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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고뇌, 깨달음의 혜안
- 『수필시대』 9,10월호를 읽고 -
권대근
(수필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인간은 흔히 자신의 현재적 삶이 충족된 상태로 여기기보다는 무언가 결핍된 상태로 여기며 사는 수가 많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신에게는 무언가 결핍된 것들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흔한 것이다. 또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만족, 슬픔, 소외감, 허전함, 결핍감이나 욕망의 갈증 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결핍의 인식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가슴 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날카로운 촉수가 되어 이전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쓰게 만들어준다. 창작은 이런 결핍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나 예술적 실존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한 트릴링의 말과 쾌락을 거부하고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 있다고 한 프로이트의 지적을 토대로 살펴 볼 때, '궁'의 상황이 보다
나은 예술 창작의 충분조건이 된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은 인간 내부의 두 개 자아를 일치시켜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실의나 좌절감은 작가 내부에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괴리감을 인식시키고, 이로 인해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상실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갈망도 커지는 것이니,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김상미, 김이경, 김인자, 하재준, 한인자의 수필 창작 과정 또한 이러한 내적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II.
김상미의 <앵강만에 시간을 부려놓다>는 '삶'의 무상성을 ‘바다’란 제재에 빗대 풀어내고 있는 철학성이 짙은 수필이다. 주제에 대한 상상화가 발단부에 잘 서술되어 있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른바 eye-catching 수필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산다는 것은 파도 같은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발단부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 삶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는 것이란 의미로 다가온다. 바다를 보고 서포의 삶에 견주어 내린 고단한 인생살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다. 분노를 예술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서포의 문학이다. 주제와 제재와의 상관성에서 수필의 성공이 결정된다고 볼 때, 이 수필은 대상이 되는 삶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제재에서 적절한 유사성을 찾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작가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남해 앵강만의 파랗고 아득하게 빛나는 바다 위를 피터펜의 팅커벨처럼 날개를 달고 나는 꿈을 꾸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서포가 유배 생활을 했던 노도의 사람들은 서포를 ‘묵고놀자할배’라고 불렀다고 소개하는 삽화가 이 글의 주제를 암시하는 주요한 포인트가 되어 글쓴이의 의도를 내재화하는 역할을 한다.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맞은 그는 3년간의 유배생활에 지친 인생을 남해바다에서 마감하였다”라고 적은 뒤, 작가는 “그의 흔적은 우리에게 ‘삶은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는 의미부여를 통해 삶의 진정성에 무게를 둔다. 작가는 바다가 던지는 질문 앞에서 침묵하며, 과연 가치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묵언으로 말해주고 있다.
서포 김만중의 삶에서 힌트를 얻어 그 해답을 찾으면, 이 글은 마무리되는데, 작가는 종지부를 찍기 전에 다시 힌트 하나를 더 건넨다.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앵강만에게 친구 한 명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어떤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는 마지막 멘트가 그것이다. 수필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심미감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정서를 객관화하는 작가의 형상력과 구성력에 박수를 보낸다. 문학성 차원에서 연상과 상상의 힘으로 내면의 주제를 재구성하도록 유도하는 작가의 노력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작가는 “한때 내 마음 속에도 푸른 바다가 있었다. 어느 날 돛단배 한 척이 들어와 항구에 정박하였고, 내 바다는 한 번 깊게 출렁거렸다. 돛단배가 정박한 이후 더 이상 설레임이 없는 앵강만처럼, 잔잔한 바다로 남아 있다.”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듯 말함으로써 바다 앞에서의 자기 성찰을 통해 동일성에의 추구로 나아간다. 동화의 원리와 반성적 성찰로 주제의식을 상상화한 것이 이 작품의 문학성을 드높였다. 형상미학의 구축으로 수필의 품격을 확보한 점도 좋았다.
김이경의 <폐가>는 인터넷 세상의 문제점을 정조준하고 있는 모던 스타일의 수필이다. 수필의 과거 회고적인 성격에서 빗겨나 현대적인 시공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어, 이 수필 또한 눈길을 끈다. 인체를 영혼과 육체의 조합이란 이원적 구조로 볼 때, 우리가 짓고 사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영혼이 없는 육체와 무엇이 다를까. 이 작품의 출발점은 이런 근원적인 문제 제기에 서 있다. 이날로지 수법을 이용해 문학의 맛을 주려는 시도가 좋았다.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놓았으나 관리가 잘 안 된 카페들을 작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에 견주고 있다. 스팸성 광고들로 채워진 카페를 보며 인터넷 세상의 폐해를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공감을 자아낸다. ‘노골적인 음란성 광고로 도배된 게시판’을 보고, ‘키가 넘도록 자란 잡초에 둘러싸인 묘지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 도망치듯 빠져나온 적이 있다’는 경험의 진술은 싱싱한 손맛을 전해준다. ‘쑥대밭이 되어 도둑고양이가 들락거리고 더러는 여우 울음소리마저 들리던 흉가처럼 이 집 또한 당분간은 사이버잡초가 우거진 채 남아있으리라’는 말로 사이버 인터넷 세상의 문제를 잘 구체화하는 묘사력도 놀랄만하다.
이 작품은 인터넷 세상의 어두운 한 단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소재면에서 참신하다. 인터넷 블로그, 카페, 홈페이지 등은 모임의 장소가 되고, 소통의 장이 된다. 지식과 정보와 기억의 창고가 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그것들은 사이버와 현실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 되고 길이 된다는 것이 작가가 인터넷 세상에 대해 가지는 긍정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측면보다 어두운 면이 더욱 더 부각되고 있는 인터넷 현실을 작가는 조목조목 지적하며 사이버 세상의 폐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수필은 사람들의 생각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언어를 통해 솔직하게 재현함으로써 그 가치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명할 때,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은 사이버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무엇이 진실로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작가는 짓기만 지어놓고 관리하지 않아 흉가처럼 변한 사이버 상의 카페들,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놓고 회수하지 않아 우주 공간을 목적 없이 떠돌고 있는 버려진 인공위성 등을 ‘폐가’와 마찬가지로 인식한다. 이런 인식을 제시하며 무엇이 인간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게 이 작품에 내재된 의미화다. ‘만금을 들여 쏘아올린 것들이라 해도 버려지고 잊혀진 다음에는 한낱 우주의 쓰레기일 뿐이 아닌가’하는 생의 성찰을 통해 우리 삶에 있어서 ‘영혼’의 중요성을 전하고, 생의 유한성에 기대어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현실적이고도 철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매우 공감을 자아내는 수필이다.
김인자의 <적과의 동침>은 불가사의한 여성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수필이다.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불가지론과 동병상련의 사상이 동시에 깔려 있다. 수필의 발단은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문병을 가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된다. 옆 병상의 K할머니를 동생인 듯한 어느 한 분이 세심하게 간호를 하고 있는데, 이 두 분의 관계가 놀랍게도 자매가 아닌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처와 작은댁이었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적과의 호의적 관계를 통해 갈등과 화해의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주목을 끈다. 문학을 미적 구도로 볼 때, 수필은 화해의 미학을 지향하는 글이다. 작가는 이 글의 전개부 말미에 가서 “한 남자를 공유한 두 할머니. 어느 한 분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적과의 동침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기대로 앙숙이 되어야 할 관계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갈등을 화합으로 연소시켜내고 있어 인간적인 감동을 창출한다. 젊어서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밤마다 베게머리를 적시며 상대를 증오했지만 증오도 애증도 모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빛바랜 창호지처럼 되어 버렸다는 작가의 지적처럼 가슴을 열고 지금은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는지 상대의 지팡이가 되어서 의지하며 동침하는 사이가 된 두 할머니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하는 글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증오를 용서로 승화시켜내면서 화해의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 수필적 삶의 원형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간과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출생의 비밀이 드러남으로써 기른 정과 배 다른 자식 간의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작품화한 데 있다. 자식이 없는 집에 들어온 작은댁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고, 동생까지 보았던 것이다. 자식들은 모두 본부인에게 입적이 되어 친자식으로 키워졌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아이들이 한창 사춘기 때 집안의 어른이 술기운에 무심히 뱉은,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데 무에 그리 정성을 다하느냐”는 말에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 이들의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을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주듯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해석이 긴장감을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도 '궁'의 상황은 계속되어 결핍을 회복하려는 갈망이 나타나고 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제때 용서를 구하지 못했으니, 여기에 갈등이 생기고, 이 갈등은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대상에 투사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다. '죽기 전까지는 재산은 가지고 있어야 안 그러면 구박 받는다'는 현대적 삶에 있어서 자식과 부모와의 모순된 관계 양상에 대한 모종의 암시가 눈길을 끈다. 혈연적 관계의 진정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자식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사이’라는 결론이 씁쓸함과 동시에 청량감을 준다. 두 분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며 피해자였다는 진술을 통해 작가는 이 수필을 여성문제의식 수필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두 사람의 화해를 통해 인생사는 결코 어둠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말해 주는 점이 좋았다. 상실감의 회복, 그것이 바로 수필적 삶이다.
하재준의 <눈부신 아침>은 일종의 자성수필이다. 수필이 자기 성찰의 결과로 인해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한다면, 이런 성격에 잘 부합하는 수필이다. 진실하면서도 소박한 자기 고백이 작은 감동을 주어 비평 대상작으로 선했다. 아침을 눈부시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궁’의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인 것이다. 문학은 전체성의 범주에서 보면 현실을 일깨우는 작은 충격이어야 한다. 수필의 출발은 작지만 큰 발견이고 인식이어야 한다면, 하재준 작가의 수필은 그런 측면에서 자기 성찰의 발견과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이다. 작가는 전개부로 오면서 병마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새 삶을 건진 경험을 담담히 적고 있다. 죽음의 문 앞에서 자식들에게 삶이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 <허락받은 시간>이란 수필을 썼다. 이 이야기는 감동의 가능성을 이미 열어 놓았다고 하겠다. 드킨시의 말대로 훌륭한 문학 작품은 작가 자신을 감동시킬 힘을 가져야 하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재준은 우선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송두리 채 내보이고자 하는 마음 비우기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목숨을 가진 사람들을 가랑잎 같은 존재로 보는 데 동의한다. 삶과 죽음의 극단적인 틈바구니에 처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필의 가장 감동적인 요소는 처절한 자기반성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는 ‘그간 나는 그저 목숨의 본존을 위하여 그리고 나름대로 풍부한 물질을 모아 편안하게 사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질사관에 매몰된 평범한 속물 인간이었다는 고백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작가는 사월의 눈부신 아침에 꽃을 보며, 태어날 때부터 엄숙하고 경건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왔음에 대해 통렬히 자책한다. 고난을 이겨낸 장엄한 꽃들에 견주어 주제의식을 건져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작가의 가슴에 진실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평범하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크나큰 감동을 준다. 다시 건강을 되찾아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작가에게 더욱 건강하기를 빌어본다.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험했던 그 ‘궁’의 상황을 문학화하여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주려하는 게 작가의 의도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켠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생활 속에 여과시켜 반성과 성찰의 삶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한인자의 <아름다운 손>은 고운 손과 아름다운 손이 대비 구도로 설정되면서, 삶과 존재 가치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 수필이다. 자라르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주체의 욕망은 주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욕망보다는 대상과 중개자 서로간의 상관 관계에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 중개자는 주체가 상대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제를 간접화하는 것이다. 한인자의 ‘아름다운 손’은 그 대립항으로 설정된 ‘고운 손’과 대비되어 주제 구체화되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에 크게 성공한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아름다운 손으로 규정한 성자 슈바이처, 마더 데레사 수녀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어느 수녀, 고아를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기른 두 분의 비구니 스님 이야기도 모두 주제를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어 공감을 준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적은 할아버지의 손 또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데 매우 적절했던 화소들이다. 대상에 밀착하는 한인자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눈길은 만나는 또는 만나지는 모든 사물과 현실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경험 속의 직간접 체험들을 설득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면서 수필의 뼈대를 만들어가는 성실함이 돋보인다.
귀납적 사고로 풀어가는 논리 정연한 수필이라 읽는 맛도 있다. 예시를 먼저 보여준 다음 자기 자신을 반성대 위에 놓고 주제를 어루만지는 자세에서 겸허한 수필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로지 나와 남편, 그리고 내 아이들만을 위해 일한 내 손은 어떤 손인가. 곱다고 부러워하는 내 손은 남을 위해 거칠어진 아름다운 손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손이다’라는 겸허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독자는 훈훈한 작가의 인격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성찰의 서정이 넘치는 글이다. 본격수필은 결말에서 제재가 주제를 의미화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지라르가 말했던 결말의 극치를 주제와 제재의 '상관화'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 수필은 평범한 소재이지만 나름대로 자료를 많이 모으고 선택된 제재를 통해 주제의 내면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미적 구조로서 문학은 미적 감동의 창출이 필수적이다. 수필이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문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손’이라는 제재 앞에 대립되는 에피쎄트를 놓아 주제를 구체화한 점, 그리고 자기 삶을 고백으로 용해해서 주제 의미화를 이룬 점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III.
어느 시인은 "한 줄의 글을 쓰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요,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피를 말리는 아픔"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글다운 글을 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
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도 너무 쉽게 글을 쓰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한 줄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깊이 고뇌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쉽게 글을 쓰는 것이다. 좋은 글, 수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참된 고뇌가 필요하다. 특히 진정한 수필은 참된 고뇌로부터 탄생되어진다. 참된 고뇌란 자아에 대한 각성이요, 삶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또한 인생과 인간 존재에 대한 재발견이며, 새로운 의미의 추구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에 대한 의식 있는 자의 '보이지 않는다'의 눈이요, '말하지 않는다'의 입이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아픔의 공유이다. 특히 작가로서의 고뇌는 그것이 단순한 고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식과의 끊임없는 싸움, 우리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처절한 갈등과 아픔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과 진실을 깨닫고, 현실의 이면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아울러 고뇌를 통한 정직한 자기 노출이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남정욱의 <영각 소리>, 심선경의 <소심한 복수 대행업체>, 연봉화의 <꽃 심표>, 이진영의 <맛있는 나이를 먹고 싶다> 등은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충분히 좋은 수필이나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했다. 윤오영은 글을 읽고 나서 이 글이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나, 어떤 정서를 안겨 주었나, 어떤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었나,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겼나 생각해 봐서 하나도 뚜렷한 것이 없으면 그 글은 읽지 말라고 했다. "문학을 독자에게 주는 효과만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감정의 오류'에 빠진다"고 한 버즈레이나 윔세트의 말을 전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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