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기행](3)지리산 솔송주
은은한 솔향, 입안에 맴도는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맛. 지리산 솔송주의 매력이다. 솔송주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사는 하동 정씨 집안에서 제조법이 대대로 전수되고 있다. 개평마을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고을로 흔히 ‘좌(左)안동 우(右)함양’ 할 때 우함양이 지칭하던 곳이다.
그만큼 개평마을에서는 1년 내내 선비들의 시와 풍류가 끊이지 않았다. 바로 그 주안상에 오르던 술이 지금의 솔송주라는 이야기다. 1996년 주조허가를 받아 대량 생산의 길로 접어든 솔송주는 특유의 향과 맛으로 이제 대중적인 술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정여창과 솔송주
개평마을은 조선시대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인 성리학의 대가 문헌공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 선생의 고향이다. 중요민속자료로 보존되고 있는 선생의 생가는 한때 KBS 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 배경으로 활용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개평마을에 모여 사는 그의 후손들에게는 선생 때부터 솔송주가 가양주(家釀酒)로 명성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학문이 높았던 선생의 집에는 선비의 방문이 줄이었다. 선생에게 시집온 정종(定宗)의 손녀인 완산 이씨는 접대를 위해 솔순·솔잎을 넣어 술을 빚고 엿과 식혜를 만들었다. 술은 임금에게도 진상했다. 거기에 들어간 쌀이 많게는 한 해 300석에 달했다.
솔송주의 내력이 500년을 훨씬 웃도는 셈이다. 다만 선생의 집안에서 불리던 본래 술 이름은 송순주(松筍酒)였다는 점만 다르다. 주조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먼저 등록된 명칭을 피하다 보니 새 이름이 불가피해서였다. 개평마을 앞에 자리잡은 제조회사 ‘지리산 솔송주’의 정천상 대표(59)는 선생의 16대손이다.
#약주(藥酒)의 ‘으뜸’
솔잎·솔순 등을 재료로 한 술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신 약용주다. 송순주, 송주, 솔잎주 등 다양한 이름도 그 때문이다. 선비의 기개와 절개를 상징하던 늘푸른 소나무가 술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 이유는 그 효능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소나무는 솔잎·속껍질·솔방울·송진은 물론 뿌리부터 마디에 이르기까지 유용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 약재 덩어리로 통한다. 특히 솔잎에는 비타민·엽록소·칼슘·철분과 체내 합성이 불가능한 필수 아미노산 등 다양한 영양성분이 들어 있다.
또 혈당을 낮춰주는 글리코키닌도 함유, 당뇨병에도 도움을 준다. 비타민 C와 철분이 풍부해 빈혈에도 좋다. 혈액순환을 개선해 고혈압과 중풍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송주의 시장개척
지리산 솔송주는 유사한 술 가운데 주류시장 입성에 성공한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지리산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한국 토종 솔을 재료로 고집한다는 점이 먹혀들었다. 상품 다양화와 함께 국내외 주류 박람회를 쫓아다닌 정천상 대표의 마케팅 노력과 부인 박흥선씨의 정성이 담긴 제조도 밑바탕이 됐다.
1999년 농림부 주최 전국 우리식품 품평회에서 주류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솔송주는 알코올 13%의 약주와 40%의 리큐어주 두 가지가 독특한 모양의 도자기나 유리병에 담겨 전국 48개 대리점에서 판매되고 유통회사를 통해 백화점 등에도 납품된다.
회사측은 과실주인 복분자술과 머루주도 함께 생산하는 등 상품을 다각화했다. 세가지 술의 국내 매출액만 연간 50억원대에 이르렀다. 농가소득 향상 등에 기여한 공로로 민속주 제조업체로서는 드물게 2002년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영예도 안았다.
2003년 하반기부터는 수출에도 눈을 돌렸다. 일본을 대상으로 처음 시작한 수출은 미국·홍콩 등으로 대상지역이 늘어났다. 수출액은 연간 20억원대를 돌파했다. 지금은 복분자술이 수출 주품목이지만 솔송주도 중국 등 바이어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전망이 밝다.
#석이버섯과 먹으면 신선놀음
과거 개평마을에서는 지리산 솔송주의 안주로 석이(石耳)무침을 애용했다. 마치 바위에 붙은 귀같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진 석이는 깊은 산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지의류(地衣類)의 일종으로 담백한 맛을 지니고 있고 무침·튀김·탕 등의 재료로 이용된다.
동의보감에서는 석이를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하고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선승들이 즐겨 먹어 신선의 식품으로 불리는 솔과 닮은 꼴이다. 담백한 석이는 솔송주의 깔끔한 뒷맛을 더욱 짙게 한다. 석이가 아니라도 송이 등 버섯류도 역시 솔송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꼽힌다.
〈함양|글 박영철기자 ycpark@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전통주 기행]“술한잔 못마셔도 맛은 기막히게 알죠”
지리산 솔송주의 맛은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 박흥선씨(52·사진)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박씨는 시어머니 이효의 할머니(95)로부터 제조법을 전수했다.
이할머니는 정씨 집안의 쉴새없는 대소사를 치르느라 평생 솔송주와 함께 살았다. 술을 빚을 때마다 맛을 보던 이할머니는 애주가로 변해 지금도 하루 몇잔씩 솔송주를 들이켠다. 박씨는 “그렇게 솔송주를 많이 드신 어머니가 아직도 정신이 맑은 걸 보면 약술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며 웃음지었다. 박씨는 본래 간호사로 일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한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이할머니는 아들이 손님을 맞을 일이 있으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까지 누룩 광주리를 이고와 술을 담갔다.
“참 희한한 것은 서울서 술을 빚으면 아무리해도 제 맛이 나지 않았는데 아마 물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씨는 시어머니의 열성 덕분에 시골을 오갈 때마다 술 빚는 일을 도왔고 자연스레 제조법을 익혔다. 전통 솔송주 제조법은 찹쌀 죽에 누룩을 잘 섞어 독에 보관하면서 4~5일 발효시켜 밑술을 만든다. 또 다른 찹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들어 식히고, 살짝 찐 다음 말린 솔잎·솔순과 밑술을 혼합해 60여일 발효·숙성시킨다. 그 술을 떠내 깨끗한 독에 담아 서늘한 곳에서 40여일 저장해 침전시킨 뒤 맑은 윗술을 떠내면 약주가 된다.
박씨는 시어머니의 제조법에 과학을 가미했다. 술독을 구들장에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어림잡아 온도를 맞추던 것은 온도계로 하고 있다. 솔잎·솔순의 양은 엄격한 성분 분석 등을 거쳐 결정한다. 제조공장에서 이제 술독 역할은 대형탱크다. 박씨는 “솔잎·솔순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떫고 역겨운 맛이 나며 적으면 향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점이다. 박씨는 “시집온 후 술을 몇잔 마셨다가 얼굴이 시뻘개지고 가슴이 뛰어 혼쭐이 난 이후 거의 마시지 않고 있다”면서 “그래도 혀끝으로 술맛을 음미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며 쑥스러워했다. 박씨의 바람은 “농민소득 향상에 도움이 되는 민속주가 더 많은 애주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함양|박영철기자 yc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