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모님
낯선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던 갓 시집온 신부
세 살 아기는 스무 살 새댁 숙모님을 할아버지 등에서 처음 만났지요.
울긋불긋한 신부 옷차림이 왜 그리 무섭던지
할아버지는 속도 모르시고 숙모 곁에 나를 내려놓으려고 하셨어요.
어머니 따라 삐이익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적 소리 나는 기차를 처음 타고
인천에 사시는 숙부와 숙모를 찾아가며 다섯 살에 세상 구경 처음 했어요.
처음 보는 라디오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와서 놀라자 어른들은 배꼽을 움켜잡았고
저부싱이빵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바닷가에 나가 배 구경도 처음 했어요.
일곱 살에 6·25 전쟁이 터지자 큰 사촌 데리고 낙향한 숙부와 숙모
잠시 농사일 거들다 청주 시내에서 쌀장사하셨지요.
여러 가구가 옹기종기 살던 셋집 구석방에서 고생하시던 숙모 모습과
방학 때 어린 사촌들 업어주던 생각이 나네요
휴전협정 후 다시 인천에서 철물상을 경영하며 허름한 창고집 살림을 하고도
할아버님께 효도하며 형제 우애는 끝내주시던 두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숙모께서는 새로 나온 인조 양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으시고 오셨습니다.
색깔만 다른 똑같은 무늬의 어머니 한복을 내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본견 양단 한 벌 값으로 두 벌을 장만하셨다는 그 거룩한 뜻 어디에 비견될까요?
숙부와 숙모가 고생한 보람으로 전답도 늘리고 가세가 좀 펴지려 할 때
농사일하시던 서른아홉 아버지가 위장병으로 일찍 세상 하직하셨지요.
서른다섯 어머니와 우리 어린 오 남매에게 하늘이 무너진 일이었습니다.
노환으로 늘 몸 불편하시던 할아버지는 장남을 잃은 충격으로 급기야는
치매 현상이었는지 젊은 며느리가 걱정되셨던지 억지소리까지 하셨어요
아버지 떠나신 슬픔도 가시기 전에 여덟 살 여동생과 일곱 살 사촌이
일본 모기 뇌염에 걸려 세상 떠나니 불행이 겹쳐왔던 거지요.
숙모가 두 살 터울이던 사촌들 여러 형제 기르기도 벅찬데 아이들 떼어놓고
숙부를 도우며 가게 일을 보시는 중에도 그저 눈물로만 세월을 보내며
농사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께 위로의 마음을 전하면서
극진하게 보살펴주셨던 마음 늘 가슴에 간직했어요
설 추석 명절과 제삿날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던 숙부님
제수물과 할아버지 잡수실 고기와 카스텔라 우리들의 양말 선물 잊지 않으시고
초가집이던 안채를 헐고 기와지붕으로 재건축해주시며 자주 오르내려 주셔서
어머니와 우리 형제가 기죽지 않고 잘 살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1965년에 8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던 숙부와 숙모와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어른들 모습을 보고 저희는 자랐습니다.
제가 결혼 전에 이미 인천에서 제일 큰 철물도매점을 경영, 부를 축적하셔서
학익동 건물과 송림동에 큰 빌딩을 지으시고 도화동의 큰 주물공장도 운영하셨습니다.
가난한 일가친척도 구석구석을 살피시며 사회적으로도 한창 존경받으시던 시절,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코티나>, 우리 집안 최초의 자동차를 사들여 놓고도 고생하신 보람도 없이
어이없게 오십오 세를 일기로 숙부께서 1977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으니
숙모는 물론 모두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저는 늘 우리는 십 남매라고 생각할 정도로 구분 없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희 학업과 결혼문제까지 이모저모 도와주시고
제 아이들 출생 때에 돌보아 주시던 일 늘 잊지 않아요.
이리저리 마음 써 주신 은혜 어찌 숙부와 숙모 은혜를 잊겠습니까?
그간 어려웠던 세월 사십 성상, 어렸던 사촌들도 이제 다 장년을 넘어섰습니다.
자랑스러운 숙모님의 자손들 헌헌장부로 큰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어려서 함께 자라던 방식동생은 미국까지 이름난 양계왕 된다더니 그 못지않게
큰 사료회사에서 출세하니 언제나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증조모께 더할 나위 없는 효자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도 더할 나위 없이 효도를 받으시는 걸 우리는 보고 자랐어요.
우리 십 남매도 부모님들처럼 남부끄럽지 않은 자식들이라 생각합니다.
손자들도 장성하고 백수를 바라보시며 구순 생신을 맞이하신 숙모님
늘 마음으로 존경하며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생도 웃어른들처럼 효도 받으시며 더욱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2017년 1월 7일 조카 문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