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 본절에서처럼 '믿음으로'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음'(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수주의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덴테스'는 동사 '디카이오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본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당시 본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성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롬 5: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롬 5: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
[롬 5: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는 연단을 - '연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