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96 분 / 코메디, 드라마, 로맨스
감독 : 안소니 애스퀴스, 레슬리 하워드
출연 : 레슬리 하워드(헨리 히긴즈 교수), 웬디 힐러(일라이저 둘리틀), 윌프리드 로우슨, 진 카델
1. 전 될 수 있는 한 방영 제목을 그대로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어쩔 수가 없군요. 다솜 방송에서 이 영화의 방영 제목으로 쓴 건 [마이 페어 레이디]였답니다. 그 사람들은 원작이 같으니 이런 제목이 핑계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어림없습니다. 시청자들의 혼란만 유발시킬 뿐이죠.
2. 문제 하나 낼게요. 아카데미 상과 노벨상을 한꺼번에 받은 유일한 사람은 누굴까요?
답은 조지 버나드 쇼입니다. 바로 이 영화 [피그말리온]으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답니다. 재미있죠? 나중에 퀴즈같은 걸 낼 기회가 되면 한 번 써먹어 보세요.
하지만 제가 과연 이 영화의 각색에 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각색의 당위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겠답니다. [피그말리온]의 원작은 영화용 각본으로도 무리없이 통하거든요. 오히려 연극으로 상영하는 게 힘들죠. 그래서 원작은 일반 극장에서 상영할 때 삭제해도 되는 부분을 따로 지정해두고 있답니다. 일라이저가 공주로 변신하는 유명한 대사관 무도회 장면도 삭제 대상입니다.
물론 영화는 대사관 무도회 장면을 자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살려야죠. 상업적 포인트가 되니까요.
대신 영화는 다른 걸 잘랐습니다. 쇼가 연극에 삽입한 다양한 철학적 대사들이 사라지고 만 거죠. 쇼는 자기가 직접 쓴 영화 각본에 이것들을 그대로 넣었고 또 제작자인 가브리엘 파스칼에게 지우지 말라는 약속까지 받았대요. 하지만 결국 잘리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죠.
일라이저, 그 망할 슬리퍼는 어디 있지?라는 유명한 대사도 쇼의 아이디어는 아니랍니다. 아시다시피 원작에선 히긴즈 교수와 일라이저는 끝끝내 맺어지지 않죠. 쇼는 이 결말을 영화에서도 그대로 고집했는데, 이 역시 먹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슬리퍼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쇼는 이 결말을 아주 경멸했대요.
그러나 쇼도 잘못이 없었을까요? 예를 들어 당의를 입힌 것처럼 묘하게 평이해진 대사들과 상황들(이중엔 심지어 [마이 페어 레이디]도 그대로 살리고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은 나름대로 대중과 접촉하려는 쇼의 서툰 시도 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3. 앤소니 애스퀴스와 레슬리 하워드의 연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네요. 전 조금 밋밋하다고 생각해요. 이들은 이런 실내극을 활기차게 각색하는 데엔 좀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필수적이라고 할 치고 빠지는 리듬감이 떨어져요. 역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조지 쿠커와 비교가 됩니다. 쿠커의 영화들이 단순히 영화로 옮긴 연극이 아닌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쿠커는 이런 연극적 상황들을 매끄럽게 영화로 옮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4. 가장 빛나는 건 배우들입니다. 특히 레슬리 하워드의 히긴즈 교수 역은 렉스 해리슨의 그것과 견줄 만 합니다. 하워드의 히긴즈는 해리슨의 히긴즈보다 더 날카롭고 괴팍하며 더 에너지에 차 있는데, 그 나름대로 개성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웬디 힐러 역시 좋은 배우로, 기술적인 면은 오드리 헵번을 훨씬 능가하며 쇼의 원작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우에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오드리 보다 훨씬 덜 예뻐요. 레슬리 하워드가 힐러보다 훨씬 더 예쁘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가 보여주었던 화려한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힐러의 무도회 장면에 꽤 부정적이 될 겁니다. 그러나 힐러가 보여주는 꽃파는 아가씨는 헵번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5. 지금까지 계속 투덜거리기만 한 것 같지만, 그래도 [피그말리온]은 여전히 좋은 영화입니다. 그만큼 쇼의 원작이 막강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 거죠. 반대하시고 싶은 분들도 많겠지만,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