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부처를 보았는가
고딩 때 학교에서 거리는 좀 멀지만 일부로 찾는 이 없는 조용한 산성 절 아래 마실에서 자취를 했다. 책읽기 하기가 참 좋은 마실이다. 그 땐 겉물이 들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이 때에 읽었다. 지금은 초파일이 공휴일이만 그 때는 무신날이 였다. 절집 주지 아들이 한 해 선배라서 초파일에 절집에 놀러가면 떡과 과일을 배터지게 실컷 먹었다. 난생 처음으로 바나나와 밀감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 후 등산을 다니며 유명산 절집에 자주 가는 덕에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반야심경]을 100번 읽기로 작심했으나 그 뜻이 너무 깊고 넓어 마흔번을 넘게 읽고도 한자취도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 곰배치기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종교는 어떠한가.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수준으로 떨어 졌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는 불교, 사회 생활은 유교, 그리고 교회는 일요일에만 기능을 하는 [종교의 삼권 분립]으로 되어가고 있어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경계도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리처드 도킨스] 는 신을 의심하라 종교는 " 만들어진 신" 이다 라고 하며 종교人은 신에게 옭매인 '운명의 대상자' 라고 했다 . 행여 우리는 종교를 「상호 거래의 대상」 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내가 신께 보시하고 찬송하니 신도 나에게 무언가를 '반드시' 주셔야 해요 라고 말이다. 종교인들만이 끼리끼리 사부작 거림은 없지는 않았는지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신은 착하다고 해서 반듯이 복을 주지 않으며 나쁘다고 해서 꼭 벌을 주지 않는다. 신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특정 종교人이 아니다.
교회도 수년간 다녔고 반야경에 홀라당 빠져 심독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니며 명심보감과 소학을 통해 유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사서강독을 익히려 다니고 있다. 나의 신은 하나님, 부처님, 조상신, 삼신할매, 점바치등 마카다 믿는 다신론자이지 무신론자는 아니다. 이쪽 神에게 복 달라고 빌고 저쪽 神에게 구원을 바라고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소금뿌려 厄(액)막이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신에 대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 후회를 할 때가 많다. 마치 일차선만 있을 때는 차가 밀려도 참고 후회는 하지않지만 2차선 이상일 때에 유독 내 차선만 막힌다면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뷔페식당의 다양한 음식보다는 칼국시 전문점 국시 한그릇에 더 만족할 때가 있다.
불교의 최고 가치는 '자비'이다.
말 모이(사전)로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이다.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게 함 이라 했다.
구겨진 마음을 불방망이로 사정없이 매치고 두들겨서 다듬질로 펴고 갈기갈기 흩어진 마음을 깔구리로 긁어 모아 퍼즐 맞추듯이 하나하나 모으면
한마음이 된다. 곧 부처의 마음이다.
모 스님 법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설하셨다. 무신말인가 싶어 궁겁어 그 절집에 서너번은 찾았다. 모진 말로 왱기면 똥은 똥이요 부처는 부처요 나는 나이다. 동의어의 반복은 말의 체면술과 같아서 자칫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절집의 물만 감로수이덩가. 강물에 잠긴 달도 참 달이 아니듯 거울에 비친 '나'도 참 '나'가 아닌 허깨비이지요. 절집의 부처는 돌딩이요. 쇠딩이요. 흙딩이라고 법문하시며 절집에는 부처가 없고 절집 밖에 부처 있다 했지요. 하물며 그 큰 부처가 나자빠지면 부처가 사람죽였다 하지 않을까요.
절집은 절하는집이 아니라
소금으로 배추 절이듯이 마음 절이는 집이 절집이니 下心
하심하라 하셨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보태지도 말고 덜어내지도 말고 한마음 쉬면 그대로가 부처라고 한다.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자비란 무엇인가?
"시몬과 페로" 란 유명한 그림이 있다. 「루벤스」가 그린 작품이다.
왠 늙은 노인이 미모의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그림이다. 역모죄로 몰려 굶겨 죽이는 형벌에 처한 아버지를 만나러 간 딸이 간수 몰래 아버지의 생명을 연명시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아버지를 석방했다. 로마인의 자비 "시몬과 페로"이다.
유씨 댁 큰 며느리와 작은 며느리가 집안이 가난하여 봄에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왠거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작은 며느리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젖을 거지에게 먹여 살렸다. 집에 돌아 온 큰며느리는 시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려 들렸더니 유씨는 작은 며느리를 크게 칭찬하였다. 젖을 준 것이 바로 자비요 작은 며느리가 곧 부처인 것이다.
"擊甕救兒 격옹구아"
황금항아리를 깨뜨려서 항아리 속 아기부터 먼저 구하다.
'가엾음'이 곧 자비이다.
불전에 향불은 뉘 살점의 불내음이며 공양 음식은 뉘의 땀과 눈물로 지은 곡석이며 절집 기왓장은 뉘의 뼈를 태워 구웠덩가. 비단방석 두세겹 깔고 앉아 목탁깨는 개기름 낀 살 진 者(놈자). 백팔배 절할 때 무릎 까질까 싶어 푹신한 자부동 위에서 절하는 운 좋은 사치스런 그 중 놈.
비단 옷 입은 者(놈자) 하나같이 누에 친 사람 아니더라.
맨 땅에 무릎 꿇어 절하는 그 자가 바로 부처인 것이다.
달마스님께 물었습나다.
" 스님, 내 마음 불안합니다."
달마스님이 말했다.
"그 마음가져 오너라"
스님, 찾아보았지만 못찾겠습니다.
"그럼 됐다."
누가 부처를 보았는가?
우 ㅓㄴ
https://youtu.be/zsurCr4m-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