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찻길에서 춘천을 보다
전철이 개통 된지도 2년이 다돼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사였다. 새로 깔고 역사를 지었으니 신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45개나 되는 터널 소음으로 대화조차 어렵단다. 쾌적하고 즐거워야할 기차여행이 짜증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개발만이 능사가 아닌 것 같다?
재작년 12월 20일이다. 옛 추억이 그리워 기차에 올랐다. 개통 전날이다. 나는 무임승차 시절에도 거의 기차를 이용하지 않았었다. 갈아타는 불편 때문이었다. 퇴직 후에는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느라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곤 했었다.
성북역 경춘 홈에는 마지막 열차를 타보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서서 기념촬영을 하는가 하면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이야기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경춘선의 시, 종착역은 성동역 이었다. 국내 유일의 다섯 갈랫길이 있었던 성북역에서 월곡동으로 갈라져 천장산 홍릉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제기동 약령시장과 정릉천 사이에 있었다. 지금도 홍릉입구에 가면 판자 집들이 이층으로 변했을 뿐 철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939년 7월 25일에 건설된 사철중의 하나였다. 요금을 많이 받을 욕심에 선로를 꼬불꼬불하게 만들었단다. 92.9km 구간에 12개의 보통역과 2개의 간이역 그리고 10개의 임시정류소가 세워졌다. 성동, 고상전, 월곡, 연촌(성북), 묵동, 태릉, 갈매, 퇴계원, 사능, 금곡, 평내, 마석, 대성리, 청평, 상천, 상색, 가평, 서천, 백양리, 강촌, 의암, 신남, 성산(남춘천), 춘천역에다 80년대 3개의 임시승강장이 더 만들어 졌다. 한마디로 논두렁 밭두렁을 다 섰다고나 할까!
그 덕일까? 철길은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눈에 거슬림이 없다는 얘기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작은 터널이 있고 부드러운 곡선의 내리막길이 있다. 잘 다듬어진 오솔길처럼 강을 끼고 돌아 돌아 나 있는 철길이 정겹다.
한천 교량을 건너니 서울공대가 있었던 신공덕역은 진작 폐지되어 쑥대밭이다. 먹골 배밭이 빌딩숲으로 변한 태릉을 뒤로하고 낮은 구릉을 넘어서니 복선공사로 곳곳이 파 헤쳐지고 상봉으로 연결하는 고가선 작업이 한창이다.
달리다 천천히 가기를 반복하더니 퇴계원에서 새 철길로 올라선다. 금곡역은 임시로 폐지가 되고, 터널을 지날 때 마다 정거장이 하나씩 나타난다. 터널의 연속이다.
마치터널을 넘어 달리니 북한강이 막아선다. 이곳부터 기차는 강을 거슬러 올라 춘천에 이른다. 백리가 넘는 협곡이다. 이 구간은 사계절 내내 볼거리가 많다. 눈이 즐거우니 한시도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서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고, 주말이면 얼마나 많은 등산객과 행락객들이 몸살을 앓았던지!
나와 철도의 인연은 가난 때문이었다. 학비가 없는 학교에 진학했고, 기관사가 되었다. 유년시절의 선로변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군용열차가 지나다니는 기찻길엔 먹거리가 널려있었다. ‘헬로 짭짭’을 외치며 자랐다.
기관사가 되어 처음으로 고향열차를 운전 할 때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어쩌다 여행길에서 지나가는 기차라도 볼라치면 가슴은 사정이 요동치곤 한다. 그냥 좋은 것을 어떡하겠는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말이다.
세월 따라 경춘선도 많이 변했다. 착, 시발이 청량리로 바뀌는가 하면, 준급행, 급행열차도 생겼었다. 89km 구간을 1시간 29분에 달리기도 했으니 아마도 지금까지 경춘선의 가장 빠른 열차였을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물러가고 디젤기관차가 들어오는 가 싶더니 자동출입문이 동작되는 디젤동차로 대체되기도 했었다.
새 철길로 달리던 열차는 상천역을 지나서야 구 선로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북한강 설경을 볼 수 있는 행운이었다. 침엽수가 만들어 놓은 눈꽃의 향연, 영락없는 크리스마스 추리다. 금방이라도 너털웃음을 웃으며 산타가 나올 것만 같다. 나목에 피어난 상고대는 어떠한가! 물안개에 휘감긴 강촌, 아름다워 그 곳에 살고 싶다 했던가! ‘소양강 처녀’ 노래가 절로 나온다.
강을 오르던 기차는 방향을 바꾸어 신남역을 향해 치닫는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구간이었다. 열 번째 터널을 나가면서 만나는 설경, 옴폭하니 떡시루를 엎어놓은 모양을 닮았다 하여 ‘시루마을’이라 부르는 눈 덮인 김유정마을, 늘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었다.
남춘천에 도착하니 고가공사가 한창이다. 공사대금 문제로 시행사와 관계기관의 줄다리기 끝에 나온 작품이란다. 가슴이 꽉 막혀온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의 작품에서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 이었다’ 로 시작했다. 니가타현 ‘에치고 유자와’는 작은 읍도시다. ‘쓰쓰가무시’ 병으로 잘 알려진 도시, 소설을 통하여 작가가 소통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양문물의 홍수 속에서 지키고 싶어 했던 ‘일본스러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많다고 했다.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켜내야만 하는 것. 70년대 전후 니가타에서 만든 ‘디젤동차’가 춘천을 오르내렸다는 ‘아이러니’는 설국의 작가가 보낸 경고가 아니었을까? 자연이 준 선물,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는 춘천시민이 지켜야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Let it be"란 노래가 생각난다.
첫댓글 기관사 출신 답습니다. 참으로 자상합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