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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1) 위기의 시대
무너져가는 ‘집’을 어떻게 복구해 나갈 것인가
교회는 숱한 역사의 험난한 파고들을 극복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5∼6세기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던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몰락했을 때, 교회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베네딕토 성인(480∼547)이 세운 수도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교회 영성과 서유럽 문화 진흥에 기여함으로써 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이어진 ‘역사의 어둔 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12∼13세기에 중세 교회는 농경사회에서 상업의 부흥기로 접어들면서 물질적인 풍요로 잠식되는 위기를 겪었다. 이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무너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철저히 따르는 생활로서 교회 정신을 쇄신했다. 14∼16세기에는 유럽사회의 흑사병 창궐과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분열되어 나갈 때, 교회 교도권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쇄신하였고,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개혁과 쇄신으로 이 위기를 돌파했다.
19∼20세기에 개최된 1, 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두 번의 공의회는 무신론과 세속화의 위기, 현대 사회 적응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이렇게 위기 때마다 교회는 수도회 운동, 성인들의 출현, 교회 공의회 개최 등을 통해 수많은 위기에 대처해 왔다. 오늘날 후기 산업사회를 맞이하면서 교회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구 환경의 위기, 인간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집단적인 우울 현상, 가정의 해체와 공동체의 와해 등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예컨대, 핵심적인 관계의 위기, 즉 하느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015년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다. 교황은 모든 생명체의 ‘공동의 집’인 지구가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아파하면서 ‘공동의 집’이 무너져 내리는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 회칙에서 인간의 오만과 탐욕, 약탈적인 태도들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공동의 집인 지구를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며 회개와 올바른 행동을 촉구했다. 신음하는 지구에 대한 교황님의 우려는 올해 6월 캐나다 남서부 지역에서 기후 관측 이래 49.5℃라는 최고 기온을 기록하여 현재 우리 앞에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정체성의 위기도 겪는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올바른 정체성이 결여되다 보니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연결되지 못하고 부표처럼 떠다니는 삶을 산다. 인간 정체성 위기의 대표적 현상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베풀어지는 은총과 축복을 느끼지 못해 드러나는 불만족한 삶, 우울한 삶이다. 우리 사회는 현재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울증의 대표적인 세 가지 현상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첫째로 중독현상으로 드러난다. 감정적인 허전함과 공허감을 채울 수 있는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중독현상이다. 물질적 대상에 명예나 헛된 권력이나 쾌락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우울증은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타인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이나 정신적인 학대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공격성은 도를 넘고 있다. 세 번째로 우울증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자신을 공격하는 극단적인 현상이 바로 자살이다. 자살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또한 우리 사회는 공동체의 와해 위기를 겪고 있다. 이혼 가정과 결손가정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으며, 비혼주의 문화 확산과 전통적인 가정 개념의 훼손은 한 인간이 부모의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성장할 가능성이 점점 줄고 있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잃고 심리적으로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다. 새로운 도시의 아파트 주거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아파트 문화는 관계성이 결여된 군집 생활일 뿐이다. 오늘날 공동체의 문제는 관계성의 상실뿐 아니라 사회적인 취약 계층들을 한계 상황으로 내모는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왜곡된 분배구조는 사회적인 불평등 및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공동체 문제와 관련하여 2020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을 기념해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반포했다. 이 회칙의 부제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on fraternity and social friendship)’이다. 이 회칙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중심에 놓고 사회적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공동체 의식을 되살려야 함과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 대한 고민, 공익에 봉사하는 리더십(정치)이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 정체성의 위기, 사회 공동체의 위기, 지구 환경의 위기는 인간의 생존과 인간성의 완성에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터전의 위기, 즉 ‘집’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무너져가는 집을 어떻게 복구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가 시급히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핵심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2)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 ①
탄소 배출만 줄이면 생태계 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근자에 교황직에 오른 세 교황(성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은 여러 회칙들을 반포해 후기 산업사회가 직면한 문명의 위기들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해법을 제시해 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잇따라 발표한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모든 형제들」 회칙을 통해 필자가 전술했던 세 가지 위기, 즉 인간 정체성의 위기, 사회 공동체의 위기,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삼 생태론’
이 시대의 위기에 해법을 제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독특한 관점은 ‘집’이라는 차원에서, 지구환경과 인간 정체성과 사회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집’이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휴식을 제공하는 거처이다. 그토록 소중한 ‘집’이 처하게 된 위기란 나, 우리,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이 있어 관심을 두고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이런 면에서 교황은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시켜 주었다. 교황이 언급한 ‘집’의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그 신학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인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배필로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이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집을 창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세 가지 차원의 창조를 ‘삼 생태론(Ecology)’ 즉,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인간 생태’, 인간 공동체의 ‘사회생태’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을 포괄하는 ‘환경생태’란 개념으로 말한다.
‘생태론’이란 영어로 Ecology인데, 이것은 희랍어 Oikos(Eco) + Logos(logy)의 합성어로, 어원적으로 ‘집에 대한 질서’, ‘집에 대한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Oikos(오이코스)는 ‘집’이란 뜻이며 Logos(로고스)는 의미, 질서 원리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서양어의 생태론(Ecology)이란 용어에는 이미 ‘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함돼 있다. 즉 생태론의 어원적인 의미는 집에 대한 질서인데, 이것을 창세기에 적용하면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의미론적으로 이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질서’, 즉 ‘삼 생태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첫째 인간 생태에서 영과 육으로 이뤄진 단일한 존재, 육화된 영인 인간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성스러운 집’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함은 인간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하느님의 모상’, 곧 ‘하느님의 집’임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간추린 교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한 인격체이므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을 얻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109항) 이런 관계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는 집’이며, 하느님을 드러내는 모상이다.
둘째, 사회 생태에서 인간 공동체는 ‘상생의 집’이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창세 2,18)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홀로 두시지 않고 서로 관계를 이루도록 배려하셨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그것은 단순히 개체나 무리의 집합소가 아니라 인격을 주고받으며 그 목적을 완수할 수 있도록 서로 보호하고 상생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터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목적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생의 집이 되어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환경 생태’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어울려 서로 조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공동의 집’을 의미한다. 창세기 첫 구절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함은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에게 ‘터전으로서의 집’을 마련해 주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창세기에서 말하는 창조의 핵심은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터전 그리고 관계로 이루어진 집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질서
이러한 삼 생태론을 기반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질서’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통합생태론’을 주창했다. 교황의 통합생태론적인 관점은 오늘날 전개되는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사고에 근거해 지구 환경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단견적이고 제한적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한 사고에 의하면 지구 환경의 문제는 단지 탄소 배출만 줄이고, 환경오염적 요소만 제거한다면 곧바로 생태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의 집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탐욕과 사회적 빈부격차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무분별한 개발이 중지될 수 없고, 결국 환경오염이란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 시대의 위기 극복의 방향은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질서’와 이 ‘집’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되새기는 데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3)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 ②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지난 연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창한 ‘통합생태론’을 깊이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의미론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창조로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집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생태’, 인간 공동체의 ‘사회생태’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는 ‘환경생태’, 이 세 가지 차원의 집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임시로 분양받아 살아가고 있다.
임시 분양받아 살아가는 세가지 차원의 집
이를 전제로, 인간은 오늘날의 인간과 공동체, 생태계 위기를 바라보아야 하며 이에 관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각기 자신의 목적과 가치에 부합하도록 그리고 잘 유지되고 고양되도록 세 가지 차원의 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명을 내리셨다. 이와 관련해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여기서 ‘에덴을 잘 돌보라’는 뜻은 하느님의 집으로써 ‘인간 생태’, 공동체 상생의 집으로써 ‘사회생태’는 물론, 이를 떠받치는 토대로써 모든 생명체의 공동의 집인 ‘환경생태’까지도 인간이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내리신 돌봄의 사명은 각각의 집의 목적에 맞게 그리고 그것을 통합적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창조 목적에 맞게 유지, 보호되도록 힘쓰라고 주문하신 것이다.
또한 집을 잘 돌보라는 사명은 ‘Economy(경제)’라는 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Economy(경제)라는 말의 어원은 희랍어 Oikos (Eco) + Nomos(nomy)의 합성어로 ‘원리’나 ‘질서’에 따라 ‘집을 돌본다’는 뜻이다. 즉 서양어 경제(Economy)란 용어에는 생태론(Ecology)이란 용어가 그렇듯이, 이미 ‘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함돼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Economy)와 생태론(Ecology)이란 용어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은 어원적으로 집을 돌보는 것, 곧 ‘경제’(Economy)라고 할 수 있다. 단, 집을 돌보라는 사명이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나 탐욕에 의해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집들의 질서’인 통합생태론(Integral Ecology)에 따라 돌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돌본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경제(경륜)’(경제(Economy)라는 용어를 교회에서는 주로 ‘경륜’으로 번역한다)를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부여받은 사명, 즉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하느님의 경륜(경제)’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창세기 3-4장에서 인간은 자기 범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을 외면함으로써 집들이 무너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실 때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다. 또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라고 물었을 때,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반발한다. 이때부터 이미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질서 구상(Ecology: 생태론)에 따른 하느님 집의 돌봄이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어기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음에도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계약을 통해(창세 9,9) 훼손된 관계와 붕괴한 집들을 복구(구원)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업적을 ‘하느님의 구원 경륜(경제, Economy of Salvation)’이라 일컫는다.
성경의 신약과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역사, 즉 하느님께서 무너진 집을 바로 일으켜 세우시려는 복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무너진 집을 복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십계명’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외아들마저 이 세상에 내어 놓으셨다.(요한 3,16)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은 나머지 “하느님의 집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또다시 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후기 산업시대를 맞아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의 위기, 사회 공동체의 위기, 지구환경의 위기의 가속화에 봉착하였다.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론’에 기초를 두고,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 즉 ‘하느님의 경제(경륜)’을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오만한 생각으로, 같은 인간에게 하느님 창조질서에 어긋난 행위를 자행하거나, 물질문명에 함몰된 나머지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무한 경쟁체제만을 추구하거나, 생태계를 무분별하게 개발하려는 시도 등은 모두 하느님의 경륜(경제)에 어긋난다고 하겠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 경륜(경제)’에 힘입어 온갖 죄로 물든 우리 ‘인간성’이 먼저 치유되고 복구되어야 한다.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4) 하느님의 구원경륜 ① 인간의 정체성 회복
무너진 ‘하느님의 집’ 복구는 인간 정체성 회복에서 시작
지난 연재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무너진 집에 대한 복구는 우선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서 영과 육을 잘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의 정체성이 회복돼야 하느님의 집이 복구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사회 공동체가 상생의 집이 될 수 있도록 돌보는 사명과 지구환경이 훼손되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그 안에서 건강하게 번성할 수 있는 집(생태계)이 되도록 돌보는 사명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정체성은 한 인격체로 살아가게 하는 핵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 가지 차원의 집에서 가장 중요하고 토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집’으로서 인간생태이다. 따라서 무너진 집에 대한 복구는 인간생태의 복구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생태를 어떻게 복구해 나갈 것인가? 이에 대한 해법은 인간의 정체성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나는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간다. 요컨대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인간의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거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한 인격체로서 바로 설 수 없다. 우리에게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은 생명체의 최소단위인 세포에서의 핵이 기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한 인격체로 살아가게 하는 핵심이다.
참다운 정체성 형성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짧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아기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물었다. “엄마, 나 호랑이 맞아?” 아기 호랑이의 물음에 엄마 호랑이가 “너는 호랑이가 맞다”라고 대답하지만 아기 호랑이는 확신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을 떠나 코끼리 아저씨, 염소 할아버지, 곰 아주머니 등을 만나며, 자기가 호랑이가 맞느냐고 묻는다.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자, 비로소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고, 기뻐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저 멀리서 엄마 호랑이가 보였다. 아기 호랑이는 엄마 호랑이에게 달려가면서 “엄마, 드디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요!” 하고 소리치며 엄마 호랑이 품에 달려와 안겼다. 그때 엄마 호랑이가 아기 호랑이를 반기며 “장하다, 내 강아지!” 하고 아기 호랑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말에 아기 호랑이는 그만 다시 자기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아이고, 내가 호랑이가 아니라 강아지란 말인가!’라고 되뇌며 절망에 빠져 가출했다는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란 타인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 자신도 아직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 부초처럼 떠다니는 인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좌표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내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성을 결정짓고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요즘 온 세계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감염체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자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안에 ‘세포의 핵’과 같이 우리 존재의 근원과 구심점에 대한 확고한 자각 없이는, 우리는 핵 없는 바이러스처럼 생명체가 못되고 이리저리 숙주를 찾아 떠돌면서 한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기생하며 해를 끼치며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참된 정체성 드러나
평소 생명살이를 하는 모든 존재의 이름이 그 존재와 어울리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은 “꽃”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 시가 암시하는 바를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겠다
“하느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느님께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심으로써 비로소 우주 만물에서 참으로 색다른 생명체인 인간 존재로서의 나의 참다운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무한한 자존감으로 충만해진다. 여기에서 자존감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어떤 지위가 있기 때문에 즉 자기 욕구가 채워져서 얻어지는 자존감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놀라움에서 비롯된 자존감이요, 무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존감이다. 이러한 내적 자존감으로 충만해져야 외적인 것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나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는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진실한 모습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뎌내며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본인에게 부여된 사명과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참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토대이며 성경에서 말하듯이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소년 예수님께서도 열두 살 때, 성전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았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