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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그리스 터키 여행기 2
2011.01.09 에게해 황혼이 울럼증 나도록 좋았던 날
나라마다 대표하는 항공사가 있기 마련이고 승객 대부분은 자국항공사를 애용한다. 이번 여행은 대한항공도 아니고 아시아나도 아닌 투르크항공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투르크 항공은 터키의 대표항공으로 우리나라쯤 치면 대한항공 쯤 된다. 일정상 터키 국내선을 두 번 이용하고 그리스편도 함께 이용하기 좋다는 것이 선택의 이유였다.
같은 구간이라도 항공사마다 금액이 다르고 써비스도 다르기 마련인데 내가 타본 몇 몇 비행기들 중에서 그래도 써비스 좋고 마음 편하기는 대한항공이 최고였다. 예쁜 언니들이 도도한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지나갈 때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도 좋고, 쭉쭉빵빵한 미모에다 목소리까지 곱다. 게다가 기내식이 맛있고 깔끔하며 한국인 입맛에 맞춤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또, 무슨 일이든 한국말로 마구 요구하고 물어볼 수 있어서 안심인데다 비행기 안도 쾌적한 편이다.
미국 델타항공이나 노스페이스 같은 미주 노선 항공사에는 승무원들이 대개 나이 든 아줌마이고 비행기 좁은 통로가 위험할 만큼 우람한 몸매를 소유하신 분들도 가끔 있는지라 써비스를 요구하기가 좀 어려운 감이 있었다. 동남아쪽 항공사는 친절하긴 한데 왠지 비행 안전이 좀 불안하고 음식에서 약간의 스킨 냄새가 나서 속을 뒤집을 때가 있다. 중국 비행기는 쉴 새 없이 쏭쏭거리는 중국인들 땜시 머리가 아픈데 가장 결정적으로 담요의 까칠한 촉감에 정이 확 떨어져 될 수 있으면 안타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불만족한 써비스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건 오로지 한 가지 매력- 저렴한 가격이다. 우리처럼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가 주는 안락과 편리함을 잠시 접고 과감히 선택하기도 한다.
터키 항공은 다른 항공사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매력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요리사가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사실이다. 비행기에 정식으로 주방이 있을 리도 없고 요리사가 별반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듯도 한데 하얀 요리모자랑 앞치마를 두른 남자 요리사가 뭔가를 하고 있는 걸 보니 터키항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처럼 이코노미 고객이 아니라 일등석 비즈니스 고객을 위한 써비스에 전념하며 특별 주문을 받고 있겠지만...........
첫 번째 기내식은 피시(생선)와 비빔밥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당근 비빔밥을 선택하였고 맛있었다. 하지만 서두르며 먹느라 참기름을 안 넣고 먹는 안타까운 실수를 했다. 12시간의 비행 중 기내식 먹는 시간이 젤로 행복한 시간인데 말이지....
좁은 좌석에 앞 등받이 바라보며 멋대가리 없이 먹는 기내식이지만 지루한 비행시간을 잠시 잊고, 먹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왜 아니 좋을 손가? 손톱 만하게 잘라 놓은 과일 4조각까지 다 먹고 나니 슬슬 잠이 올라고 한다.
비뚤어진 고개가 아파 눈을 뜨니 에고 벌써 8시간을 날아왔네. 다들 조용하고 비행기 안은 컴컴하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 스스로 놀랐다. 잠시 있으니 불이 확 밝아지고 승무원이 다니기 시작한다. 또 기내식 먹을 시간인가 보다. 이번 기내식은 물어보지도 않는 걸 보니 단일 메뉴인가 보다. 메뉴는 올리브 두 세알, 스크램블드에그, 햄조각, 치즈 과일 약간이다. 그래도 빵은 따뜻한 거 주니 좋다. 버터도 잘 발라지고 치즈도 먹기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역시 기내식의 백미는 비빔밥이여~~~
화면으로 비행기 경로를 보니 카스피해를 지나고 흑해를 지나 이스탄불에 다가가고 있다. 책에서나 보던 카스피해, 에게해, 지중해 등등 검은 하늘 아래 소리도 없이 날아왔나 보다. 기내 방송에서 착륙을 알린다.
04:30분 이스탄불 도착.....생각보다 30분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공항 환승 구역에서 바로 그리스 아테네 편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TK1845편은 08:05분 출발이라 3시간 넘게 시간이 남았다. 12시간을 날아왔는데 또 기다려 비행기를 타야 하는 피곤함.......살짝 지칠라고 한다. 그래도 일단 구경은 해야지.
이스탄불 공항은 인천만큼은 아니지만 넓고 시설도 괜찮은 편이지만 승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너무나 부족했다. 앉으려고 해도 의자가 없어서 공항 대합실을 여기 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별달리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일행들이 다시 만나기로 한 중앙 홀 전시용 자동차에 기대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면세점 구경도 했지만 화장품과 술 종류가 대부분이고 인천공항처럼 화려하고 멋진 디스플레이, 다양한 브랜드가 경쟁하듯 늘어서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방금 기내식 먹고 내렸는데 또 먹기도 그렇고 .........지루하고 고달픈 새벽이었다.
드디어 아테나행 비행기에 탔다. 양옆으로 외국인이 앉았다 내 왼쪽 외국인 아줌마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어 기혼자로 추축되고 얼굴 표정은 좀 피곤하게 보이는데 전업주부 같지는 않았다. 심심하기도 해서 떠듬거리는 영어로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기초 영어로 나누는 대화야 뻔하지만 그래도 맹숭하게 있는 것보다야 나을 듯했다.
그녀는 폴란드인이고 집이 아테나에 있으며 맞벌이주부이고 일 때문에 이스탄불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읽고 있는 책이 있길래 어떤 내용인가 하고 물으니 그리스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소설이며 제목은 ‘LA illha' 라고 하였다. 그리스어는 영어와 약간은 다른지 눈으로 살짝 읽으려 해도 해석이 되지 않았다. 에고.....영어 가지고 난리쳐도 영어로 안되는 게 더 많은 세상이다.
그럭저럭 아테나 베니젤레스 공항에 닿았다. 오전 9시 25분.
우리를 마중 나온 가이드는 이영란씨로 40대의 통통한 그리스 교포 아줌마였다. 방글거리는 미소에 감칠맛 나는 서울 말씨가 풍성한 몸매를 커버하고도 남아 호감이 생기는 타입이었다. 인어치마에 부츠를 신고 고동머리까지 한 아줌마는 교양 있는 기독교인처럼 보였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가 미리 준비된 버스에 탔다. 17명이 45인승 버스를 타니 자리는 매우 널널했다. 창가마다 1명씩 앉아도 비는 자리가 더 많은지라 편하고 좋았다. 날씨는 또 우찌 이리 좋은지 기온은 17℃, 바람도 별로 없고, 구름도 거의 없는 쾌청 그 자체였다.
그리스 산하의 첫인상을 요약하면 메마름 속의 강인한 생명력이라고나 할까? 산에는 키 큰 나무 하나 없고 돌덩이 사이사이로 초록색 가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어 돌과 풀이 적절히 섞여 있는 게 꼭 요리로 치면 파래두부무침 같은 느낌이다. 적고 보니 좀 우끼네......
간간이 키 큰 나무 군락이 보이는데 모두 올리브나무 라고 한다. 그러고 여기도 저기도 다 올리브 농장인 듯하다. 지금 겨울이라 우기인데 비가 와봤자 돌덩어리로 된 산 아래 물이 고이지도 않을 테고 다른 농작물은 키운다는 것은 어렵게 보였다. 겨울이라고 하지만 높은 기온으로 대부분 나무는 잎을 다 달고 초록을 뽐내고 있었고 창가에 부서지는 햇발은 내가 입고 온 오리털파카를 부끄럽게 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그리스 아테네의 존재 이유인 파르테논이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인구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이탈리아처럼 버라이어티한 유적이 없어도 그리스라는 나라에는 묘한 기대감이 있다. 바로 그 원천이 아크로폴리스이며 그것을 보러 간다는 것이다. 고대에 찬란했던 그리스는 중세나 근세에서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필되지 못하는 나라인가 보다. 유럽의 다섯 골칫덩이를 말하는 ‘PIGS'에 들어간다고 하니 말이다. ‘PIGS'란 포르투칼,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또 한나라가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안나네. 얼마 전 우리나라 매체에서도 그리스 국가 부도설이 나돌았고 덕분에 주식시장이 살짝 흔들리기도 하였으며 IMF의 개입 등 안좋은 상황이라고 들었다.
그리스는 관광업과 해운업으로 온 국민이 살아가고 있으며 공장 따위 별로 없는 깨끗한 자연환경을 지녔다고 한다. 좋겠다......관광업은 조상의 빛난 얼을 담보로 거저먹는 건데........짜슥들.....부럽군.
그리스 여행의 엑기스를 딱 하나로 요약하면 아크로폴리스 언덕이라고 할 만큼 파르테논과 아크로폴리스의 이름은 고귀하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아테네 구 시가지는 좁은 골목으로 큰 차들이 비껴가기엔 왠지 부담스러우나 편리하고 현대적인 것만 무조건 선호하지 않고 나름 조상의 얼을 지키고 있는 시민의식이 부러웠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입구에 차를 내리니 날씨가 덥다. 겨울옷을 겹쳐 입은 우리 일행 옆으로 반팔 차림의 여행자가 지나간다. 반팔을 입어도 될만큼 따뜻한 곳이다 여기는.........훌러덩 파카를 벗고 슬슬 언덕을 올라가는데 햇살이 정말 따갑다. 그늘을 찾아야 할 지경이군. 이 겨울에 웬 호사인가?
아크로폴리스 아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 있다. 이름하여 해로트아티쿠스 음악당인데 6월-10월까지 바로 이곳에서 실제로 음악회가 열리고 많은 시민들이 달빛과 별빛을 보조 조명 삼아 음악회를 감상한다고 한다. 언젠가 여행 프로에서 보여준 기억이 난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한밤중 음악회를 즐기는 모습.......거기가 여기였던 거야?
유명한 음악인이 많이 공연했지만 특히 조수미씨가 이곳에 와서 마이크도 없이 노래할 때 원형극장 담장을 넘어 바깥까지 들렸다고 한다. 표를 구하지 못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 때 노래소리가 들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가이드의 경험담을 들었다. 나도 조수미씨의 공연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첫인상은 그다지 이쁘지 않고 서글서글한 아가씨 쯤으로 느꼈었는데, 노래를 듣고 난 다음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한 성스러움을 풍겼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이드의 경험에 공감하여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주었다.
아크로 폴리스 광장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완전 자유와 안락을 몸으로 구가하며 늘어져 자는 개를 보았다. 여러 마리가 이곳 저곳, 무시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여기 그리스에서는 ‘개팔자가 상팔자다’ 이런 말은 결코 거짓도 아니고 우스개소리도 아니다.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는 동서 약 270 m, 남북 약 150 m로 서쪽의 올라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3방향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이미 미케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이었고, 페이시스트라토스·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의 신전과 현문이 세워졌으며 아테네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로마와 터키인 등의 지배를 받은 시대를 거쳐 언덕의 발굴도 행하여졌다. 198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이 되었다.
드디어 언덕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한창 복원중인 니케의 신전이 오른쪽으로 보이고 굵은 기둥들이 하늘을 받치고 섰다. 기둥들 사이로 난 계단을 한단씩 밟아 하늘과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앞이 툭 트이자 시야에 들어오는 당당한 건축물 하나. 바로 파르테논신전이다. 책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절반은 허물어져 아픈 모습이지만 당당함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동쪽편 긴 회랑 쪽은 대부분 복원 되었지만 서북쪽은 많이 무너진 모습이라 언덕에서 올라선 바로 그 방향이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이라 할만하다.
파르테논 신전은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고 전해지며 본전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m에 이르는 화려하고 장엄한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서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신전의 장식 조각에는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대군상조각이 있고 상부 4면 외벽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을 비롯하여, 신화에 나오는 전쟁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기둥은 모두 도리아식의 정갈한 모습이며 위풍당당한 모습이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모습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또 그리스 신전은 지붕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기둥의 수에도 예술적인 비례가 있는데 긴 쪽 기둥 수=(짧은 쪽 기둥 수×2)+1 이라는 공식을 철저히 지킨다고 한다.
세어보니 파르테논 신전의 긴 쪽 기둥 수는 17개, 짧은 쪽 기둥 수는 8개가 분명했다. 신전을 배경으로 점프샷, 얼큰샷, 커플샷, 줌샷 등등 해보고 싶은 대로 다 찍고 고개를 돌리니 바로 건너편 여신상이 나란히 4개나 벽을 장식하고 섰다.
가이드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지만 이미 나의 눈은 날아갈 듯 조각되어 수줍은 듯 서 있는 여신들에게 고정되어 다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보통 기둥만 서 있는 신전과 달리 입체적인 벽이 무척도 인상적인 신전이었다. 이리 찍고 저리 찍고 맘에 찰 때까지 찍어도 디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또 다시 큰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한 게 화딱질이 났다.
하지만 카메라를 구입하고 안하는 것이 돈 문제는 아니다. 만약 구입한다 해도 그 무거운 것을 항상 메고 다니며 렌즈를 관리하자면 정성과 시간이 들 테고 아무래도 기동성이 떨어질 것만 같아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중이다. 하지만 현장에만 오면 큰 카메라가 부러운 건 우짜리오.......
아크로폴리스 전망대 대형 터키 국기 아래서 파르테논과 아테네 시가지를 조망하였다. 아담한 집들은 결코 5층 이상은 없었고 붉은 지붕과 흰 벽으로 통일감을 준 아기자기하고 빽빽한 마을들은 정겹고 따스했다. 아크로폴리스 맞은편 리깨메또스 언덕 꼭대기에는 하얀 그리스정교회가 서 있었다. 이 두 언덕이 아테네 구시가지 어느 곳에서 보일 수 있도록 다른 건물은 높이 짓지 못하게 스카이 라인을 확실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역시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답게 삐죽 솟아오른 마천루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신시가지 쪽에는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복잡하고 바쁘고 높다란 건물이 줄을 서 있겠지만 옛것을 옛것답게 인정하는 지혜를 배워볼 만하다.
파르테논 신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려는데 아까부터 수상한 남자가 주위를 뱅뱅 돈다. 내가 어리버리해 보이나? 울 마징가는 가끔 내보고 씰데없이 똑똑한 척한다고 말하는데 이 남자는 눈에는 아닌가보다. 소매치기 아니면 삐끼 정도일 테지......
에고 괜시리 또 여권이나 잃어버리면 일이 크다. 우리 일행들 곁으로 돌아오니 그 남자 슬슬 꼬리를 빼더니 사라진다. 역쉬 내가 어리버리해 보였던 게야. 입맛이 쓰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오며 BC 6세기에 지었다는 디오니소스 음악당을 보았다. 목재로 이루어진 작은 음악당이지만 옛날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허구라고 생각했던 신화들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슬슬 언덕을 걸어 내려오니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있다. 직접 오르면 몇 걸음에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언덕이지만 의미가 심오한 곳이었다. 최초의 강간과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 곳이며 복음과 관계된 중요한 순례코스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냥 붉은 언덕으로 보이는 게 탈이지만..... 솔직히 날씨가 더워 아까보다는 집중력도 떨어지긴 했고.....
가이드를 따라 이번엔 소크라테스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한 달 정도 이 감옥의 세 번째 방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감옥은 자연 동굴을 이용하였으며 앞쪽으로 쇠창살을 박아 놓았다. 각 방들은 작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방의 크기가 각각 달랐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이 탄생한 자리라지만 확실히 증명되지 못한 카더라식 유비통신으로 전해진 유적지였다.
소크라테스라 하면 그의 악처 크산티페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보다 무려 23년이나 연하인 아내였다 한다. 10살도 아니고 20살도 아니고 23살이나 차이 난다면 지금 내 나이 기준으로 22세 총각이랑 결혼한다는 얘기? 음......신랑이 버거워서, 도망갈까 두려워서, 사랑받지 못할까 염려되어, 거듭되는 눈치보기와 잔소리질, 게다가 틈틈이 의심의 제스추어까지 더한다면 누구나 악처나 악부가 되고 말 것이다. 이건 소크라테스 마누라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지는 결혼의 문제라고 매듭지었다.
한참 걸어다니고 나니 배가 출출하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연거푸 먹었지만 그래도 밥 들어갈 배는 남아 있었나 보다. 방그라띠 마을(오렌지가로수마을)에 있는 한국음식점 귀빈(VIP)에서 갈치구이, 오징어볶음, 소불고기, 억센 상추 등으로 배부르고 푸근한 점심을 먹었다. 주인아줌마는 한국인이고 음식 솜씨가 괜찮았다.
밥 먹고 우리는 수니온 곶으로 가기로 했다. 아테네 시에서 67km 떨어져 있는 수니온 곶은 에게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한다. 아테네 구시가지를 빠져나와 해안가에 이르자 내 눈이 먼저 사로잡은 것은 수도 없이 많은 요트의 마스터였다. 어쩌면 이리도 빽빽하게 솟아있는 것인가? 현대자동차 공장 앞마당에 차가 세워져 있듯 해안가 바다에는 요트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여유롭고 경이롭다. 동생이 한창 벌이고 있는 요트 사업도 이곳에서는 잘 될 것 같아 빨리 소식을 전해주고 싶은 욕심도 난다. 어느 집이나 차를 한 대 가지는 것처럼 어느 집이나 요트를 한 대씩 가진다면? 상상은 끝도 없이 지중해를 달리고 수에즈를 넘어 홍해로 인도양으로 거친 태평양까지 거침이 없었다. 잠시 속이 후련하기는 하다.
어! 그런데 달콤한 노래소리가 귀를 간지른다. 너무도 익숙한 나나무수꾸리의 목소리....검은 뿔테 안경과 긴 생머리로 대표되는 나나무수꾸리. 이미 할머니지만 목소리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감미로움 그 자체다. 게다가 약간 허스키한 매력이 있는 메리나메리꾸리(그리스문화부장관 역임)의 목소리도 애잔함을 더한다. 해안가 풍경도 멋진데 귀까지 호사를 하고......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된 메리나메르꾸리는 가수이고 연극인이며 장관이었는데 국외에 흩어진(특히 영국) 그리스의 문화재 반환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여 그리스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였다. 또 중저음의 남자 하자야니스의 목소리에 눈이 절로 감겨들 즈음 익숙한 곡조를 들었다. 희랍인 조르바의 주제곡이 전통 악기의 음색으로 연주되어 감미로운 분위기는 극에 달했는데......
갑자기 가이드가 마을 이름을 소개하며 웃기는 바람에 진지하던 70년대 클래식 음악다방 분위기는 확 깨졌다. 마을 이름인즉슨 ‘불라’와 ‘발키자’ 였다. 뭔 불이나요? 뭘 밝히나요? 상상하지 마시라. 단지 이름이라잖아!
북유럽쪽 부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마을이라는데 해안선도 아름답고 연중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도 이 곳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고 산책하며 사랑을 꽃피웠다나 뭐라나.....
그렇지만 결국 돈 많은 선박왕도 최후에는 홀로였고 자식들도 절명하는 등 완전한 행복은 없었으며, 미국인의 실망도 뒤로 한 채 오나시스와 결혼하여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재클린도 결국 이혼하고 한마디 했다지........
“나는 혼자였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이 정도 되믄 또 나의 병이 살짝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어요 증후군’
난 정말 복도 많고,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생을 누리고 있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근원도 모르는 자부심.......기타 등등......
발키자 해안을 지나기 전 버스가 잠시 섰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에게해는 눈이 시리게 푸르고 물이 맑아 멀리서도 바닥이 들여다보일 듯 한데 어라?! 저기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여?
자세히 보니 완전 누드로 일광욕하고 수영하는 남녀가 여러 명 보였다. 이 겨울 한복판 1월에 해수욕이라니......그것도 올 누드로......
부럽다 진정으로........나도 눈 딱 감고 함 뛰어들어 볼까? 어차피 보여줘도 보는 사람이 괴로운 몸매니 내가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은데......
3시 40분쯤 우리는 수니온 곶 주차장에 내렸다. 이곳에서는 포세이돈을 신전을 둘러보며 이름다운 에게해의 일몰을 감상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뭘 할까나? 딱 1개 있는 까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연인과 가족을 보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은순 언니와 둘이서 바닷가 쪽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로 하였다. 언제나 잡지에서 보면 가장 멋진 장면......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별 말없이 앉아 바깥 구경하다 심심하면 책도 보고 음악도 듣는 그런 평화로움을 흉내내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은 에게해가 정면으로 포세이돈 신전이 측면으로 보이는 명당 중 명당이 아닌가?
지나가는 석교장선생님 최교장선생님 김이사님까지 불러 그리스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다. 그리스 커피가 뭔지도 몰랐지만 하여간 가장 저렴하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한잔에 3유로 50센트, 5잔을 주문하니 봉사료까지 19유로 60센트였다. 이런 좋은 여행에 초대해 주신 석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내가 한턱 쏘았다.
작은 커피잔에 찌꺼기가 남은 채로 나오는 쓴 커피는 이름에 비해 맛은 별로였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커피 맛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 아름다운 바다와 바람 숭숭거리는 포세이돈 신전이 서로 마주보고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4시 50분, 4유로 짜리 입장 티켓을 내고 언덕으로 달음박질 쳤다. 포세이돈 신전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장관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면 남은 햇살이 사위기 전 인증샷을 찍어야 할 테니 말이다.
긴 쪽 기둥 9개, 짧은 쪽 기둥 4개짜리 포세이돈 신전은 터키와의 전쟁으로 왕창 부서져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 좀 어려웠지만 바다를 향해 용트림하는 듯한 기운만큼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웃나라 일본과 철천지 원수인 것처럼 그리스와 터키도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보다. 서로 침략하고 짓밟은 증거가 저리 선명하니 친하게 지낼래도 쯧쯧......안될테지.....내려 앉은 기둥마다 로마자로 새겨진 문화재 번호가 붉은 상처인 양 안타깝다.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이 파르테논에 비해 부실하게 보이는 이유는 신전의 기둥 굵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파르테논의 기둥은 줄무늬가 20개 짜리이고 포세이돈 신전은 줄무늬가 16개 짜리라고 한다.
또 각 기둥은 맷돌 같은 둥글고 짧은 돌을 포개어 쌓아 큰 기둥을 만들었는데 가운데가 비어 있거나 솟아나온 것이 있어 서로 끼워맞추는 형식으로 기둥을 완성하였다. 마치 블록 쌓기를 하는 것처럼......
복원이 끝나면 더욱 멋지고 아름답겠지만 지금의 포세이돈 신전은 허물어진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온갖 폼 다 내며 사진을 찍다 해가 수평선과 뽀뽀하려는 바로 그 때, 한쌍의 연인이 렌즈에 잡혔다. 살짝 기대 선 두 사람이 너무 애틋해서 계속 흘끔거리며 보는데 정말 이쁘게 너무 이쁘게 이마에 뽀뽀를 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아! 청춘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건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우째 한번 해볼건데....
에게해가 주황색, 다홍색, 자주색으로 붉게 타오르다 어둠에 잠길 무렵 우리는 수니온 언덕을 떠났다. 빈 바람만 놀다가는 포세이돈 신전은 유물 자체의 매력으로 말한다면 10만점에 6점 정도지만, 자연이 준 경이로운 선물로 10점 만점에 10점짜리로 완성되었다.
저녁은 아테네로 돌아와 아르세니스 식당에서 먹었다. 수불라끼라는 그리스 음식이었는데 식초와 올리브기름을 섞을 소스를 구운 돼지고기 목살 위에 뿌리고 감자튀김과 스파게티와 곁들여 먹는 것이었다. 평소 잡식성인 나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맛이었다. 후식으로 나온 빠나꼬따는 우유를 발효시킨 푸딩 같았는데 느끼한 치즈 맛이 강해 난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오늘 묶을 호텔은 별이 무려 5개짜리란다.
이름은 디나비아크로폴리스호텔.......
아크로폴리스 언덕 바로 아래 마을에 있는 구시가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특급 호텔들이 가지는 화려함 따위는 없었다. 아마도 이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아크로폴리스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겠지.
방을 배정 받고 은순언니랑 짐을 풀었다. 1년간 동학년을 하고 2년간 같은 학교에 근무해서인지는 몰리도 난 언니 앞에서 훌러덩 옷도 잘 갈아입고 무장 해제된 모습을 보이는 게 별로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과 인간이 오랜 우정을 나누려면 무엇보다 편안해야 하기에 난 누구에게나 편한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더러븐 성질머리가 교양과 이성이라는 긍정적 자아에 밀려서 깊숙이 숨어 있을 때 그렇겠지만 .......
오늘 하루도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그리스에서 첫밤 이제 눈을 붙여본다.
첫댓글 미미야, 잘 있지? 참 살 맛 나게 하는 열정의 아줌마 ! 재미있게 읽고 년말에 큰 아들과 함께 할 유럽 여행에 참고할게.
좋아~~~여행을 많이 해야 눈높이가 올라가고 수준도 향상된다 여행은 좋은 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