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익는 일 / 이다연
복숭아는 꽃이었던 시간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가지 끝에서 바람을 견디며
비에 젖은 날과 햇빛이 지나간 날을
조용히 과육 속에 겹쳐 두었다가,
여름 한가운데서야 비로소 향기로 대답한다.
사람들은 붉어진 껍질만 보고
잘 익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가장 오래 익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안쪽이다.
단단한 씨앗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과육만이 제 몸을 풀어 계절을 설명한다.
칼을 대는 순간
복숭아는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숨겨 두었던 시간을 펼쳐 보인다.
손끝을 적시는 과즙은 달콤하지만,
그 맛에는 오래 견딘 침묵이 먼저 녹아 있다.
먹고 난 자리에는
씨앗 하나와 옅은 향기만 남는다.
사라진 줄 알았던 여름은
버려지지 않은 그 단단한 중심에서
다음 계절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무언가를 잃는 일이 아니라,
한 계절을 내 안으로 옮겨 심는 일이라고 믿는다.
해마다 여름이 돌아오는 것은
나무 때문이 아니라 기억이 다시 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8회 복숭아 문학상 발표
26 수필부문 선정작 및 심사평.hwp117.50KB26 시부문 선정작및 심사평.hwp106.50KB제18회 장호원 복숭아 문학상에 응모해주신 문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다음과 같이 수장자를 발표합니다. 대상 수필 이윤경 - 복숭아 씨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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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복사꽃 책 / 김명래
\우리 집에는 봄을 꽂아 두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하면 할아버지는 흙에 닿기 전 꽃잎 하나를 주웠습니다
바람의 온도가 채 가시지 않은 꽃잎은 책장 사이에 오래 눕곤 했습니다
복숭아는 해마다 꽃을 피웠고 책은 해마다 한 장씩 두꺼워졌습니다
가뭄이 심했던 봄날
늦서리가 꽃잎을 훑고 간 봄날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 꽃보다 더 많이 솎아내던 봄날
처음 내가 꽃잎 하나를 주워 방긋 웃던 봄날
책에는 꽃보다 계절이 더 많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어떤 페이지는 빛이 바랜 꽃잎 하나만으로도 한 철을 끝까지 기억했습니다
햇볕보다 기다림을 오래 품은 꽃잎이 있었고
주름진 손끝이 오래 머물렀던 꽃잎도 있었습니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눌린 꽃잎에서는 그해의 바람이 먼저 일어났고
뒤이어 비가 지나가고 햇빛이 저녁연기처럼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책 한 장을 넘기듯 지난 농사를 더듬었습니다
꽃은 나무에서 지고 사람은 기억에서 늙어 갔지만
그 책만은 해마다 한 철을 받아 적으며 봄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흙에 닿기 전 꽃잎 하나를 주워
아직 끝나지 않은 봄을
그 책의 다음 페이지에 꽂아 둘 차례입니다
[우수상] 화인(火印)을 새기는 나무 / 윤상화
복숭아나무는 해마다 봄을 태워
몸속에 화인 하나씩 새긴다.
장호원 뒷산, 노을이 먼저 눕는 비탈을 넘어온 바람은
꽃잎마다 연분홍 결을 새기고,
나무는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잊고 간 무늬를 먼저 새겨 올린다.
별 하나 내려앉는 밤,
옹이 깊은 곳에서 깨어난 불씨는
나이테를 한 바퀴 돌아
아직 세상에 없는 봄의 결까지 품는다.
청미천 물안개가 백사 들녘을 건너와
가지 끝을 적시면
햇살은 잎맥마다 초록 숨결을 돋우고,
보이지 않는 화인은
심재(心材) 깊숙이
나무만 아는 침묵의 언어가 된다.
황도의 살결에는 칠월 햇빛이
불의 결처럼 천천히 익어 들고,
한철을 견딘 단물은
입안에서 여름이 아니라
한 그루가 평생 번역해 온 계절의 향기를 풀어낸다.
백 년 전 새겨진 화인은
봄마다 꽃으로 되살아나
복숭아 씨 가장 깊은 곳에
다음 숲의 시간을 접어 둔다.
산을 넘은 바람은 다시 꽃을 데려오고,
꽃이 진 자리마다
화인은 노을빛 열매가 되어
저녁 하늘을 조금씩 붉힌다.
오늘도 나무는
가장 오래된 화인 하나를 품은 채
늦여름 햇살 아래
또 하나의 봄을 나이테에 새긴다.
그 화인은
씨앗 속 가장 깊은 침묵으로 건너가
다음 숲이 그 흔적을 다시 만날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우수상] 무른 계절을 걷다 / 양채은
어머니는 밭을 외우지 않고
밭에게 길을 물었다
서른 해를 걸어도 낯선 고랑에서
발끝으로 나무의 나이를 셌다
복숭아나무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열매를 낸다
어머니도 그랬다
같은 얼굴로 매번 다른 여름을 살아냈다
첫물 복숭아를 딸 때
어머니의 손끝은 저울보다 정확했다
너무 일찍 딴 것은 떫고
너무 늦게 딴 것은 물러지니
그 사이, 손으로만 읽히는
아주 얇은 하루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에도 그런 하루가 있다는 걸
떫지도 무르지도 않은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걸
여름마다 광주리에 담기던 복숭아들,
어머니는 멍이 번진 자리를 오래 쓰다듬었다
그 얇은 하루를 비껴가
너무 일찍 무너져 내린 시간들마저
어머니의 둥근 손안에서는
버릴 것 없는 하나의 온전한 계절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과수원에 지도가 없어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를
어머니는 나무마다 다른 마음으로 다가갔고
그 헤아림들이 포개져
결국 길이 되었다는 것을
복숭아꽃 지는 봄이면
나는 그 밭을 다시 걷는다
지도는 없지만
내 걸음이 가장 잘 기억하는
그 무르고 다정했던 계절 속으로
[심사평]
청미문학회 주최로 시행되는 제18회 복숭아문학상 공모에 시 부문에 580명이 작품을 보내왔다. 작년에 비해 응모작이 대폭 늘었고 작품의 수준도 높아졌다. 이천시와 청미문학회는 매년 복숭아문학상 공모전을 통해 이천시 특산물인 장호원 복숭아를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예심을 거쳐 30편이 본심에 올랐다. 최종 5편을 뽑기 위한 평가 기준은 보편성이 있는가. 삶이나 인간 관계에 대한 사유가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새로운 인식, 독창적인 이미지 등을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눈을 끄는 작품도 더러 있었지만 작품 속에 시인의 참된 마음이 담기지 않아 배제되었다. 세련된 문장과 아름다운 단어를 장식한다고 결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우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주제를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 점수를 받았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익는 일」 「화인(火印)을 새기는 나무」 「내 어두워지는 쪽으로」 「무른 계절을 걷다」 「달콤하게 걸어오는 미래」 「복사꽃 책」 「복송씨」 「여름의 편지」 총 8편이었다.
그 중 「달콤하게 걸어오는 미래」 「복송씨」 「내 어두워지는 쪽으로」 는 각각의 무게를 지니고 있어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었다.
「익는 일」 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화자가 복숭아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오래 익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안쪽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안쪽 깊숙이 들어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해서 사유를 찾아낸다. 익는 일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한 계절을 내 안으로 옮겨 심는 일’도 완성을 위한 행동이다. 과장되거나 들뜨지 않고 사물을 주의 깊게 살피는 차분한 목소리에 힘이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집중’으로 좋은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복사꽃 책」 은 할아버지의 경험이 기록된 복숭아 농사일지’를 다루고 있다. 복사꽃이 피면 봄은 화관을 쓴 여인처럼 눈부시다. 봄이 오면 농사가 시작되기에 봄을 꽂아 두는 화사한 책이 한 권 있다. 하지만 책장을 열면 사정이 다르다. 가뭄이 심했던 봄날과 늦서리가 꽃잎을 훑고 간 봄날과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 꽃보다 더 많이 솎아내던 봄날까지 땀에 젖은 날들이 보인다. 잔손이 많이 가는 복숭아 농사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펼치면 그해의 바람이 먼저 일어나지만 그 책의 다음 페이지를 자신이 이어가겠다고 한다. 시의 덕목은 좋은 시가 갖춰야 할 ‘본질적 가치’이다. 「복사꽃 책」 은 시의 덕목을 충분히 갖춘 빼어난 작품이다.
「화인(火印)을 새기는 나무」 는 복숭아가 봄이 되기 위한 상처이다.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몸에 찍는 도장처럼 불볕을 버티며 얻어낸 상처가 ‘꽃과 복숭아’를 만들었다. “백 년 전 새겨진 화인, 다음 숲의 시간을 접어 둔 복숭아 씨의 가장 깊은 곳”을 통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너머의 시간까지 찾아내 ‘詩의 가지’를 뻗어간다. 어떤 결과물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는 시간들이 화인(火印)으로 찍힌다. 깊은 상처를 달고도 지치지 않고 일어서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다.
「무른 계절을 걷다」 는 ‘물러지기 쉬운’ 복숭아의 체질과 ‘단단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서른 해 동안 복숭아 농사를 짓던 어머니는 밭을 외우지 않고 밭에게 길을 물으며 나무를 보살핀다. 어머니는 매번 ‘다른 여름’ 속에는 태풍과 가뭄이 있고 썩어가는 낙과도 있다. 봉지를 씌우는 수고나 병충해를 막는 작업도 필요하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듯이 떫지도 무르지도 않은 그 순간을 놓치면 농사를 망친다. 사람도 나무 같아서 절기에 맞춘 손길이 필요하다. 나무마다 정성을 다한 그 헤아림은 어머니가 만든 자식들의 길이었다.
「여름의 편지」 는 나무마다 하얀 봉지를 매달던 아버지가 ‘몸으로 쓴 편지’이다. 수천 번 손길이 닿아야만 ‘한 장의 종이’가 태풍을 버틴다고 한다. 봉지 속의 복숭아는 흉터를 밖으로 꺼내놓지 않고 속부터 묵직한 단맛을 익힌다. 이 역시 거친 손등의 흉터를 침묵하는 속 깊은 아버지 모습이다. 오래 베인 흉터들이 향기라는 제 얼굴을 갖추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해버리는 성급한 시대에 그 결말을 제시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쳐 준다.
― 심사위원 마경덕 시인
[출처] 제18회 복숭아문학상 / 이다연|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