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 동굴에 보관된 보물
쿰란은 예루살렘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1947년 베드인족 양치기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동굴에서 사해문서(성서의 필사본)를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쿰란 마을은 기원전 8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는 유대교의 한 파인 에세네파(Essenes)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해문서를 남겼는데 이 문서가 2천년만에 발견된 것이다. 문서에는 구약성경 39권 중 에스더를 제외한 38권이 발견되었고 주석들과 교훈집, 유대문학과 그 외 다른 문서들도 발견되었다.
소년이 최초 동굴에서 항아리를 발견한 극적인 상황은 잘 알려진 내용이라 생략하지만, 이 때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여러 경로를 거쳐 최종 이스라엘이 25만달러에 구입하였다, 이 후 베드인족 사이에서는 추가로 두루마리를 발견하려는 선풍이 불었고 몇명의 베드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1952년에 제4, 제5동굴을 잇달아 발견했고 특히 제4동굴에서만 550개 정도의 사본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제7동굴부터 제10동굴까지 발굴이 진행되어 사본들이 추가되었다.
1958년까지 일곱 개 사본의 내용이 모두 공개되자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가장 오래된 구약사본은 890년에 제작된 것이었는데 그보다 1100년이나 더 오래된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구약성경을 고스란히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몇천년 전에 기록된 구약성경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과 내용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성경의 필사본들이 각시대에서 변개없이 매우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는 증거였다.
세계에서 가장 힘든 퍼즐
11개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한 두루마리는 약 900개 정도되는데, 이중에는 약 8만개의 조각들도 있다. 이 조각들을 맞추어서 해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들중에는 40년 이상 퍼즐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상처 입은 메추라기가 알려준 4번 동굴 1952년 어느날 밤, 유대광야에서 베두인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사해 사본을 발견하여 큰 돈을 벌은 일로 화제로 삼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한 노인이 젊은 시절에 우연히 동굴 하나를 찾아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인의 오래된 기억에 따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듣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메추라기 사냥을 나갔다가 겨우 한 마리를 총을 맞혔는데 상처 입은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따라갔다.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바위틈으로 도망가다가 한 동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석화암 언덕을 파서 인공적으로 만든 방이었다. 아주 오래된 등잔이 하나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항아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기까지 들은 베두인들은 그들도 사본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을 한껏 받았다. 다음날 베두인들은 밧줄과 횃불을 준비하고 동굴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노인이 말한 장소를 찾았지만 동굴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동안 땅을 파들어 가자 마침내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쿰란 4동굴로 명명된 이 곳에서는 그 어떤 동굴보다 많은 사해사본을 발견하였다 두루마리는 약 550개에 달했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이 동굴은 쿰란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의 도서관 구실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두루마리들은 너무 낡아서 펼쳐볼 수 있는 상태는 거의 없었고 조각들은 수만개에 달했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퍼즐처럼 조각들을 맞추어가는 매우 힘들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개가 발견한 시드기야 동굴 1851년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예루살렘에 파송된 제임스 바클레이는 선교지가 기대와 다른 것에 실망하였다. 결국 바클레이는 선교활동보다 예루살렘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확인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무슬림들과 사이가 더 좋았던 덕분에 서구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볼수 있었다. 바클레이는 에루살렘 유적지의 지도를 작성하다가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의 인방돌을 발견하였다. 이 돌은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하고 사진을 찍는 예루살렘 서벽의 여성 구역에 있는 이 문에는 '바클레이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바클레이는 이외에도 몇 가지 발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번은 누군가 그에게 에루살렘 지하에 동굴이 있다는 정보을 알려주었다. 심상치 않은 정보임을 직감한 그는 동굴 입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일부러 입구를 감추어 둔 동굴을 찾기란 만만치 않았다. 사실 바클레이 이전에도 예루살렘 총독들이 입구를 발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하곤 했다. 그런데 바클레이는 데리고 다니던 개 덕분에 우연히 동굴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는 전문가들을 비웃기나 하듯이 어슬렁거리다가 다마스커스 성문 부근에서뼈를 찾다 동굴 입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동굴은 시드기야의 동굴이라 불렀는데, 주전 587년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할 때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이곳을 통해 여리고로 도망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오트만 제국 시대에 성을 건축하면서 여리고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을 폐쇄했기 때문에 입구를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찌른 롱기누스 창
4세기 무렵부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병사와 창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롱기누스라는 병사가 예수님을 찌르는 순간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피로 눈을 씻자 회복되어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유로 롱기누스의 창이 성배와 더불어 기독교의 성물로 회자되었다. 롱기누스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 그 창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창이 하나님의 가호를 상징한다고 믿어 늘 곁에 두었다. 나중에 프랑크 왕국의 궁재칼 마르텔이 그 창을 소유했다.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온 이슬람 대군을 프와티에 평원으로 끌어들여 전멸시켰다. 나중에 그의 손자 샤를마뉴가 창을 물려받았다. 900년초에 이르러 롱기누스 창은 작센 왕가의 보물이 되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이 창을 소유하려 애썼다는 말도 있다.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창은 현재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창이 진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성경 고고학 1. 모압 땅 골짜기에 묻힌 모세의 무덤 (신명기 34:5~6)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가 만든 구리뱀이 서 있다. 구리뱀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불뱀들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나오는데, 구리뱀을 만들어 보게 하자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치료되었다. 이 구리뱀은 히스기야 시대에 우상으로 신성시되어 파괴되었다(왕하18:4)> 모세는 출애굽 후 가나안 땅(팔레스타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대신 하나님은 느보산에서 가나안 온 땅을 보여 주시고 그곳에서 죽어 장사 되었으나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의 죽음을 많은 백성들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이 무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 많은 의견이 있으나 그중 한 가지는 모세가 사람 손에 묻히지 않고 천사들에 의해 장사되었다는 해석이다(필로의 모세, 2:291) 요세푸스는 유대상고사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모세가 엘레아자르와 여호수아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는데 갑자기 구름이 그를 덮쳤고, 골짜기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뛰어난 능력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고 감히 말할까봐 걱정이 되어 거룩한 책에는 자신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유대상고사 4:326). 2. 법궤
법궤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만나가 담긴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고 금박으로 입혀진 목재상자다. 법궤에는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라는 뚜껑이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그룹이라는 상위계급의 천사의 모습이 날개를 펴고 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보관하였다는 (왕상 8:6)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탈무드는 요시아가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 법궤를 숨겼다는 기록이 있고 구약 외경인 마카베오서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모세가 최후를 맞이한 느보산에 법궤를 숨겼다는 기록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