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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에 넣고 흔든 화이트 럼, 파인애플 주스, 코코넛 밀크에 파인애플 슬라이스 한 조각.
그녀는 나와 닮은 칵테일을 물었을 때 피나콜라다라 답했다.
달콤한 코코넛 향과 럼의 은은함이 내가 그녀를 바라볼 때의 애정 어린 눈빛과 어울린다나. 처음 칵테일이라는 것을 마셔본 이후로 거의 3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바에서 피나콜라다를 주문해본 적이 있던지 떠올리면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떤 칵테일을 마실지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양 적고 도수 높은 술을 선호하기에, 달달한 주스 느낌의 피나콜라다는 내 선택지에서 한참 뒤로 밀리고는 했다.
물론 그녀 역시 나의 술 취향을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당신이 좋아하는 건 아마 베르무트를 보며 진을 샷으로 마시는 처칠 식 마티니일 거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긴 내가 좋아하는 것과 닮아있는 것은 다른 개념이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역시 나를 이렇게 달달한 칵테일에 비유하는 건 그녀가 내 연인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 우리는 무성 영화와 재즈며 팝이 흘러나오는 칵테일 바에 갔다. 첫 번째로 고른 메뉴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와 예거 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던 날이지만 그 시점의 분위기와 감각만은 아직까지 선명히 남아있다. 고개를 숙인 채 빨대로 술을 마시는 맞은편의 귀여운 사람을 보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분명 생각만 했는데 내면의 욕구가 빤히 들여다보였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나른해진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기엔 테이블이 너무 넓네요, 라는 말을 했던 걸 보면.
앞으로도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마실 때마다 떠오를 것이다.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시선을 떼지 못했던 긴 팔 검은 셔츠라든가, 테이블 바로 위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던 베이스가 너무 큰 재즈 음악이라든가, 웃을 때 눈이 사라짐과 동시에 길어지는 눈 꼬리 같은 것들 말이다.
고작 칵테일 한 잔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겼다.
가벼운 기억이라 하기엔 중요하고, 추억이라 이름 붙이기엔 괜히 머쓱하게 웃음 짓게 되는 그런 것들.
우리는 만나면 종종 술을 마셨고, 그녀는 나와 칵테일 바에 가면 진토닉을 주문하곤 했다.
진토닉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더 잘 어울리는 건 역시 블랙러시안이다. 꽤 높은 도수에 진한 커피향. 도시적이고 지적인, 그러면서도 매혹적이고 강렬한 검은색 술. 하지만 이건 독립적으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일방적인 시선이다.
연인으로서의 그녀는 깔루아밀크에 더 가깝다. 부드럽고, 달고, 옅은 커피색 술에 폭신한 우유거품이 잔뜩 올라간. 누구라도 그 섬세하고 포근한 눈빛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독차지하고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저 욕심이다. 남들에게는 블랙러시안으로 보이더라도 내게는 깔루아밀크였으면 좋겠다는, 어쩌면 독점욕으로 보일 이기적인 마음.
연인을 칵테일에 비유하는 게 웃길 수도 있겠지만, 내게 칵테일의 의미를 정의하라 한다면 달콤함에 취하는 것이라 할 터이다. 그녀는 속절없이 나를 사랑에 취하게 하는 사람이고, 이미 정신을 차리기에는 늦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또한 그녀에게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안식의 술잔이 될 수 있길 바라는 것뿐이다.
우리의 취기가 오래도록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저 당신에게 취해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