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첫 엘 클라시코가 끝난 후 베니테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인터뷰도 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최선입니까? 선수들은 결코 축구 게임에서처럼 단순히 부상에서 회복된다고 최선의 컨디션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수치로 표현된 능력치의 합이 강약을 보여주는 단순한 스포츠도 아니다. 11명이 하나의 전술을 제대로 선보일 때 아름다운 축구가 나오는 것이다. 공격적인 축구를 바란다지만, 레알마드리드(이하 레알)의 팬들이 이렇게 무기력한 경기를 원했을까? 이번 경기에서 베니테즈가 보여주려고 했던 축구는 대체 무엇일까?
(△ 좌측 라인업의 위가 레알, 우측 라인업의 아래가 레알이다. 카세미루를 투입할 경우 역삼각형의 중원조합을 이루지만, 이번 엘클라시코는 바로 선 삼각형의 조합을 이뤘다. 크루스-모드리치가 공격적인 미드필더 조합이므로 수비 안정성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출처:AS 홈페이지)
1. 어정쩡한 미드필더 조합
평소 조합과 다른 형태의 미드필더 조합을 들고 나왔다. 하메스가 카세미루 대신 투입되었는데 하메스(혹은 베일)-모드리치-크루스는 매우 공격적인 미드필더 조합으로, 지난 시즌 안첼로티의 전술과 흡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들어 제대로 발도 맞춰보지 않은 데다가, 시즌 내내 카세미루의 수비적 지원 하에 공격적인 역할을 주로 부여받았던 모드리치와 크루스의 움직임이 지난해와 같을 수는 없다. 세 명의 움직임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드필더는 거의 붕괴되었다.
현대 축구의 압박이 무서운 것은 압박이 ‘팀 차원’에서 다함께 들어가기 때문이다. 선수 각각이 파편적으로 들어가는 압박은 FC바르셀로나처럼 기술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에게 효과를 발휘하긴 힘들다. 레알의 압박은 선수 '개인적 차원'에서 시도되면서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어설픈 압박은 오히려 상대에게 공간을 내줬다. 실제로 FC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의 미드필더 이니에스타는 교체되어 나가면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경기 내내 헐거워진 레알의 중원을 휘젓고 다녔다. 이니에스타는 오늘 특별히 잘한 것이 아니라 그는 평소처럼 잘했다. 다만 레알의 중원이 너무도 헐거웠다.
‘두 줄 수비’의 강점은 앞선이 한 번 수비적으로 걸러주면 후방에서 이를 쉽게 커트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카세미루가 있을 때에는 모드리치와 크루스는 ‘필터’의 역할을 하고 카세미루가 쓸어내는 방식이 유효했다. 또 카세미루가 ‘필터’의 역할을 하고 수비수들이 쓸어내는 방식도 유효했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 모드리치와 크루스는 ‘필터’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볼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전후 간격도 잘 조정되지 않아서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의 위험한 공간으로 매우 편하게 공이 투입되었고 드리블 돌파도 번번이 허용했다. 필터도, 쓸어내는 이도 없었다.
메시가 없다곤 하지만 바르사의 날카로운 공격력을 두고 급작스레 공격적인 미드필더 조합을 꺼낸 베니테즈의 선택은 지나치게 과감했다. 과감한 시도를 할 것이었다면 본인의 시도에서 책임을 질 수 있을만큼 전술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어정쩡한 미드필더 조합에, 전술적으로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레알의 중원은 그대로 ‘폭격’을 당했다.
(△ 기립박수를 받고 교체된 이니에스타.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이다. 출처: FC바르셀로나 홈페이지)
2. 빗나간 '믿음'
프리미어12의 우승을 차지한 김인식 감독은 ‘믿음의 야구’로 유명하다. 한 번 믿은 선수들을 끝까지 믿어준다. 축구에서도 믿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베니테즈는 선수들을 믿어도 너무 믿었다.
이번 레알의 선발 스쿼드에는 부상에서 복귀한 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마르셀루, 하메스, 베일, 벤제마 등 많은 선수들이 최근에야 스쿼드에 복귀했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마냥 빼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지만, 부진한 경기력을 보인 선수들은 빼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맞았다. 일례로 진짜 ‘9번’인 벤제마의 출전이 필수적인 상황이었지만, 오늘 벤제마는 원래의 강점인 돌아나가는 움직임과 연계 플레이에서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오랜만의 복귀전이 1위 다툼을 하는 라이벌 FC바르셀로나라니, 경기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베니테즈가 과감해도 너무 과감했다.
반대로 하메스는 오늘 팀이 전체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전반 초반부터 강한 압박을 시도할 때부터 몸이 무척 가벼워보였다. 드리블로 선수들을 돌파하는 장면도 괜찮았다. 특히 베일과 호날두가 주로 서서 공을 ‘발 밑’으로 받으려고 하는 반면에, 하메스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연계 플레이의 속도를 올리려고 했다. 박스 바깥에서 날린 두 개의 슈팅 역시 매우 위협적이었다. 공격적으로 가장 훌륭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는 베니테즈가 교체한 첫번째 선수였다. 하메스 대신 투입된 이스코는 특유의 기술과 드리블을 보여주면서 공격 능력을 뽐내긴 했지만, 이스코는 부진한 베일이나 벤제마를 대체했어야 했다.
베니테즈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믿음’을 보여주기엔 오늘의 4:0 패배는 너무 컸다. 그의 잘못된 선택은 짜증이 나버린 이스코가 네이마르를 걷어차는 장면으로 이어질 만큼 경기를 망가뜨렸다.
3. 철학의 부재
베니테즈는 팀을 급작스레 맡은 신임 감독이 아니다. 팀에 본인의 철학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언급한 것처럼 중앙 미드필더들의 공을 빼앗기 위한 압박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실책일 뿐이다. 공간배분과 간격 유지에 있어서도 레알은 재앙에 가까웠다. 수비 전술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다. 모드리치와 크루스가 앞으로 나가면서 압박을 가할 거라면 베일, 호날두, 벤제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메스의 수비 가담은 때론 열정적이었지만, 정해진 움직임은 아니라서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어떤 식으로 수비를 하겠다는 구체적인 철학은 없었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름값이 높은 BBC가 경기에 나섰을 뿐 세밀한 공격전술은 보여주지 못했다. 펩이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바르사는 높은 수준의 전방 압박을 구사하는 팀이다. 안첼로티는 이런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빠른 공격과 역습을 택했다. 그러나 이번 경기에서의 레알은 이렇다할 공격 전술을 보여주지 못했다. 딱히 빠른 역습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공격 템포는 현저히 떨어졌고, 개인 능력으로 상대를 압도한 것도 아니었다. 후반 초반 마르셀루의 찬스와 후반 막판의 벤제마, 호날두의 헤더로 찬스를 만들긴 했지만, 이것이 잘 조직된 공격 전술의 결과물은 아니었고 개인들의 능력에 기댄 것이었다. 오히려 공격 전술이 없는 상황에서도 찬스를 만든 선수들의 능력에 박수를 보낼 상황이었다. 브라보의 '미친 선방'이 야속할 상황이다.
교체카드 이스코와 카르바할의 활약은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교체카드가 홈에서 라이벌 바르사에 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올 카드는 아니었다는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베니테즈의 교체 투입이 무엇을 바라고 넣은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기 힘들다. 이스코와 카르바할은 단순히 하메스와 마르셀루를 대체할 뿐이었다. 심지어 하메스와 마르셀루가 크게 부진했던 것도 아니다. 교체 후에도 양상이 달라지지 않았다. 경기 내내 베니테즈의 전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체카드로 무엇을 바꾸려고 한 것인지 느낄 수 없었다.
카세미루를 투입해서 수비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공격에선 개인 기량과 속도를 앞세운 선수들을 이용하는 것이 차라리 베니테즈다운 전술이다. 안첼로티는 공격적인 선수들을 미드필더에까지 배치하면서도 팀의 공수 밸런스를 절묘하게 맞춰 13-14시즌 UEFA챔피언스리그를 우승했었다. 하지만 그 밸런스를 지키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지난 시즌에는 수비적 불안을 노출했고 결국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단순한 승리 이상의 아름답고 공격적인 축구를 원하는 팬과 구단을 생각하더라도, 뚜렷한 대책 없이 공격적인(그리고 스타인) 선수들만 배치한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순 없다.
(△ 충격에서 빨리 헤어나야 한다는 베니테즈 감독. 당장 경질이 되진 않겠지만 반전이 없다면 경질이 멀지 않을 것이다. 출처: 레알마드리드 홈페이지)
능력이 없는 지도자가 뚜렷한 철학 없이 팬들과 구단의 여론을 무작정 따르면 어떤 결과가 나는지 보여준 경기였다. 선수들 역시 ‘선장’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경기를 망치고 말았다. 베니테즈는 여전히 레알에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만, 시즌 중 가장 중요한 경기들은 우승을 다툴 라이벌 팀들과의 맞대결이다. 이런 강팀은 팀을 관통하는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베니테즈의 레알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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