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고후1:8-11)
2026.7.19, 김상수 목사 (안흥교회)
만약 소형 트럭 위에 대형 트럭에나 실을 분량의 짐을 실었다면 어떻게 될까? 작은 배에 너무 많은 분량의 짐을 싣는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비틀거리면서 조금씩 움직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주저앉아서 물건이 부서지거나 가라앉고 말 것이다. 만약 차나 배가 아니고 짐승이나 사람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면 어떨까? 가히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라는 표현이 바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내리눌러서 압박을 당하는 상태'를 뜻한다. 얼마나 그 압박과 고통이 심했는지 이로 인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말했다(고후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8-9)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처럼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당한 시점이 예수님을 믿기 전이 아니고, 믿은 후였다. 그것도 사도로서 열심히 충성할 때였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극한 핍박과 돌에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죽었다가 살았다고 보기도 함) 이르렀지만, 신유의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이처럼 믿는 신자라 할지라도, 심지어 열심히 충성한 사역자나 직분자라 할지라도 갖가지 형태의 고난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천하의 사도 바울에게도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이 있었다면, 하물며 더 연약한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고난 중에서 믿음으로 이겨내는 영적인 힘을 말한다.
물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극한 고난을 당했지만, 우리들은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신앙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힘에 겹도록 무거운 삶의 짐들을 지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1인 몇 역’을 감당한다.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삶의 코너에 몰려서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은 때도 많다. 만약 "당신은 사형선고 받은 것 같았던 경험이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아마 이 질문에 크고 작은 사연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어찌 아버지의 희생뿐이겠는가? 어머니의 희생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분은 지금이 바로 그때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족 부양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힘들 수 있다. 또 어떤 분은 부모 부양에 대한 짐을 지고 있다. 또 어떤 분들은 바윗돌 같은 질병으로 인해 몸과 영혼이 신음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아가 버리고 싶은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고백했다(고후1:9).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사도 바울은 극한 고난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실제로 우리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능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자동으로 기도가 나오고, 자동으로 기도를 요청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고 하실까? 역으로 우리들은 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까?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 자신을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나)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체질이 얼마나 나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시편 103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모든 병을 고치시며, 풍부한 인자와 긍휼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나)의 체질과 인생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시103:1-18).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4-15)
만약 우리들이 독사 같은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좌절하고 비관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고난이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단련되어 가는 과정(process)’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영화 『신의 악단』을 통해 더 유명해진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이 있다. 이 찬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 신의 악단(광야을 지나면 찬양 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uvyA84FWDjw&t=15s
광야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같은 삶의 현장의 또 다른 표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의 인생자체가 광야이다. 종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요셉의 광야생활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사무엘의 모친인 한나는 극한 괴로움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다윗은 20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광야에서 쫓겨 다녔다.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겪었던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고 고백했던 고난의 현장이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광야였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주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마침내 복(유익)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3)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유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는 것같은, 코너에 몰리고 인생의 광야를 지나는 동안 나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지금 나를 부인하며 두 손을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자.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나를 위한 가장 용기 있는 결정이며, 진정으로 복된 생명의 길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