음의 의미가 별 구분없이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중생과 회심이 성령님의 역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할 때 / 믿음이 없었을 때....
이때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왜 중생과 회심을 성령님께서 직접 역사 하셔야 하나? 라는
의문을 가져 본다면 이러한 대답도 가능 할 것 같아 써 보았습니다만.....
매우 조심스럽게 여러분들의 견해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예수님께서는 비사로 말씀 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만은 그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전도를 보내실 때에도 무엇을 말할 지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각각의 수준과 처한 상황이 다 다르기에 각자에게 역사 하시도록 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는 이유는 진리를 알게 하심입니다.
진리를 담아 놓은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읽는다고 진리를 발견하는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사를 별도로 가르쳐 주듯이 성령님의 역활이 바로 이것 아닐까요....
성령님의 조명하에 성경의 진리를 깨달음
이것은 이상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이 책을 읽다가 깨닫거나 문득 떠 오르는 생각을 통해 깨닫는 것처럼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일상 가운데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고 생각 합니다.
만일 성경과 교리 또는 신학 만으로 지식을 얻고 진리에 대한 논쟁을 한다면
정작 중요한 성령님의 역활을 간과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이는 교조주의나 성경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성령님의 짝이 한쌍을 이루는 깨달음이 있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신비도 함께 인정해야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제 견해를 내 밀어 봅니다.
신비주의라는 단어가 준 폐단도 많지만 이는 다시 성경과 공동체의 교리로 검증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과 성령님은 항상 짝을 이루십니다.이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비입니다.
저는 신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를 함께 즁요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영지주의와 신비주의 등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역사는 성경에 비해 많이 축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특별한 성도에게만 성령님의 가르침이나 은사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는 균형을 이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웨스트 민스터 요리 문답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는다고 할 때
성령님의 사역과 복음은 함께 역사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참되신 진리를 깨달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역사는 각 성도에게 내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곧 <내주 성령님> 이십니다.
회개는 말그대로 방향을 돌리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바로 그리스도께 입니다.
이것이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 없이는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확신이나 확률이 아닙니다.
곧 믿음의 대상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연합과 인격의 차원에서 제 3위격인 성령님의 사역이 귀합니다.
네. 그리스도께 라는 대상이 명확해지고 / 믿음이라는 대상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는 싯점이 회심이고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으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님의 귀한 사역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믿음이란
이때부터 분명하고 올바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제가 옳게 해석한 것인지요?
이것이 자칫 의도되지 않은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구속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믿음이 확신이나 확률이 아니라는 뜻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믿음을 왜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주시겠습니까? 의심없이 믿으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부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이유도 분명히 알고 믿으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은 전적 성도의 책임이 되는 것이지요.
중생과 회심을 통해 얻은 믿음, 구원 얻는 믿음, 은혜로 얻는 믿음 , 이를 얻은 자들에게는
아주 긴딘하고쉬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평생 잊을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마음에 각인된 것입니다.
진실로 어떤 상황에서도 잊을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은 결코 불에 타도 없어질 수 없는 가장 큰 신비일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간증은 참 많아도 이 첫번째 믿음을 얻은 것에 대한 간증은 드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가? 구원 하셨기 때문에?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아니지요.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고 믿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 이 믿음 때문 아닌지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각인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