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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첫 제자들 I
본문: 요 1:35-51
요절: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우리는 앞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19-28에서는 그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절단에게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는 것을 증언했고, 29-34에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예수님이 그 메시아이심을 증언했습니다. 이번 단락은 세례 요한의 이 메시아 증언을 듣고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두 사람과 이들의 전도를 통해 제자가 된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자마자 제자를 부르시는데, 이 사건의 순서만 볼지라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양육하시는 일이 예수님 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부르시는 일이 공관복음에서 몇 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은, 오늘 제자들을 만나서 부르시는 사건과, 나중에 이들을 정식으로 제자로 삼으시는 일과(마 4:18-22; 막 1:16-20; 눅 5:1-11), 또한 사도로 세우는 일(마 10:1-4와 병행 구절)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절차와 긴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생각과 감정이 무르익고 성숙해서 예수님의 동역자로 결단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죄인에게는 매우 비밀스러운 분이시므로, 그분 자신과 그분 사역(십자가와 부활, 재림, 심판, 그리고 가르침 등)을 이해하고 그분 제자가 되기로 결단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은 우리 죄가 우리 눈을 가리고 마음을 동여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지만, 아직 이들을 정식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몇 달 동안 예수님과 지내면서 사귀고 같이 사역하면서 정말로 예수님을 생명을 바쳐서 따른 것인지 결단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정식으로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은 몇 달 후 갈릴리에서 일어납니다(마 4:18 이하와 병행 구절). 그리고 한동안 사역하다가 이들 중 특별히 12명만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것이 사도 임명입니다.
이번 단락에서는(35-51) 이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기록이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를 보충하려는 의도도 있고 또한 이 사건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고 어떻게 사귀면서 제자가 되는지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도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며, 제자는 어떠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단락을 세밀하게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고, 제자란 무엇하는 자인지를 분명히 알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삶의 혁신이 일어나야 합니다. 본 단락에서 예수님은 다섯(여섯) 제자를 부르십니다: 안드레, 요한,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야고보). 분량이 많으므로 우리는 두 번에 나누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4.1 첫 두 제자(1:35-40)
세례 요한의 사역은 회개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그분이 오시면 세례를 줌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게 하시고, 그 이후에는 그분이 메시아라고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분께로 보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미 오셔서 세례를 받고 메시아의 삶을 시작하셨으므로 그는 이제 계속 이것을 증언합니다. 29-34에서 우리는 그의 증언의 핵심 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분이 마침 자기 가까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자기 두 제자에게 그분을 증언하여, 이들을 그분께 보내는 사건을 대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사역을 얼마나 모범적으로 이행했는지를 보며 우리는 감탄하게 됩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요한에게도 제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에게 와서 배우고 그의 설교 사역과 세례 사역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눅 11:1에 따르면, 그 세례자는 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마 9:14 이하에 따르면 금식을 가르치고, 요 3:25에서는 정결 예식과 세례를 가르쳤습니다(아마도 겔 36:25 이하를 근거로 해서). 지금 본문에 등장한 이 제자들이 요한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례를 주는데 도왔거나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이들에게 바로 그 메시아를 소개하고 이들을 그분께 보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이미 메시아께 세례를 주었으므로, 앞 단락에서처럼 자기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말한 그 메시아가 저기 계신다.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던 분이 바로 저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례 요한의 증거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제자가 그의 증거를 받아 즉시 예수님을 따르고 나중에 사도까지 된 것을 볼 때, 그가 나중에 비참하고 허망하게 죽고, 그가 가리킨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은 죽였지만, 그의 증거는 그만큼 능력과 불멸의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가 소개받은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군사적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메시아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속죄 사역임을 그의 스승에게서 들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왜 왕이 아니고 가장 연약하고 나약한 “어린 양”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당시에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증거의 의미를 예수님을 따르면서 천천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다음 구절은 이 증거를 듣고 반응한 그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직은 제자의 길을 간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나중에 생명을 바쳐 헌신하게 되는 영적인 따름의 시작을 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40절이 밝히듯이 안드레이고, 다른 한 명은 요한입니다. 비록 요한복음서가 그 제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지만, 여러 구절을 종합해 보면 그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임이 틀림없습니다(요 13:23; 19:26,35; 20:2; 21:7,20,24).
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모범적입니다. 이들은 참 진리인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이며, 선한 기회가 주어지자 바로 붙드는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삶에서 영생을 위한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뒤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몸을 돌려 질문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느냐?” 혹은 “무슨 목적으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질문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메시아에게 다른 것을 구하려고 오기 때문입니다(예: 요 6:34). 그러므로 이들이 처음부터 왜 자기를 따르려고 하는지 마음을 분명히 정하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면 이들은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이렇게 처음부터 분명한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단순한 질문은 신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이들의 대답이 절묘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랍비여, 당신의 거주지는 어딥니까?” 이것은 질문 형태이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기거하시는 곳을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교를 주도하는 바리새인의 제자는 어느 스승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는 그 랍비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무조건 “우리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하지 않은 것이 신기합니다. 이들은 신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 집에 찾아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제자가 될 것인지 결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일단 당신과 사귀면서 당신을 알고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답의 핵심은 예수님이라는 Person에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예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와서 보라.“ 정말로 간단하며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우선 이것은 그들의 청을 받아준다는 허락입니다. 예수님은 거절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제자가 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직간접적으로 거절하신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눅 9:57 이하). 이것은 또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자기 거주지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분은 이들을 설득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이들이 직접 조사해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판단하게 하십니다.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미혹자의 행동과 반대임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선전하거나 암시적으로 설교하시지 않고, 사람이 그분에게서 직접 본 후에 판단을 내리게 하십니다(마 11:4). „와서 보라!“ 이것이 기독교 전도/ 선교의 기본 원칙이 될 것입니다(요 1:46; 4:29; 12:21; 행 17:11). 이것을 오늘날 상황에 적용한다면, 전도할 사람에게 성경 가르침의 핵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려줌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삶과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듣고 본인이 진지하게 판단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을 설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거짓으로 유혹하거나 심리에 강제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설득은 복음을 통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복음을 잘 전해주면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누가 지상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로 올 자격이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설득과 기교와 은사 주의, 각종 프로그램, 목회자의 권위나 카리스마 등으로 커진 교회에는 예수님과 구원이 없으며 이들은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들이 외쳐 부르는 예수는 우상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그 날“은 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가서 배우기도 하고, 많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메시아신지도 그분이 구약성경을 통해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대화를 통해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다”(41)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광신자나 열광주의자가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젊은이로서, 예수님의 대답과 가르침을 통해, 즉 잘 검사한 결과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한이 그때의 시각을 밝힌 것입니다: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수난 보도 외에는(참조: 요 19:14) 이러한 일은 앞으로 단 한 번 있는 일입니다(요 4:6).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 제자 중의 하나인 이 복음서 기록자 요한의 삶에서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부름 받은 날자와 시간까지 기록했다면, 그가 받은 인상이 얼마나 중요했을까요? 태곳적부터 예고되신 그 메시아(창 3:15)를, 온 백성이 그토록 갈망하여 기다리던 그분을 자기가 직접 만나서 대화한 그 시간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열 시쯤“은 오후 4시경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이들이 얼마 동안 예수님 곁에 거했는지를 대강 계산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날이 오후 6시에 끝나므로 (그 이후는 다음날로 간주한다), 이들이 예수님과 „그날 함께 거“한 시간은 최대한 2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는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임을 이곳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베드로 형제 안드레는 보통 그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이곳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이 보도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안드레“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 이름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았던 동네에서 두 가지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의 북단에 있는 벳세다 출신입니다. 이 벳세다는 이 호수로 이어지는 요단 강 하류의 동편에 있는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곳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이 섞여 살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본다면, 안드레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그리스 이름을 준 것으로 보아 엄격한 유대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직업이 어부였으므로 가끔 자기 선생에게 와서 가르침도 받고 그를 도운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형제 베드로와 함께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그를 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회심하기 전까지는(눅 5:1 이하), 그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것은 안드레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당시에는 벳세다에 살지 않고 가버나움에 살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베드로의 결혼 때문인 것 같습니다.
4.2. 시몬 베드로(1:41-42)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날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뵈온 일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과 대화한 후에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확신하고 먼저 자기 형제를 찾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을까요? “먼저”라는 말이 있으면 “그다음에”라는 말이 곧 나와야 합니다. 즉 먼저 “베드로”를 만나고 그다음에 다른 누구를 만났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자기 형제 야고보를 발견하기 전에 먼저 안드레가 자기 형제를 발견한 것이다. 즉, 시몬 베드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께 온 자이다. 그다음에 요한이 야고보를 만나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이 네 명은 모두 한 동네 사람이며 직업도 같은 어부였으므로 친구 사이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며칠 일을 쉬고 함께 갈릴리로부터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약 120 킬로미터 거리) 그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그를 도왔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았으면 분명히 요한도 야고보를 찾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이므로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를 만난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사도 요한이 겸손했고, 또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동방의 풍습을 따른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들의 활동이 여러 차례 기록되었지만, 요한은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자기와 형제에 대해서 아예 이름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한 책에 중요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먼저”라는 말을 사용해 그다음에 자기 형제 야고보를 불렀다는 암시만 줄 뿐입니다. 또한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고 누웠는지라”(요 13:23)라는 말로 그는 자기를 암시했습니다.
오늘날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목사와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유명해져야 주님의 사역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 사역을 섬기면 하나님이 그분의 때에 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에 필요한 만큼만 그를 알려 주십니다. 저는 독일에 수많은 보수적 대 신학자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한국과 미국, 심지어 영국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독일의 보수적 교회에서조차 잘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지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셨다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독일 대학에서 성경을 비판하지 않는 신학자들을 시스템적으로 교수로 임용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가장 큽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참으로 겸손해서 자기선전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사실도 크게 작용합니다. 이것은 시대정신과 역행하는 일로서, 우리가 잘 배워야 할 태도입니다. 열심히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되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첫날에 갈릴리 출신 어부 4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안드레가 자기 형제에게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 짧은 말 뒤에는 깊은 배경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메시아 대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등장한 세례 요한의, 메시아가 오실 날이 임박했다는 설교가 또한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5). 그러므로 이 갈릴리 청년들도 이 회개 운동에 참여했으며 세례 요한의 설교를 믿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자주 그에게 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처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은 설교를 많이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 3:3-18에 그의 설교 내용이 나와 있으며, 18절에는 “그 밖에 많은 것을 경고하여”(원어 직역)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와 요한은 그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스승이 오신다고 예고한 메시아를, 그것도 그가 직접 그분을 증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그분을 만났고, 그분과 오랫동안 대화를 한 결과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했을까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는 말에는 이러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자기가 기대하던 메시아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메시아, 우리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이 정말로 귀한 분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그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독자를 위해 메시아라는 말을 번역합니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메시아는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오늘날 각국의 언어로 보편화하였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과(출 29:7; 레 8:2 이하), 왕과(삼상 2:10; 10:1; 16:13; 삼하 2:4; 5:3; 왕상 1:39), 선지자(왕상 19:16)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고유명사로서 „그 메시아“는 동시에 말세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종, 다윗의 아들이어야 합니다(참조: 시 2:89; 사 42:1 이하; 49:1 이하; 50:4 이하; 52:13 이하; 53장; 삼하 7:12 이하). 그러므로 지금 안드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아가 말세의 구원자, 해방자, 통치자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 그분의 영적인 직위인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으로서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왜 이런 사람을 자기 허락도 없이 데려왔느냐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메시아는 정말로 높은 분이시므로 그분께 아무나 데리고 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은 베드로를 거들떠보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를 “보시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께 찾는 심정으로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박대하지 않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말씀은 자기 죄로 괴로워하므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나오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그의 이름 전체를 부르셨는데, 이것은 지금 공식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이 없었으므로 좀 더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는 아버지 이름을 붙여서 사용했습니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나님 아들이신 메시아께서 정말로 평범한 베드로라는 청년에게 큰 관심을 두시고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입니까? 안드레와 요한이 약간의 시기심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새 이름을 주는 것은 단순한 어부인 베드로의 삶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는 일입니다. 그는 시몬이 아니라 앞으로 “게바”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그를 게바로 변화시키시겠다는 창조주의 의지와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에게 새 이름을 주시는 것은 원래 하나님만 가지시는 특권입니다. 그분이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그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새 이름을 주시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바꾸셨습니다. 새창조 시에는 우리가 모두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사 62:2; 65:15; 계 2:17). 이로써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계시며, 새 창조 시대가 시작되어 그를 온전히 변화시키시겠다는 그분의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로써 시몬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합니다. 페트루스는 라틴어 표기며, 페트로스는 그리스어 표기입니다. 페트로스는 페트라(바위)와 연관되어 있으며, 아람어인 „게바“도 마찬가지로 아람어인 „바위“(키프, 케파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마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혈질이었고 용기와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험 속에서 지키고자 칼을 뽑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멀리서라고 끝까지 좇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라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좇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의 반석이 되지 못하고 자기 확신 때문에 넘어집니다. 자기 확신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이 모래처럼 부서집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정말로 견고한 바위가 된 것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의 활동을 지켜보면 그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남아 있는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주도로, 유다의 배신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남겨준 깊은 상처를 씻고,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성경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사도 한 명을 추가로 선발하여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기도 모임을 인도하여 교회에 성령님이 내려오실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자 성령 충만한 오순절 설교를 통해 교회 탄생을 주도했습니다. 이렇게 원시교회는 그를 주축으로 해서 설립되고 그의 지도로 성장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유대인의 핍박을 이겨가며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신약성경의 두 서신의 저자며, 마가복음서 저자인 마가에게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며, 그리스 지역의 선교사며, 로마에서 교회를 지도하고 삶을 헌신하여 예수님을 위한 순교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정말로 교회의 바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후서를 본다면 그가 얼마나 겸손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옛 삶을 아는 사람이면 그가 그렇게 변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은혜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그 은혜를 따라가면 우리도 그런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 본성을 이깁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본인이 깨어지고 찢어져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회개와 간구를 통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 회개나 사과도 하지 않는 사람, 고통과 수치를 달게 받지 못하는 사람, 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된 분이신지를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반석을 보시고 우리는 반석으로 변화시켜 나가시도록,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맡기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이 여러분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