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학문과 경험을 통해 배우는 모든 것을 ‘앎’ 또는 ‘깨달음’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게 되는 모든 것. 인간은 그것을 통해 삶을 살아가며 바로 그것이 동물과는 다른 결정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참된 앎과 깨달음’을 근거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깊숙한 학문 연구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산다고는 하지만, 알고 깨달은 만큼 실천하는 삶을 살아내는 건 아니다. 앎과 깨달음을 근거로 진실하게 산다는 건 ‘몸소 행하는 바’가 수반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고 그의 삶을 높이 사는 것은 그가 깨달은 바, 곧 ‘하느님의 진리’를 전생애를 통해 몸소 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석가, 공자, 노자를 비롯하여 간디, 테레사 수녀, 마틴루터 킹 등은 앎을 체화해 낸 이들이기에 더없이 가치있는 진리를 전한다.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또한 그가 깨달은 바를 전생애를 통해 몸으로 살아냈던 이다. 아직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폭넓고 깊이 있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독특한 사상 체계를 펴낸 학자로서, 기독교 신앙을 다분히 한국적으로 풀어낸 신앙인으로서, 종교의 분파와 구분을 뛰어넘어 ‘참 진리’의 길을 고민한 사람으로서, 깊이 있는 사상과 철학과 신앙으로 함석헌, 김교신과 같은 훌륭한 선인들을 키워낸 선생으로서, 일제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한국인으로서 그는 역사의 한 장을 자리매김하였다. 이런 갖가지 수식어와 문장으로 그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는 단순하게 학자도, 철학자도, 사상가가 아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체화해 낸 한 사람의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상놈의 아들이오
1890년 제화 기술자인 부친 유명근과 모친 김완전 사이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영모는 어릴 적부터 일찍이 맹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첫 사상을 형성시켰다. 맹자를 통해 유교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유교적 사상의 기틀 위에 기독교를 놓게 됨으로 훗날 유교적 사상을 비롯한 불교, 도교와 같은 동양 종교와 기독교의 자연스러운 접목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영모가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이후 안창호,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의 우국지사들이 모이던 YMCA에 나라를 위한 연설을 듣기 위해 YMCA를 드나들면서였다. 그 곳에서 당시 YMCA총무 삼성(三醒)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1908년경 연동교회 성도들이 장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양반 신도와 천민 신도간의 다툼이 생겨,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반발, 묘동교회를 세웠다. 이에 유영모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머릿속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이는 훗날 유영모가 비정통주의적 신앙으로 가는 첫 사건이 되었다. 유영모는 성서가 밝히고 있는 ‘낮은 자의 진리’를 이미 밝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몇대조 할아버지 들추는 족보타령은 집어치워야 해요. 조상은 위대한데 내가 망국지종(亡國之種)이면 무얼해요.…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상민(常民)들이 많이 믿어 상놈의 종교라 하였어요. 이는 유교가 양반의 종교인데 대해서 한 말이지요. 참 종교는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해요. 종교가 귀족적이 되면 이미 영원한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라는 유영모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이처럼 유영모는 자신 스스로가 양반이 아닌 ‘상놈’의 아들임을 자처하였고, 종교인의 참된 자세가 ‘낮고 천해짐’에서 비롯됨을 익히 깨달았던 것이다.
비정통신앙―톨스토이, 간디와의 만남
유영모는 자신의 신앙을 일컬어 “비정통신앙”이라고 했다. 이는 지금도 종종 논의되듯이 유영모, 함석헌을 뭉뚱그려 ‘무교회주의자’로 말하는 것에 명확한 구분을 짓는다. 그의 비정통신앙의 근원은 톨스토이로부터 시작된다. 1910년에서 20년대는 한국의 지성계 전체에 톨스토이가 풍미되던 시기였고 했지만, 그것은 바로 유영모의 비정통신앙의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유영모는 오산학교에 재직하면서 톨스토이의 사상과 서적을 만나게 되었고, 22살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정통신앙의 허물을 벗고 비정통신앙의 길을 가는 유영모로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다석일지>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톨스토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비복음적 모습들과 교리를 버리고 자신의 신앙을 구축했던 톨스토이의 비정통적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외형상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와도 유사해 보이는 자신의 신앙적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찌무라라는 이는 일본의 종교사상가로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웠어요. 나와 톨스토이는 비정통입니다.”
이처럼 유영모는 교회의 정통신앙의 틀 안에서 스스로 밖으로 걸어나옴으로 그만의 독특한 신앙체계를 확립했고 그것은 교회라는 틀거리 속에서는 도저히 깨달아질 수 없는 ‘참 진리’를 향한 득도의 과정이자, 신앙의 참여였던 것이다
제나를 죽여야 얼나가 산다
유영모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사상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귀일(歸一)’이다. 바로 ‘하느님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나를 버리고 얼나를 깨닫는 것’. ‘제나’란 인간의 욕망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육체의 자신이며, 얼나라 함은 육체가 아닌 정신과 참된 자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얼나’를 유영모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이라 지칭했다. 따라서 우리가 제나의 온갖 욕망―특히 유영모는 인간의 식(食)과 색(色)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했다―들을 죽여야만 얼나를 만날 수 있으며, 인간의 삶 속에서 식과 색을 경계하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갈 때 우리 안에서 성령이신 얼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사람이란 태어나서 다른 것을 직접 간접으로 잡아먹고 짐승으로 살아왔다. 그 가운데 얼의 나를 깨달아 맘속을 밝혀 위(하느님)로 한없이 솟나려 함이 사람이 나아갈 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여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예수의 몸으로는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으며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속에 온 하느님의 성령이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석가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석가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석가 속에 온 법성(法性)이 부처라고 했다. 공자도 공자 속에 온 덕성(德性)이 바로 성인인 것이다. 유영모는 인간의 몸을 입고 행해지는 모든 욕망의 행위들을 짐승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죽이고 그 안에 감춰진 참된 ‘얼’을 찾는 것이 비로소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얼나를 찾는 것이 곧 바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은 인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요, 바로 짐승의 삶이라 여겼던 것이다.
일일일식(一日一食), 해혼(解婚)을 통한 금욕적 생활
유영모는 얼나를 찾기 위해 금욕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철저하게 몸으로 실천하였다. 1941년 2월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을 먹기 시작한 그는 1981년 2월3일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40년 동안 일일일식을 지켰다.
“안 먹으면 죽는다. 안 먹고 못사니까 먹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는다. 적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많이 먹고 배탈을 내서 고생을 한다.…사람이 안 먹으면 병이 없다.…이 육신은 물질이라 멸망하지만 건강하여 영원한 생명(얼나)을 받들면 꽤 부지해 간다. 어쨌든 위(하느님)에 쓴다면 이렇게 오래 간다.”
그의 이런 일일일식은 모두 그 에너지와 정력을 얼나를 향한 추구에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죄악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일일일식함으로 식욕을 죽였고 다음으로는 성욕을 죽임으로 얼나를 찾는데 그의 모든 것을 쏟고자 했다. 유영모는 1915년 9월 혼례를 올린 그의 부인 김효정과도 해혼하였다. 이혼(離婚)이 아니라 해혼(解婚)이라 함은 결혼을 끝냄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만 성생활을 하지 않고 오누이처럼 지냄을 의미하였다. 그는 “남녀관계가 인격이 빠져나가고 동물적인 욕정으로 떨어지면 사랑은 악의 근원이 된다. 서로 좋으면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면 사람의 존엄성은 깨져 사람은 향락주의의 찌꺼기가 된다”고 하면서 가능하면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된 것이 얼나를 찾아가는 나은 길임을 말하였다.
유영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저 위
유영모는 당시 추앙받던 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저 몇몇의 후학을 두고 자신의 깨달음과 사상에 근거한 신앙의 삶을 충실히 행했던 현자(賢者)였다. 그랬기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평가나 알려짐도 후대에서나 이뤄지게 됐던 것이다. 그의 제자였던 함석헌, 김교신 가깝게는 김흥호, 박영호 등은 유영모가 살아낸 ‘참 진리를 찾는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단순하게 기독교인이라거나 학자라거나, 사상가와 같은 하나의 수식어를 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낸 삶은 이 지면 위에 소개된 몇 가지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YMCA에서 35년 간 지도했던 고전 독서 모임이나 <성서조선>에 기고했던 많은 글들, 또 그의 정신을 이어 지금도 수도 공동체로서의 삶을 잇고 있는 동광원, 농사를 하는 것이 가장 참된 삶이라고 했던 그의 정신, 가장 한국적언 언어를 통해 진리를 말했던 그의 모습 등 그의 삶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들이 소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의 행보를 하나하나 짚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영모가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정신, 그 하나만을 우리 가슴 속에 깨닫는 것이 더욱 값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으려고 하라. 숨으면 숨을수록 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동서고금의 종교·철학·사상을 꿰뚫었던 다석 유영모. 그는 그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고 얼나를 깨달음으로써 찾게 될 참나,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한 생명으로 통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 위의 하느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多夕 유영모 선생의 주 기도문
정중규추천 0조회 15804.01.18 11:3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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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 임 생각이니이다.
이에 숨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옵고, 진 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지이다.
우리가 이제 땅에 부닥친 몸이 되었사오나, 오히려 임을 따라 우우로 솟아 나갈 줄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셨사오니, 우리의 오늘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먹히워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꾸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시고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이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 말 삶에 들어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된 것과 같이 저희들에게서도 이루어 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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