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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83
2월26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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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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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KM9tEVpt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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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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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yon40Jw3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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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는 법: 생각 끊기 연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라시이들의 의로움이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화를 내는 것까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미운 마음을 간직해서는 안 되고 그 전에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성을 자주 내면 특별히 심장과 혈관에 좋지 않습니다. 혈압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화를 표출하던, 그냥 속으로 삭이던 안 좋은 것은 매한가지라고 합니다. 화라는 것 자체가 올라오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화는 감정입니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의지력입니다. ‘감정’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라고 한다면 ‘의지력’은 ‘댐’과 같습니다. 의지력이 소진되면 작은 물에도 댐이 무너져 큰 피해를 줍니다. 의지력이 강해도 물이 범람하면 댐을 넘어 또한 큰 피해를 줍니다.
이렇게 지금 당장은 흘러내리는 물과 의지력에 대해서는 크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굳이 올라오는 화를 끌어내리려고 의지력을 발동합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혹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려고 심호흡을 합니다. 역시 잘되지 않습니다.
화가 나지 않게 하려면 의지력을 키우고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장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날씨’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날씨가 화창하면 댐을 수리하고 증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날씨는 사람의 힘으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는 ‘기분’입니다. 기분은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항상 우리 기분을 화창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기도를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날씨를 우중충하게 만드는 것이 ‘생각’임을 알면 됩니다. 생각은 자아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끌어옵니다. 우선 이 생각을 끊을 줄 안다면 그것이 벌써 기도입니다. 생각을 끊으면 성령께서 그 공간 안으로 들어와 비를 그치게 하십니다.
오늘 밤에 저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희한합니다. 저는 커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잠을 잘 잡니다. 그런데 10시에 잤는데도 새벽 2시까지 너무 정신을 맑은 것이었습니다. 계속 기도를 해도 잠이 오지 않고 정신이 말똥말똥했습니다. 화가 점점 올라오려 했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니까 저녁때 집중해서 하던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다 만 일을 머리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잠자기 전에는 집중해서 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핸드폰을 켰습니다. 유튜브에 잠이 잘 오게 만드는 ‘빗소리’를 틀었습니다. 소리가 생각을 끊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니 생각이 끊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은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더는 화가 올라오지 않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화라는 감정과 직접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 화를 일으키는 것이 생각임을 알고 그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생각을 끊는 것이 생각과 싸우는 방법입니다. 뱀과의 대화를 끊을 때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면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마음을 화창하게 해 주십니다. 기도 시간이 이렇게 나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화살기도를 끊임없이 바치면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하루 50번 정도 화살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 좋은 예를 소개해 드립니다.
일본 제1위 납세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냐고 묻는 자신의 제자인 미야모토 마유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만나는 사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모든 이들에게 ‘이 사람에게 온갖 좋은 일이 눈사태처럼 일어납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라도 좋으니 중얼거려보세요. 하루에 100명씩, 1,000일 동안 실행해보는 겁니다.”
마유미 씨는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실천하자.’란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는 쉽게 이런 말이 나왔지만 불편한 사람,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말을 계속하다 보니 싫은 마음이 점차 사라지고 상대가 싫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말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이 기분이 좋고 감사하는 마음이 끓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자신이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1,000일이 지났을 때 사이토 히토리가 말했습니다.
“마유미 씨 얼굴이 좋아졌어요. 운을 부르는 얼굴이 되었네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면 얼굴에도 그 마음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이제 당신이 두 번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을 책으로 쓴 『돈을 부르는 말버릇』의 저자 미야모토 마유미는 몇 년 뒤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화가 나면 분별력이 사라지고 그러면 더 안 좋은 일들을 끌어 잡아당기게 됩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 사람의 기분에 따라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는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사이토 히토리 씨는 항상 기도하는 법을 미야모토 마유미 씨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렇게 축복을 빌어주면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면 화가 날 일이 생겨도 미량만의 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금의 의지력으로 충분히 통제됩니다. 그러면 주위에 나무도 자라고 물고기도 살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그러면 사람들도 그 곳에 쉬러 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좋은 기분은 생각을 통제하는 데서 생기는데, 기분이 좋으면 화가 날 일도 웃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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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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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세상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그러한 의로운 사람들보다 악인들이 잘 보이고, 또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들의 악행을 가만히 두고 보시는가?’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가?’와 같은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문과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 말씀인 에제키엘 예언서가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 또는 ‘회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현재를,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상 여정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 지상 여정을 마친 뒤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삶을 향하여 우리는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영원한 생명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악인과 그들의 악행이 만연하는 세상 때문에 하느님을 불신할 수 있습니다. 의인보다 악인이 더 성공하는 모습에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사라짐을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시간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삶의 방향이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특별히 기울이는 시간이 사순 시기입니다.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가려는 우리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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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용서를 청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0-24)
1) 이 말씀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라는 말은, 그들의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마음속에 증오심, 분노, 복수심이 가득 차 있더라도 실제로 살인한 적이 없으면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그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위선자들의 생활이 신앙생활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일과 형제를 모욕하는 일도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십계명 제5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상대방을 실제로 죽이지는 않더라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분노하는 자기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언어폭력’이 살인만큼이나 큰 고통을 줄 수도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가해자라는 것도 모르거나, 자기가 상대방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은 가해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그 고통이 평생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3)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화를 내고 모욕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고 있는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악의 없이 농담을 했을 뿐인데,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그가 그 농담을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속 좁게도 계속 삐쳐 있다. 이 불화는 옹졸한 그의 탓이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경우에 불화는 ‘속 좁은’ 그 사람 탓이 아니라, 처음에 농담을 해서 그에게 상처를 준 ‘내 탓’입니다. 그러니 내가 먼저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용서를 청할 때, “마음 넓은 내가 참는다.” 같은 태도로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용서를 청할 때에는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거나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왜 항상 나를 용서하는 위치에만 놓고, 이웃을 용서받는 위치에만 놓는가? 실제로는 이웃을 용서할 일보다 이웃에게 용서 청할 일이 더 많지 않은가?) 그것은 어쩌면, ‘주님의 기도’에 이웃을 용서하는 일만 언급되어 있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아버지를 향해서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주님의 기도’에도 이웃을 용서하는 일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에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그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고, 또 용서를 청하지도 않고, 그냥 고해성사를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에 모든 고해사제는 그 이웃에게 사과했는지, 또 그 이웃과 화해했는지를 물어봅니다. 아직 안 했다고 하면, 즉시 가서 하라고 권고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그에게 사과하지도 않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고서, 고해성사 보는 것으로 그 일을 끝내려고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태도이고, 그 고백은 ‘고해성사 모독죄’가 됩니다.)
5)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예물을 바칠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삶’에 사랑이 없는 사람의 예물은 예물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지금 당장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반드시 한 번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인생은 ‘법정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여기서 “타협하여라.”는 “회개하여라.”인데, 앞의 23절-24절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가서, 즉 ‘나 때문에 상처 받고 고통 겪는 형제’에게 가서, 사과하고,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일은 저승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자꾸 미루다가 결국 못하고 저승으로 간다면, 화해할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 (그 형제가 먼저 저승으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를 청하는 일과 화해하는 일은, 둘 다 살아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감옥’은 앞의 22절에 나오는 ‘불붙는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옥이라는 곳은, 한 번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곳입니다. 지옥에서 나갈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결코 나오지 못할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 한 닢까지 전부 다 갚아라."(회개와 보속을 제대로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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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구약성서의 ‘요셉’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버림받아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성실했고, 꿈의 해몽을 잘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심한 기근이 들어서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중에 요셉을 알아본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형들의 잘못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려고 미리 계획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루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반지를 주셨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형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고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시는 가장 극적인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은 그 끝이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려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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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난강론
몇 해 전입니다. 당시 국회는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시켰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에 대한 심리를 하였습니다.
법적인 절차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인용할 수 있고, ‘탄핵’을 기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십칠 년 전에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기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군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성당의 군종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성당은 부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영외에서 근무했습니다.
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영외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좋은 군종병을 3개월만 하고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군종 신부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군종병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군종신부님께서 저를 ‘탄핵’하셨고, 저는 그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3여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부님께 무척 고맙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렸고,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물 한 컵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님께서 동창모임에서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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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화>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화>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한다면
화나게 한
그 사람보다
화난 나를
먼저 살펴야지요
화나게 한 사람은
화를 돋울 뿐
화난 사람만이
화를 풀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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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이 계명은 말 그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범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계명을 좀 더 엄격하게 해석하십니다.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뿐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고 욕하고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 미움과 욕설 속에는 그 사람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속내가 내포되어 있고 실제로 공공연히 죽었으면 하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도 합니다.
내가 더 이상 그 사람과 화해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며 용서하려는 의도가 없을 때, 그 사람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할 형제로 머물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내 사랑을 더 이상 받지 못하니 그는 내 마음속에서 죽은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은 이처럼 어떤 의미로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범하는 살인죄인 것입니다. 살인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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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동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웃, 또 다른 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 수백 개나 되는 실천조항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2퍼센트 부족하다고 하신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율법 정신이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챙기신다. 살인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과 성냄, 무시하는 말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성을 내고, 미워하고 무시하는 대상을 두고 ‘남’이 아니라 ‘자기 형제’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무시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형제라는 것이다. 나의 일부라는 말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장 19절)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자본을 최고의 우상으로 삼고 있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딛고 일어서야 할 대상, 적인 것이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미워하고 화를 내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자녀들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를 안겨주기 위해 고액과외를 하고 조기유학을 보내 파행적 가정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만의 생존법을 배워가는 자녀들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부모를 제 몸처럼 사랑하며 공경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나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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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연세대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대학생의 완벽주의 성향에 따른 하위집단의 특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대학생을 적응적 완벽주의, 부적응적 완벽주의, 비완벽주의로 나눈 뒤 이들의 전반적인 행복 지수와 우울 지수를 측정했습니다.
적응적 완벽주의란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노력과 성취를 하는 사람입니다.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여하나 노력과 성취가 없는 사람이고, 비완벽주의는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여하지 않아 당연히 노력과 성취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적응적 완벽주의는 성취를, 비완벽주의는 휴식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행복 지수가 제일 높았을까요? 바로 적응적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우울 지수가 제일 높은 사람은 부적응적 완벽주의자였고 그 중간이 비완벽주의자였습니다.
휴식보다 성취에 지향을 두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취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그냥 휴식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보다도 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휴식도 또 하나의 성취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힘들다는 생각,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 어렵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나의 성취 방향을 간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도 이런 성취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적응적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높은 기준을 세우고 여기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과 성취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겼던 율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옛 계명인 율법은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지만, 복음은 이를 넘어 우리가 마음에서 죄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도록, 이유 없이 성내서는 안 된다고 이릅니다. 율법에서는 단순히 화해 예물 바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계명에는 그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율법만을 따르면, 초보의 단계에만 머무르는 것과 같습니다. 중급, 고급의 단계로 나아가려면 율법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과 성취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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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바라보기보다 자기를 바라보는 지혜를….}
어느 중학교 조회 시간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새로 오신 선생님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장난만 치면서 보지도 않고 또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 교장 선생님은 화를 내시지 않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새로 오신 선생님은 왼쪽 팔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순간 아이들은 깜짝 놀라면서 갑자기 조용해졌고, 새로 오신 선생님이 계신 단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곧바로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아! 선생님은 오른쪽 팔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강의할 때,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학생, 군인 앞에서 강의할 때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고서도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 탓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자기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를 주님께 청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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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보, 멍청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께서 죄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내리셨다면 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는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 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 고 하셨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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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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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회개, 사랑, 순수-
엊그제 2월 공동체 친교의 날에는 오랜만에 ‘어니스트 씨프honest thief’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정직한 도둑’ 제목도 참 재미있다 싶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8:30분 취침시간에 맞추느라 반만 봤지만 충분했습니다. 참으로 무의미한 삶중에 사랑을 찾다가(쉰들러 리스트) 첫눈에 반한 사랑을 만나(케이트 월시) 회개와도 같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진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허무와 무의미,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 모두가 내면 깊이에서는 사랑을 찾습니다. 사랑을 찾아 만날 때 진짜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사랑(사람)을 만나지 못해 허기虛氣를 느끼며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찾는 다는 말은 하느님을 찾는 다는 말이며 사랑을 만났다는 말은 하느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진정 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사순절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회복되는 사랑에 마음의 순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회개-사랑-순수’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교황님의 요즘 사순시기 강론중 인상적인 대목을 나눕니다.
“사순절은 사막이다. 사순절은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 즉 복음과 연결하기 위해 모빌(온라인 기계)로부터 거리를 둬야 할 시간이다. 사순절은 쓸데없는 말이나 잡담이나 중상을 포기해야 할 시간이자 주님과 조용히 대화해야할 시간이다. 사순절은 마음의 건강한 생태 환경을 위해, 즉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자신을 봉헌해야 할 시간이다.
사순절의 세 기본적 수행인 자선, 기도, 단식의 가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애덕의 자선은 우리의 이웃과 일치시키며, 단식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일치시킨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순수의 본질적 삶을 살아야 할 사순절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사랑과 순수의 본질적 삶입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를 짓지 않아 마음의 순수는 너무 소극적입니다.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바로 이것이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사랑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사랑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마음이 좋아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지엽적인 해결책이 아닌 마음의 순수가 본질적인 해법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목표하는 바도 마음의 순수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함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순수입니다.
살인의 뿌리인 마음속의 1.분노와 2.원망을,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하는 살인같은 말의 뿌리인 3.멸시를 뽑아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뿌리인 마음의 정화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앞서 회개의 화해를 통해 이웃과의 투명한 깨끗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미사봉헌 직전 마음에 맺힌 형제가 생각나 불러 사과한 후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회개를 통한 화해요 사랑과 마음의 순수입니다.
회개의 시간과 자리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현재 여기를 보십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회개한 과거를 결코 캐지 않습니다. 지난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자주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내용이 생각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러니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 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에 못살았어도 지금 여기서 회개하여 사랑과 순수의 삶을 살면 구원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 전쟁이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오늘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아야 구원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정말 희망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회개하여 사랑과 순수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첩경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잘 살았어도 지금 내적으로 썩어 변절變節, 변질變質, 변심變心, 변덕變德의 부패腐敗인생이라면 다 헛일입니다.
당장 바로 오늘 지금 회개로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사랑과 순수로 발효醱酵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마음의 순수를 선물하시어 ‘맛과 향’의 발효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주님을 고대苦待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시편130,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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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이야기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악인이건 의인이건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삶의 과정 안에서 비록 죄악에 물들었어도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모든 이에게 주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공정과 정의의 실천"
회개의 증거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정과 정의의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께로 방향을 바꾼 이는 그분의 마음이 바라시는 것을 함께 지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불의하고 불공정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가난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 정의와 공정만이 희망인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연민의 강물이 늘 흐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 18,26)
회개하는 악인에게 그처럼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지만, 한때 의인이었다가 도중에 주님의 길을 저버린 이에게는 매우 단호하십니다. 한때의 의로움이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주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주님께서 반기시는 진정한 회개가 되겠지요.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혀 원망 받을 일을 저질러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하느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에게 일단 멈추라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께 중요한 건 예물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입니다.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을 주님께 드리는 예물로 무마하려 한다면 그건 예물이 아니라 뇌물일 겁니다. 주님께서 아주 역겨워하시는 모습이지요. 주님께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 그 형제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구체적 노력이 우선입니다.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마태 5,25)
누군가에게 억울한 마음이 들게 해서 고소를 당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상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고소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고 권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행사하는 갑질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 몸부림으로 꿈틀거리는 이들의 편에 서는 분이십니다. 권력으로든 재물로든 신분으로든 스스로 세속에서 칼자루를 쥔 쪽에 가깝다고 여긴다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언행을 주님 마음에 비추어 세심히 성찰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그 길을 충실히 걸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죄인은 죄의 길을 돌이켜 주님을 향함으로써 살 수 있습니다. 불결하고 부정하고 낡은 자아를 벗어버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입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바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한없이 약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약자에 대한 연민의 감수성을 회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에 우리 마음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 다가가고 경청하고 연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사순절에 화해와 일치로 주님께서 반기실 가장 값진 예물을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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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선과 단식의 관계는 비와 땅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의 봉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도록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단식은 자선의 물을 받지 않으면 싹을 내지 못하고, 자선이 메마를 때 단식도 가뭄을 겪게 됩니다. 자선과 단식의 관계는 비와 땅의 관계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닦고 육신을 정결히 하며 악을 뽑아내고 덕행을 심는다 할지라도 자선이라는 물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단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단식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자선이 단식할 때 여러분 마음의 들판은 단식합니다. 여러분이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아낌으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누어 줌으로써 거둬들이십시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애긍시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지 않는 것을 여러분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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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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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곧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말해줍니다.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형제와의 의로움의 관계가 곧 하느님과의 의로움의 관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 해야 할 일인지를 헤아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5,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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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소서.
주님!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 서둘러 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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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이제와 영원히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너무 힘들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고, 율법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의미가, 율법과 계명의 본질을 살아내지 못한 그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기는커녕, 서로 헐뜻고 비방하고,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자꾸만 뒤로 미루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인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세리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는데, 꼿꼿이 서서 자신의 잘남을 늘어놓는 바리사이와는 달리,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세리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닌 이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아갔다."(루카18,14)
정답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나의 노력과 겸손과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어우러져야 이제와 영원히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늘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려고 노력하고,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깁시다! 오늘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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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iY5xmyybb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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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마냥
고요하지 않는
우리들 삶이다.
복음의 삶은
화해의 삶이다.
화해의 삶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다.
진실한 화해는
서로를 치유한다.
갈등과
미움이라는
이 불편한
관계의 현실을
공동체의 주님께
봉헌한다.
갈등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와 나눔의
대상이다.
갈등은
화해를
지향한다.
사람은
화해없이
살아갈 수
없다.
화해와
공동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공동체는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화해와
용서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화해와 용서는
건강한 믿음의
핵심이다.
믿음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화해로
나가는 것이다.
화해 없는
평화는
가짜이다.
사순시기는
십자가를 통해
삶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시간이다.
삶의 의미는
화해의
의미이다.
하느님과의 화해
형제와 이웃과의
화해 그리고
나 자신과의
화해이다.
복음의 의미는
나와 너의
화해를 통한
공동체의
의미이다.
공동체는
화해와 용서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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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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