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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9(주일) 욥기 33:13~33 ‘고난을 주시는 목적’ 예산수정교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고난을 경험합니다. 우선 고난(suffering)은 “인간이 겪는 신체적․정신적 괴로움으로서 자연이나 인간관계를 매개로 한 모든 것을 총망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고난은 신체적 고난(고통)과 정신적 고난(혹은 고뇌)의 두 종류로 나누어질 뿐 아니라, 그 원천에 있어서도 ‘재해’(자연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와 ‘행악’(인간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를 다루면서 개역판 한글 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용어들, ‘환난’, ‘핍박’, ‘괴로움’, ‘고통’, ‘곤란’, ‘곤고’, ‘능욕’, ‘해’, ‘재난’ 등 도 고난을 뜻하는 유사 개념으로 서술됩니다. 그러면 고난은 왜 발생하는가? 성경에서는 몇가지로 그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과실, 잘못, 범죄로 인해 고난을 겪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 예를 보여 주는 성경구절 하나만 소개합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 타인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입니다. 그런 예를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죄 사건입니다. 수 7:24~2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이 사건에 있어서 은과 외투와 금덩이를 훔침으로써 범죄 한 것은 아간 개인이었는데(수 7:20~21), 돌을 맞고 불사름을 당한 것은 범죄의 당사자뿐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아들들과 딸들―를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간의 아들들과 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다른 이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겪은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의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고난의 당사자가 고난을 겪는 특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이런 고난을 가리켜 “의로운 고난”(righteous suffering)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런 고난을 겪은 가장 대표적 인물이 ‘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소, 나귀, 양, 약대를 한꺼번에 탈취 당했고(1:15~17절), 몇 명을 제외한 대다수의 종들을 잃었으며(15~17절),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19절). 또 얼마 후에는 온 몸에 악창이 생겼습니다(2:7). 욥이 당한 고난에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고난에 있어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입니다. 또 도구적 원인은 스바 사람(1:15), 하늘로부터의 불(1:16), 갈대아 사람(1:17), 대풍(1:18), 병균(2:7) 등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 받은 이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범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고(욥 1:1),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욥 1:8). 욥의 세 친구들은 욥에게 무언가 숨은 죄가 있어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그를 정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노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 이니라” (욥 42:7). 이렇듯 욥의 고난은 특정적 이유를 제시할 수 없는 고난으로서, “의로운 고난”의 전형적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욥기 33장 13절부터 33절 말씀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고난 중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큰 위로와 솟아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멸망하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13~18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치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18절).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고 징계하듯,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엘리후는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가르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며 논쟁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이미 여러 방법으로 충분히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 듣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럴 때 감정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욥은 엘리후의 모든 말을 잠잠히 듣습니다(13~16절). 하나님은 사람이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꿈과 환상과 같은 사건을 반복적으로 주심으로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나를 두려움 가운데 몰아놓으시는 이유는 나의 악한 행실을 버리고 교만을 막아 그 영혼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7,18절). 그 영혼이 고난을 당하여 회개할 때 그는 그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땅의 것을 높여 보물 삼는 데에서 돌이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4–5에 보면 “ . .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죄 없고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을 때 속히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죄의 습관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죄의 습관 가운데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잘못된 삶에서 속히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기 위해 대속죄일에 금식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함으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옷을 찢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옷을 찢는 행위는 내면적인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지만, 당시 유다 백성들은 진정한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그쳤습니다.
따라서 요엘 선지자는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의례적인 행사로서의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회개가 아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아파하며 통회하는 상한 심령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책망했을 때 다윗이 했던 회개가 바로 마음을 찢는 회개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부하를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취한 다윗을 찾아가서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나를 두렵게 하는 고난의 사건이 찾아올 때 하나님이나 환경을 원망하지 말고 내 삶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이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사건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이 옳다”며 귀를 막고 있는 원망이나 논쟁거리는 무엇입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내 교만을 막으신 하나님” 백승룡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저는 물질을 우상 삼아 밤낮 없이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집도 장만하고 사업장도 생기니 자수성가했다는 교만으로 떵떵거리며 세상 문화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딸이 이단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을 빠져나오게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딸은 오히려 가출했고, 저는 딸을 구하고자 이단 상담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일러준 대로 1인 시위를 하니 딸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줄 안 저는 마음을 놓고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여전히 이단에 심취해서 그곳 사람들과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시 설득했지만 딸은 또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점점 심각성을 느끼게 된 저는 처음엔 딸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다시 찾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찾는 횟수가 늘고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것은 만세 전부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또 가출하여 순교하겠다는 유서까지 보내왔습니다. 그제야 저는 딸이 초등학생 때 “아빠, 같이 교회 가요”라고 하는 말을 무심히 흘려들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딸을 통해 계속해서 구원받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입니다(14절). 이를 계기로 그동안 제가 얼마나 유교적인 가치관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대해왔는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가족을 꾸짖기만 한 제가 가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 죄를 보고 회개하니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딸은 이단을 빠져나왔습니다(24절). 그리고 딸의 권유로 저도 큐티하는 공동체에 속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28절).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 가치관과 교만이 제 몸속에 깊이 배어 있어 또다시 죄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지만, 100% 옳으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적용) 교만이 올라올 때면 딸의 수고로 얻은 값진 구원과 함께 오늘 17절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체면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 잘못을 먼저 보고 미안함을 표현하겠습니다.
2. 중보자 예수님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9~28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중보자 예수님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4절)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에서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려면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a절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고난 자체만을 바라보면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고난 중에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문제의 해결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고난은 결코 우리에게 고통만 안겨주지 않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 안에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기뻐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패니 크로스비(Fanny Jane van Crosby, 1820-1915)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눈병을 앓게 되었는데, 마을에 의사가 없어서 다급한 나머지 무면허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어 각막에 심한 손상을 입고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동안 그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95세 동안 평생 감사의 삶을 살며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께로 가면’ ‘나의 영원하신 기업’ 등 9,000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난 중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거센 비바람과 수많은 역경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b절은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는 오히려 고난 속에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방법으로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고, 7일째는 7번을 돌고 백성들은 소리를 지르고 제사장은 양각나팔을 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들과 함께 7일 동안 묵묵히 성을 돌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고난 중에 인내하면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연단합니다. 로마서 5장 4a절은 “인내는 연단을”이라고 말씀합니다. 연단은 인내를 통해 믿음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이 더 강하고 순수해진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인내하면 그 인내심 때문에 우리의 인격은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이 빛난 인격이 됩니다. 극한 고난 가운데 처했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순금의 원재료는 동광석입니다. 돌덩이에 불과한 광석이 1,000도 이상의 용광로에서 세 번 살아남아야 순금이 됩니다. 동광석을 처음 제련하면 동, 그 다음이 은, 마지막에 제대로 된 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세공사는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최적의 시간에 금을 용광로에서 끄집어내려 신경을 곤두세우며 용광로 안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의 용광로 속에 빠질 때 절대로 빨리 건져내지도 늦게 건져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 안의 죄악의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인격으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는 과정입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인내하고 주님의 연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고난 받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19절에서 22절을 통해 고통과 징계를 받는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뼈가 쑤시고 드러나는 고통과 구덩이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그를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려 하심이고,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바로 중보자 예수님을 찾게 하기 위함임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회복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갈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한 손은 나 같은 죄인의 손을 붙잡고 원수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목적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이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인내하며, 연단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는 말씀으로 내 죄를 고백하며 사람들 앞에 구원의 노래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적용) 지금 나에게 찾아온 고난이 나를 구원하시고 중보자 예수님을 찾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인정됩니까? 고난 중에 내가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 위함입니다(29~33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고난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존적 교만이 있기에 자기에 닥친 고난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그런 환경을 원망합니다.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뜻을 알려주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계속 행하시는 이유는 구덩이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시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말을 귀담아 들으라고 합니다(29~31절).
요한일서 1장 5절로 7절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빛이시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고 따라가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빛이 비춰서 우리에게서 어두움이 다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로 4절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고 그 빛이 비치면 생명이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기자와 같이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시편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 매일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어둠 속에서 구원해주시는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이 내 속에 비치지 않으면 자신이 어둠의 구덩이에, 좌절의 구덩이에, 원만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 채 내 생각에 옳은대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어둠과 죽음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면 고난 중에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을 멈추고 내 삶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말씀을 귀담아 들음으로 내게 주신 고난의 사건과 인생을 해석해야 합니다. 누가 깨닫게 해주시냐?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면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하는데, 그 뜻은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 상담자’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보혜사를 가리켜 ‘그’라고 하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8절에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힘이나 능력이 사람을 결코 책망할 수 없습니다.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요 14:26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이나 능력이 어떻게 가르치고 생각나게 할 수 있게 하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신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말하기보다 잠잠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합니다. 시편 143편 8절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하나님께 나가 그 날에 필요한 인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시편 119편 71절에는 고난의 유익을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적용) 죽음의 구덩이와 같이 내가 빠져 있는 죄와 중독은 무엇입니까? 나는 고난의 사건 앞에서 말씀 묵상으로 내 마음에 생명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까?
결 론
오늘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찾아오고 고난은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저도 이번 주간에 코트에서 약간의 말다툼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고난은 아니지만, 마음의 부담이 좀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을 그냥 묻어두고 피상적으로 해석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과정에서 나의 잘못은 무엇이고,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사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를 말씀을 비춰봄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야고보서 1:19-20절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나의 경솔함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데에는 반드시 그분만의 선하신 뜻, 목적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 우리는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셔서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며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나를 하나님의 인격으로 연단하시는 뜻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매일 매일 생명의 빛되신 말씀을 통해 나로 깨닫게 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주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