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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숫자
1. 三 은 인간의 결과 수.
2. 四 는 희망의 수.
3. 六 은 인간 기쁨의 수
4. 七 은 하나님의 결과 수.
인간은 지능을 사용하는 생물 중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최대한으로 두뇌를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두뇌는 점점 더 발달하여 하나님을 닮은 모양의 흉내를 기막히게 내어 무(無)에서 유(有)같은 것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온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숫자다.
1 에서 10까지의 숫자를 만들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 끝을 셀 수 없는 수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아주 귀하게 쓰고 있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수많은 것을 창조하시는데 숫자를 사용하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그 숫자를 찾아내어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숫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찾아내어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우주천지 만물 중에 인간의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간편한 숫자로 인간을 다스리는데 인간은 엄청난 숫자를 써서 인생을 살아간다. 하나님은 많은 숫자 중에 인간에게는 3, 4, 6, 7 이라는 숫자를 즐겨 사용하시며 다스리신다. 앞으로 4번에 걸쳐 글을 기고하고자 한다.
1. 三 은 인간의 결과 수.
三 이라는 수는 인간의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로서 육체를 가진 전 세계 모든 인간은‘三’이라는 숫자를 써서 결과를 얻는다.
예를 들어 어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옮겨 놓으려고 할 때 하나, 둘, 셋을 한 다음 행동을 취하거나 어떤 일을 여럿이 맞춰할 때 하나, 둘, 셋을 세는데 이때 3은 물건이 옮겨지는 결과를 얻게 되고 도한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결과를 만들어 내게 하는 수다 그래서 동서국가(東西國家)들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이 숫자가 인간이 쓰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속담의 말에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뒤집어졌다 바로 섰다 모로 섰다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세분이 모이면 우주천지 만물에 평화가 온다.
제비가 집을 짓고 동물들이 보금자리 만드는 것을 보라. 이들에게 누가 가르치지도 않고 이들이 배우는 학교도 없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새끼들을 키우고 잠을 자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만들고 암수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사랑할 줄 알아 교미를 하고 알을 낳고 부화시켜 먹여 키운다. 이것이 이들에게 준 본능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三이라는 숫자를 이용하는 방법도 사람에게 입력시켜 놓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이 방법이 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신 방법이 아니면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3이라는 숫자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세 번의 절기를 지키고 매년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였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출23:14)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출23:17)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다윗도 사단의 그럴듯한 말에 미혹되어 이스라엘 국민들을 계수하여 전쟁을 할 만한 사람들을 계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시키지 않는 짓을 했고 그 이유로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여 벌을 받으라 하셨다.(대상21:1-2)
하나님과 합한 자도 틈만 보이면 사단은 비집고 들어와 넘어뜨리려고 한다. 사단은 인간의 약한 틈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엡4:27)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되는데 하나님을 제쳐놓고 인간의 힘으로 승리를 해야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사단의 부추김에 다윗은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해이해졌다는 것이고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을 하나님은 괘씸하게 여기셨다.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대상21:7)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던 이스라엘 왕이었다. 그러나 잠간 마음을 방심하다보니 교만이 들어왔다. 호시탐탐 노리던 사단이 이것을 놓칠리 없다. 그 교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다윗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다윗이 사단에게 미혹당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다윗 왕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는 잘못을 징계하신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잠23:13-14, 삼하7:14) 하나님과 합한 자라는 다윗도 사단에게 붙들려 이용되었을 때 하나님은‘三’이라는 숫자를 제시하셨다. 그리고 선택하게 하였고 다윗이 저지른 벌에 대하여 결과를 만드셨다.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대상21:12)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삼하24:13)
대상에는 삼년 기근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하에는 칠년 기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문맥으로 보아 삼하에 기록된 것이 필경사가 잘못 기록한 것 같다. 그래서 다른 필경사가 기록할 때 바로잡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대적에게 석 달을 쫓기는 것과 삼일의 온역과 칠년의 기근이라고 말했는데 두 가지는 3이고 하나는 7이라는 숫자를 말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상은 세 가지 모두 3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벌을 백성들이 받았다. 벌을 받는 백성들을 보는 다윗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맞보았을 것이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 만이었더라. (대상21:13-14)
7이라는 숫자를 써서 하나님의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
말이 칠 만이지 지금 시대에 군 병력 규모로 보면 4~5개 사단 쯤 될 것이다. 하나님과 합한 자 한 사람을 위하여 백성 칠만을 버리시는 하나님이다. 의로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라. 천하를 버리고 노아의 가족만 구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왜 한 사람을 죽이지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칠만 명의 백성을 죽이냐고 따질 수 있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제대로 된 한 영혼을 위하여 잘못 된 천하의 영혼을 버리시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상을 만들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 한사람으로 시작하고 이스라엘백성 모두 진멸하시려고 한 적도 있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고 해서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고 따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나타나실 때는 그 인도하심 속에서만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사단은 예수가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셨을 때 세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지만 실패했다. 왜냐하면 3이라는 숫자는 사단이 쓸 수 있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4번째 가서야 가룟 유다를 미혹하여 예수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사단이 사용할 수 있는 4라는 숫자에서 얻은 결과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4라는 숫자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능에는 무서운 것이나 어려운 것. 힘든 것 죽는 것 등을 되도록이면 피하도록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에게 누가 집짓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보금자리를 만드는 본능이 있는 것과 같고 동물들이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먹이고 키우며 돌볼 줄 아는 것과 같은 본능의 이치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항상 성령께서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왜 그리하셨냐 하면 이 세상은 예수를 위하여 지음 바 되었기 때문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9-10)
사단은 성령께서 예수를 보호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육신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만만히 보고 덤벼들었다. 육신은 천사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2:7)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잘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세 번이나 죽이려고 공격을 했지만 항상 성령께서 보호하시므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첫 번째는 아기예수였을 때 헤롯을 이용하여 죽이려다 실패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2:16)
사단은 헤롯을 이용하여 아기예수를 죽이려 하였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애급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헤롯 왕이 찾을 수 없었다.
사단은 계속해서 약점을 찾았지만 이렇다할 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드디어 예수의 약점을 찾았는데 40일 금식하신 다음 굶주려 있을 때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자신이 직접 예수와 부딪쳐 죽이려고 40일 금식 후에 주리고 있는 예수 앞에 나타나 배고픔을 이용해 사단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4:3)
우리가 사단에게 속는 것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주거나 자신이 원하는 환경이 만들어 졌을 때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낚시 바늘에 낀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는 물고기와 다름이 없다. 아무리 급해도 조금만 더 생각하면 똑같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사단이 미끼로 던지는 것에는 어딘가 모르게 틀린 점이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인내하며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쌍둥이의 부모들은 한 눈에 다르다는 것을 알아본다. 이것은 많이 보았고 나름대로 보는 훈련을 쌓았기 때문이다. 다른 가족들도 그들과 함께 하며 자주 보는 훈련을 하였기에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구분해 낸다.
이들도 부모와 함께 구분하는 연단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건을 연습하면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이로 인하여 금생과 내생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경건을 연습하면 평화를 주장하며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는 사단도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3-14)
전 세계적으로 데모하는 자들이나 테러를 감행하는 자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평화를 앞세워 자신들의 시커먼 마음을 포장하는 것이다.
사단은 배고픈 예수를 위하는 척하면서 빵을 만들어 먹으라 했다. 만약에 예수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었다면 예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사단은 예수께서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이용하려 했다. 이 능력은 예수 공생에 기간 중에 오병이어(五餠二魚) 칠병이어(七餠二魚) 를 행하실 때도 잘 나타났다.
순간을 이용하여 돌을 빵으로 만든다고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빵을 만드는 순서는 지켜져야 빵이 된다. 돌로 빵을 만들려면 돌을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돌가루로 만든 빵을 먹게 되면 위속에 들어가 모두 가루로 분해가 된다. 분해 된 돌가루는 위벽에 창자벽에 달라붙어 소화도 되지 않고 씻겨 내려가지도 않는다.
다른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결국은 먹은 것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말라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예수는 사단의 음흉함을 알아차리고 보기 좋게 거절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4:4)
그렇다고 만만히 물러날 사단이 아니다. 세 번째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해가며 높은데서 떨어드려 죽이려고 유혹했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4:6)
이 말씀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시91:12)
아무리 예수라 하더라도 부활전이기 때문에 아직은 육신이 신령한 몸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이다. 때문에 예수도 높은데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럴듯하게 성경말씀을 인용해 가면서 유혹을 하였지만 속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4:7)
사단은 또 지고 말았다. 그래서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로 유혹하려 했지만 그게 될 법이나 한 것인가?
온 우주천지 만물이 예수 것이다. 지구도 세상도 모두 예수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라 하였는데 사단의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이다.
36계에 보면 차시환혼(借屍還魂)이라는 말이 있다.
죽은 영혼이나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한다. 는 것인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용해서 뜻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여겨 버린 것일지라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풀이하자면 남의 잠뱅이 입고 춤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남의 것을 가지고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의 옷을 입고 딩굴고 춤을 춰 바야 자신의 옷은 하나도 구겨지거나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단이 지금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게서 예수를 ddnl하여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이라 우기며 그것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한다. 차가각도 이런 착각이 없고 무경우도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기 때문에 사단을 거짓의 왕, 착각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우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말이 있다. 이 여우같이 어리석은 자가 사단이다. 결국은 예수 호령 한마디에 사단은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0-11)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자살이란 내가 죽을 줄 알면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사단에 의해서 죽음을 가져온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게 보여 졌을 뿐이다.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된다는 말씀을 여러 번에 걸쳐 밝히신바 있다.(마12:40, 마17:22-23, 마20:18-19)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자살은 자살로 대속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고 하셨다.(창2:16-17) 때문에 아담은 이 과일을 먹으면 확실히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일을 먹었다. 따라서 아담은 스스로 자살을 택하여 죽음을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아담이 자살함으로써 원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대속하러 오신 예수도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죄의 모양으로 오신 것과 같은 이유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3)
예수께서 자살로 대속하셨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자살을 하게 되면 예수를 욕보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죄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다. 자살자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임으로 자살자들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직접 죽이려다 실패하자 사단은 수제자로 선택된 베드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베드로를 넘어뜨리므로 인하여 예수의 일을 방해하여 예수 사역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심보다.
성경을 보면 열두제자 가운데 95% 이상을 베드로 혼자 예수와 대화한 것으로 나온다. 이런 베드로가 무너지면 나머지 제자들은 그냥 무너지고 만다.
예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간간이 마음에 틈을 보여 순식간에 사단이 침투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세 번 틈을 보였는데 사단은 세 번 다 침투하여 베드로를 무너뜨림으로 인하여 잠시나마 예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사단이 자신을 침투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사단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끝내는 회개하고 성령을 받음으로 영분별은 물론 앉은뱅이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됐다.
사단이 베드로에게 첫 번째 침투한 것은 변화 산에서 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변화 산에서 변화하시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실 때 예수의 변모하신 모습을 보고 자신이 천국에 와 있는 줄 알고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잊어버리고 예수에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초막 셋을 지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자고 말했다.
제자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의 가르치는 공부도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좋은 대로 편하게 살겠다는 어리석고 우매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마17:1-7)
만약에 거기서 초막 셋을 짓고 살았다고 가정했을 때 예수의 사역은 거기서 끝이다. 이 상황은 베드로의 마음에 사단이 침입하여 베드로를 그곳에 묶어둠으로 인하여 예수 사역을 방해 내지는 발길을 묶어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그 모양인데 다른 제자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항상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가만히 계시겠는가?
하늘로서 천둥이 울이는 듯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17:5)
정신 차리라고 하늘에서 호령을 하신다. 지금 너희에게는 사단이 침투했으니 속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라고 호령하신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서 엎드려 있는 사이에 사단은 36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맛본 베드로는 다시 공부할 수가 있었고 수제자로서 열심을 냈다. 베드로도 이때는 초신자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신자들에게는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베드로도 은혜를 받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이런 모습이 부모가 어린자식을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 새라 하며 키우는 모습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 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2)
초신자를 넘어서면 그때는 스스로 연단을 이겨내야 하고 스스로 사단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이때부터는 어지간해서는 하나님께서 참견하지 않는다.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했다.
분명한 것은 전신갑주는 하나님이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내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거 모르면 감나무 밑에서 자신의 입으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엡6:10-18)
베드로도 지금은 공부하는 중이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지만 예수가 돌아가시고 공부가 끝난 후에는 스스로 사단과 싸워 물리쳐야 했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해 힘이 부족한 베드로는 삼년의 수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은 사단이 바라는 바고 원하는 바였다.
이것은 마치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가 이것저것 챙겨주고 도와주고 보살펴 주어 편하게 살았지만 결혼한 후(초신자를 벗어난 상태)에는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힘든 모습과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과 가정을 지키는 것은 물론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보답할 줄도 알아야 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초신자에서 벗어나 성도(聖徒)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부모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모를 사랑하게 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자식들은 설날 부모에게 세배하고 세배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배 돈을 드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모습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영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예수는 제자들에게 실전을 연습시키기 위하여 각 지방으로 파송을 하였다. 이때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칠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었고 고난을 견딜만한 힘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권세를 넣어 주시고 파송을 하시며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리라고 당부를 하셨다.
이것은 사단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것이며 침투한다 하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주신 것이다.(막6:7-8)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칠 때 사단은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며 기뻐할 때 귀신이 떠난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눅10:20) 기뻐하라 하셨다.
두 번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난후 삼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다. 베드로의 다혈질적인 성급함을 다시 한번 사단이 이용하고 있다. 예수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하는데 이때는 사단이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침투하여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고 베드로의 마음에 속삭인 것이다.
‘야, 베드로야! 너의 스승이 죽는다고 하는데 그냥 보고만 있냐? 말려야 되지 않겠느냐?’ 사단은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죽음은 자신의 일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사단은 십자가 죽음에 앞서 예수를 죽이려고 별수단을 다 부린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베드로는 예수가 죽는다고 하니까 온힘을 다하여 강력하게 말렸다. 얼마나 심하게 말렸으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을 했을까? (마16:21-23)
예수는 모든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네가 짊어지라고 따라오라고 말이죠. 너를 부인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사단이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보고 복음에 비춰봐서 맞으면 진행하고 틀리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생각을 먼저 앞세워 말하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게 되고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네가 갈 길도 바쁜데 남의 일에 참견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하시는 것이다.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수양하는 시간도 부족한데 무엇 때문에 남의 일에 참견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냐고 질책하시는 것이다. 네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하시는 일을 깨달음이 없는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욕이나 먹지 않을 것을 쓸데없이 참견하는 바람에 사단이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우리 속담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쓸데없는 실수들을 많이 함으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생겨 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베드로 속에 사단이 침투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벌써 간파하고 계셨다. 그래서 사단에게 물러가라 하신 것이다. 사단은 이렇게 필요 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게 하여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싸움을 하길래 싸움을 말렸는데 매 맞은 사람이 저 사람도 같이 때렸다고 말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것을 지나가다 개귀를 잡아 당겨 물려 생기는 상처라는 것이다.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잠26:17)
사도바울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에는 간섭하지도 어울리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딤전5:22)
베드로는 필요 없이 예수 일에 간섭하다 혼이 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특히 죄 짓는 일에는 더욱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전4:15)
예수는 네가 먼저 배우고 지식을 쌓아 너 자신의 죄를 다스리고 네가 남을 도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데 나라는 존재를 앞세우는 교만이 있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예수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의 사용법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고 말씀하시며 승천하기 전에 가르침을 졸업한 열두 제자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가르칠 때가 되었다고 말씀 하시면서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지라고 하셨는데 분명한 것은 꼭 성령을 받은 후에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고 전도를 하거나 선교를 허거나 목회를 하게 되면 얼마 못가서 넘어지거나 거짓을 행하거나 세상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을 받은 후에 사역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쳐 변화시켰듯이 너희들도 세상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너희와 같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변화시키라는 것이다.(마28:18-20),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온 힘을 기울여 기도에 임함으로 성령을 받는데 성공하였다.(행1:14-2:6)
사단은 세 번째 틈을 타 베드로에게 침투한다. 예수는 자신이 잡혀가면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1)
그랬더니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망간다 해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도망가는 것은 고사하고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 (마26:35)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이 대답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 교만한 마음이다. 교만한 마음은 사단의 길을 열어준다. 막상 예수가 잡혀가자 제자들은 예수의 예언대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막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에게 말한 것을 지키기나 하려는 듯 예수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제사장의 측근들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저 사람도 한패라고 지적한다.
‘저 사람도 예수와 같이 있었다.’
그런데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를 두 번이나 부인한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제사장의 측근들이 저 사람이 진짜로 맞는다고 확실히 가리키니까 이번에는 저주에 맹세까지 합하여 부인한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14:71)
이것이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본 모습이다.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나 요한처럼 좇아가지도 않았고 예수가 잡혀가실 때 모두 도망 가버리고 말았는데 왜 도망갔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에게 잡히면 죽는 다는 것과 또 하나는 자신들이 꿈꾸고 바라던 벼슬의 희망사항이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예수가 나라를 세우면 한자리 할까 하고 쫓아다녔는데 잡혀가는 바람에 바라던 희망사항이 없어졌다. 감탄고토(甘呑苦吐)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마음으로 백년 천년 예수 쫓아다니고 교회 다니면 무엇 하겠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제자들 마음에 무서움을 주어 뿔뿔이 흩어지게 함으로 사단이 승리했다? 이것이 사단의 착각 중에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에는 사단은 자신의 세상이요 귀신의 세상이 된 것 같이 날뛰며 좋아했다. 대부분의 귀신들이 사람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일 때는 무서움을 유발시켜 공포감속에서 따라오게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겁내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3) (수1:9) (시31:24) (행23:11) (계2:10)
담대하지 못하면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배짱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러 번에 걸쳐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담대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귀신도 약점은 있다. 담대한 자에게는 덤비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담대함을 요구하시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단에게 침투 당할 수 있고 이용당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을 지켜주시고 있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음도 자신도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요20:22), 겉으로는 사단이 승리한 것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허상이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40일 동안 함께 하시며 영안의 눈을 뜰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는 부활하시자마자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왜냐하면 한시가 급하기 때문이다. 사단에게 노출되어 있는 제자들이 위험에 처했다.(마28:7-10) 제자들을 사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빨리 만나야 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신 후 첫 번째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만나시자고 한 것은 거의가 갈릴리 출신들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은 대부분이 어부로서 갈릴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빨리 모일 수 있는 장소는 갈릴리이다. 현명한 택하심이 아닌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도 갈릴리로 모이라면 어찌된 일인가 궁금하여 베드로나 요한 등을 만나보기 위하여 모두 모일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마태,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 가버나움 사람이고 빌립은 갈릴리 벳세다 출신이다. 바돌로매는 갈릴리 가나가 고향이다. 나머지 제자들 즉 작은 야고보와 도마, 시몬과 유다도 갈릴리 해변사람들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모두 도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겁먹고 도망간 이들에게 자신들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하면 오겠는가?
그래서 처음 만났던 곳, 옛정이 살아나는 곳,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고향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이런 것이 배려요 사람을 쓸 줄 아는 지혜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28:16)
신령한 하나님의 몸으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손수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또한 사단에게 침투당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셨다.
부활 후에도 언제나 낮아지고 겸손하며 온유함으로 예수는 40일 동안 일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예수와 함께한 삼 년의 공부를 마무리 할 수가 있었고 공부를 끝낸 담대하고 용기 있는 졸업생들이 되었다.
이들은 사단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므로 성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예수의 일등 제자들이 되었다.
사단은 예수가 계실 때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렵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승리한 줄 알았던 사단은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기에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미혹하기 시작하여 예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흡사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강제조약을 맺고 조선민족을 말살하려는 듯한 기세로 밀어 부쳤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 사람들을 한국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 핍박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이었는데 모든 한국 사람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창씨개명(한국식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하기도 했고 한글을 없애기 위하여 학교에서 일본어만을 가르치도록 했다.
일본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합병하여 그들과 피를 섞게 하여 모두 이방인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전략을 쓰기도 했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왕하17:6)
일제시대 때부터 부역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동네에 어떤 일을 하려면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만약 나오지 않는 집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그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 아직도 시골동네에서는 행하는 곳도 있다. 나도 군대가기 전에 일본이 잔재로 남긴 부역이라는 것을 여러 번 나가본 적이 있다.
이야기 하나 해보자.
일제시대 때 어느 날 면사무소로부터 각 가정에 부역 명령이 떨어졌다. 한국사람 가정이건 일본사람 가정이건 모두 한 사람씩 나와 부역을 하라는 것이다.
부역의 목적은 전쟁 중임으로 쌀이 부족하여 쌀 생산량을 늘이기 위하여 논 뚝을 정비하는 일이였다.
한 논에 여섯 사람씩 배치하여 일을 하게 하였는데 모든 논마다 일본인 세 사람, 한국인 세 사람씩을 배치했다.
일본인들은 각자가 삽을 하나씩 가지고 나왔는데 한국인은 세 사람이 한 개의 삽만을 가지고 나왔다. 그 삽은 일면 “가래 삽” 이라고 하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일하는 삽이다. 일본인들은 ‘조쎈징 웃기므니다.’ 로 비웃으며 어떻게 세 사람이 삽 하나를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며 조롱 하였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누가 먼저 빨리 일을 마치나‘십 원’내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일제시대 십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백 원짜리 한 장만 가지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되면 형사들이 쫓아다녔다는 말을 저의 아버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일까봐 그랬을 것이고, 그러다가 혹시 독립군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좋다고 응하며 조소한다.
‘조쎈징 우리가 이길꺼무니다. 돈이나 내 놓을 준비 하시무니다’
논 뚝의 길이를 반분하여 시합을 시작하였다.
한국인들은 세 사람의 힘을 가래라는 삽 하나에 집중시켜 열심을 내서 한나절 만에 일을 모두 마쳤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몫을 삼등분하여 각자가 일을 시작 하였지만 한국인들이 일을 마쳤을 때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나눈 몫의 반 밖에는 일을 하지 못 하였다. 일본인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일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들의 눈으로 봐도 논 뚝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도랑치고 가재 잡는 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일본인들 십 원이라는 거금을 내 놓으면서 납작 해진 코로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가래질하는 법을 수업료를 내며 배웠다는 이야기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결과다. 또한 三 이라는 숫자가 일궈낸 좋은 결과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했다. 백지장이 무거워서 같이 드는 것 아니다. 같이 들게 되면 반듯하게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함께 일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이다. 한 손으로 콩을 집어 보라. 몇 개나 집을 수 있는가? 하지만 양손을 써서 움켜쥐면 한 손으로 쥔 것 보다 2~3 배에서 잘하면 3~4 배까지 집을 수 있다.
사람의 힘도 한 사람의 힘은 그리 대단하지가 못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합하면 두 사람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배의 힘 즉 네 사람의 힘을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사배의 힘이 나오고 세 사람이 힘을 합하면 거의 십 배의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힘을 합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믿어지지 않으면 한 손으로 집은 콩과 두 손을 합하여 집은 콩의 수를 세어 보라
예수께서 역설하신“갑절”의 뜻이 이런 말씀인 것이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13:8)
혼자서는 이런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성장하는 교회를 보라 혼자의 힘으로 수천 명 수만 명을 전도하는 것 아니고 목사 혼자서 성장시킨 것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힘을 합한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좋은 결과를 주시기 위하여 三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신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옛날 우리나라 선조들은 부모를 모시며 자식을 낳고 사는 삼대가 한 집에 기거하는 것을 가장 선호했고 할 수만 있으면 여러 자식을 결혼시켰어도 한 집에서 살기를 원했다. 이것이 부를 축적하는 길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한다. 성경도 삼대가 한 집에서 사는 것이 행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로 의지하여 좋고 부모가 출타하고 집에 없어도 자식을 돌보아줄 사람이 있고 집안에 어른이 계시므로 예의범절이 있고 자식을 야단칠 때 어른들이 적당히 말려주는 등 여러 가지 단점들을 최대한으로 막아주고 장점을 살리면서 어린아이들은 조부, 조모에게 사랑을 배움과 동시에 조부들의 경험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단체생활의 방법을 익힐 수 있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이해하고 배려하며 합력하는 요령을 배우게 된다.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기본 수칙들을 가정에서 먼저 배우기 때문에 사회의 도덕이 살아나고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최소한 삼대가 살아야 진짜 행복을 맛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지로다.(시128:6)
정녕, 네가 네 자녀들의 자녀들을 볼 것이며, 이스라엘 위에 화평을 보리라.(킹 제임스 성경 시128:6)
자식의 자식을 본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본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경험 부족으로 자식을 잘못 키울 수도 있고 너무 엄하게 다룰 수도 있고 너무 연하게 키울 수도 있는데 핵가족은 이때 이것을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바로 잡아 주려면 충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부모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경험 있는 사람들이다.
조부모는 자식을 키워 성장시켜봤기 때문에 여러 가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식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를 키우는데 엄청난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딸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을 때 친정엄마 만큼 뒤치다꺼리를 잘해주는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데 할머니의 경험에서 나오는 실력은 산모의 건강을 바로 잡아주고 아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잘 돌봐 준다. 또한 산모의 마음을 그 누가 보살펴주는 것보다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딸은 어머니의 경험실력을 절대로 능가할 수가 없지만 몇 번의 경험을 더 하므로 인하여 그도 자신의 딸이 해산 할 때 자기가 받은 은혜의 경험을 똑같이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부모가 아이들을 사정없이 때릴 때 조부모는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며 아이들을 보호하게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여간해서는 손자, 손녀를 때리지 않고 타이른다. 그리고는 너는 커서 아빠처럼 때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서로 돕고 견제하는 속에서 자라야 그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며 가족을 사랑하게 되고 가족을 의지하며 정이 들고 효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핵가족으로 오로지 돈만을 위하여 사는 가정이므로 가정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에 있어서는 그나마도 배울 것이 없다.
탁아소 같은 종일반이나 유치원 같은 곳은 어린 것들이 사회 생활하는 것과 똑같다. 이 어린아이들은 그곳에서 지(知=지식)적으로가 아니라 지(智=지혜=요령)적으로 발달하는데 인내(忍耐)와 봉사(奉事)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좋은 것을 차지하는 이기적인 방법을 습득하는 사회생활을 배운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조부모나 부모가 자식에게 아전인수(我田引水)같은 방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형제의 우애를 가르치고 참는 것을 가르치고 함께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의 방법을 가르치고 효도를 가르친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이런 것을 배울 수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다만 이들은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사고 없이 일과를 끝내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니 배우는 것은 독점과 아욕(我慾)뿐이다.
사랑 속에는 희생, 봉사, 이해, 인내 등등 여러 가지가 다 들어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情)이다. 정을 주고받는 방법이야 말로 인생교육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부모와 매일 같이 장시간 떨어져 있는데 무슨 정이 얼마나 들겠는가?
사랑 속에서 인내가 빠져도 어느 정도 사랑할 수 있고 희생이 빠져도 조금은 사랑할 수 있지만 정(情)이 없으면 사랑은 조금도 할 수 없다. 하다못해 연민의 정이라도 있어야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잠시라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연민의 정이나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볼 때 정(情)으로 다져진 삼대가 한 집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 + 팔복 = 천국”이라는 책에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지금 가정을 보면 핵가족이라 해서 달랑 두 식구 아니면 세 식구 많아야 네 식구다. 이것도 아니면 독신이다. 왜 이렇게 살까?
저 혼자 편하자고 그렇게 산다. 내 한 몸 편하게 살자고 부모도 필요 없고 내 맘에 안 맞으면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필요 없다. 모두 버리고 아예 왕래를 끊어버린다.
내 맘에 안 들면 모든 것을 배척해 버리는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심보가 가정과 사회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은 뻔하다.
나 싫으면 국가도 필요 없어 군대도 가지 않으려고 돈을 써가며 자기 몸을 자학하며 별별 짓들을 다한다. 근래에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멀쩡한 몸을 수술하고 의사와 짜고 엉터리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하는 나쁜 짓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 힘들이는 심보와 돈으로 그 안간 힘으로 가족을 생각하고 가정을 위하고 국가를 위한다면 쓰고도 남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실전경험이 많지 않다. 세상이라는 곳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자신 들이 많이 배우고 학문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서 혼자서 잘살고 혼자서 사회를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곳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사회다.
자신도 그 속에서 하나의 개체로 살아갈 뿐이다. 사회가 없다면 자신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이 사회다. 어울려 살아가야 할 곳이라면 독신도 틀린 것이고 핵가족은 더더욱 맞지 않는다.
사회는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 이끌어 가는 것이지 새로운 지식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모두 경험을 토대로 나온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없는 지식 새로 즉석에서 만들어 새로운 것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라는 것이 살아가는 생활가운데서 많은 실패를 하고 여러 번 경험을 되풀이 하여 한 가지 정답이 나올 때 그것을 새로운 지식이라고 내 놓는 것이다.
국어도 수학도 도덕도 모두 흘러온 역사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별나라 것을 가져다가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본다든가 퀴즈를 푼다든가 하는 것들을 보라, 지나간 지식을 기억하여 그 기억을 누가 많이 가지고 있나 비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묵은 소리가 옳은 소리고 경험철학이 세상에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 예수로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일하시고 죽었는데 죽은 지 하루나 이틀에도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삼일 만에 부활시키셨다. 왜일까?
三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여 인간에 대한 육신의 결과를 만들어 내신 것이다. 三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 최대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삼일을 택하신 것이다. 천사들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24:7)
예수가 아기예수 때 동방박사들로부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을 받으셨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三 이라는 숫자를 통하여 육신의 일을 마무리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 또한 주님은 33세에 승천하셨다.
三 이라는 숫자를 두 번 쓰셨다는 것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것과 인간의 결과수인 三을 두 번 씀으로 육신의 최대한의 기쁨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예수 육신의 기쁨이란 승천하는 것이고 인간 육신의 기쁨이란 휴거하는 것이다.
이 이상 육신의 기쁨은 없다.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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