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요? 정주진 저 20240315
<더불어 사는 게 뭐예요?>
나의 가족은 종이 신문을 구독하기 때문에 아침마다 문 앞으로 신문이 온다. 어렸을 때 읽은 책들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캐릭터는 거의 모두 아침 식사 시간에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사를 읽는다. 어렸을 때 영화나 만화, 소설에서 나오는 이런 모습이 어른스럽게 다가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접했던 책들과 영화들의 밝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현실의 신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암울하다.
흥미 있게 읽었던 책 중 한 등장인물은 격한 감정을 일으키는 ‘눈물 폭탄’을 제조해 테러를 한다. 테러를 당하는 사람들은 울음 폭탄을 맞고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 아침마다 문 앞으로 오는 신문 또한 혼돈과 고통의 내용을 담고 있다. 눈물 폭탄이 그렇듯 신문 또한 한 사람의 주장과 특정 정치색에 물들어 있기에 더욱 날 서 있다. 돈과 시간, 감정을 쓰면서 나라의 문제와 사회의 아픔을 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인들의 싸움이나 경기 침체 같은 문제를 내가 안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선생님,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요?”는 비난과 아픔에 젖어있는 사회에서 이해와 배려를 이루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더불어 산다’는 말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때로는 지지하고 도우며 사는 것이라고 전한다. 현재 사회에서 공존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책이 전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삶을 가진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한 친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데 수천만 명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그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으며 애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책은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나이나 서열, 직업이나 배경, 성별이나 벌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은 나의 권리이지만 나의 위치와 힘을 이용해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책은 이를 ‘상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함을 준다고 해서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니다. 독특한 생각과 행동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조화를 부수는 일이며 그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다.
다르면 불편해도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사회가 만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지 않고 법이나 규정 없이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가 훨씬 커서 평생 걸어도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할 정도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땅은 좁고, 내 옆에는 사람이 살기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대로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상대방에게도 같은 자유가 있다면 그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은 살인과 자멸을 낳게 된다. 결과적으로 내 마음대로 즉, 나의 이익을 마음대로 추구할 수 없게 된다. “선생님,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요?”의 의견에 따르면 나의 마음대로 살고 싶지만, 모두가 그러면 나 또한 큰 피해를 당할 것이기에 많은 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만든 것이 사회 아닐까? 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보장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일정 기준을 만들고 모두 지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에는 남을 향한 배려도, 사랑이나 이해도 없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집단이기 때문에 주어진 틀 안에서 상처를 주고 가차 없이 넘어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불편하거나 방해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비난하는 것은 이 틀을 부수어 나 또한 자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더불어 살아야 한다.
책은 더불어 살기 위한 방법으로 대화와 포용, 사회 구성원 간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전한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거나 살면서 얻게 된 나의 특징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기준을 비판하는 것은 혐오이다. 모두가 이를 이해하고 서로 대화로 해결할 때 ‘더 나은’ 사회가 된다. 모든 것이 권리고 모든 것이 특징이라면 잘하고 잘못된 것이 없을까? 아니다. 영웅을 부정하는 이 책에서도 악당이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감시도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더불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필요 없다거나 절대 싫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이유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괴롭히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우리는 공공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데 이것을 막는 것이 ‘더불어’ 사는 것을 방해하고 고통을 유발하고 사회를 망가뜨리는 악이다. 약한 사람을 죽이는 병균을 우리는 감시하고 막아야 한다. 상대를 죽이는 것이 금지되는 이유는 이것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피해가 되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목적으로 삼을까? ‘더 나은 사회’가 완벽한 사회가 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일까? 이상적인 목적은 때로는 독일의 한마을이고 때로는 안산이고 때로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국가, 차별이 없는 국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약자를 배려하는 바다 건너 이름 모를 국가다. 이 모델들이 정말로 더불어 사는 것에 성공했나? 더욱 나아져 완벽에 도달했나?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완벽인가?
우리나라도 독일이 될 수 있다. 정말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많은 사람의 행복을 방해하는 나쁜 녀석들을 감시한다면 말이다. 만약 서로가 포용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두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못 하는 녀석들은 병균처럼 병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개인의 생각에 선과 악을 부여하는 녀석들을 고쳐주어야 한다. 우리는 당근과 채찍처럼 환경을 조정해 피해를 끼치는 녀석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고 강력한 형벌을 통해 이들이 포용과 이해를 방해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것이 문화가 되어 평화 문화가 사회에 퍼지면 모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서로 다르다고 비난하면 모두가 안전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게 된다. 물론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런 생각과 행동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약간의 감시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신문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신문을 읽는 것이 사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라면 좋겠다. 사회의 고통에 눈을 감으면 안 되기 때문이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신문을 독해력을 키워 국어를 잘하고 싶어 읽는다.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직업을 잃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심각하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우울해지는 이유는 내가 신문이 전달하는 분위기의 사람들처럼 살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신문 속 비극이나 혼돈, 책 속 등장인물의 고통을 보며 슬퍼지는 이유는 공감해서가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비극이 나의 슬픔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책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신문에 매일 나오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나쁜 사람이어서 조화를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처럼 원동력이 ‘같이 잘 살자’가 되면 각자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에서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확신한다면 말이다.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순간 ‘적절한’ 감시가 들어서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도 없고 개개인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더불어 사는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기도 하지만 노력하려는 시도와 상관없이 노력하는 이유에 희망이 없다. 책이 말하는 이유로 더불어 살려고 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논어에서 말하는 사랑도 이런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국어 점수 이상을 위해서 신문을 읽고 ‘더불어’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원한 고통에서 구해준 사랑하는 신을 따르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물론, 신이 그렇듯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나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독교만큼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가치관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