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5. 11. 23. 일요일.
날씨 흐리다.
오늘도 나는 은근히 지치고 피곤해서 바깥에 나가지 못한 채 아파트 내 방안에서만 머문다.
컴퓨터를 켜서 내 고교 여자 친구의 카페에 들어가서 예전에 내가 쓴 글을 찿아내서 읽다가는 아래 글을 보았다.
2001. 8. 20.에 쓴 산문일기이다.
퍼서 '삶의 이야기방'에 올린다.
나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 화망에서 1949. 1. 21. 쌍둥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산골에서 살던 내 이야기이다.
이런 류의 산문은 무척이나 많다. 그냥 다다닥하면서 컴퓨터 자판기를 누르면 되니까.
글 읽다가 아무래도 문학지에 올린 것 같아서 확인하니 책에 올랐다.
제목을 바꿔서.
* 아래 '불씨'는 원 제목
<한국국보문학> 2018년 3월호 (통권 115호)에 수록되었다.
제목 : 1950년대 불씨
불 씨
최윤환
사십 칠팔여년 전의 일을 생각해 본다. 당시에 人力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의 하나가 바로 어둠이었다. 해가 져 어두어지면 불을 켜지 않는 한 깜깜한 밤에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결국 일찍 잠을 자야 했다.
빈촌에서 살았던 아이들은 낮에 신나게 놀았으며 그 피곤으로 저녁밥 수저를 놓기가 무섭게 밥상머리에서도 잠이 쉬 들었다. 머리통이 더 여물어 學童이 된 아이들은 등잔불을 켜 놓고 교과서를 읽고 싶어도 책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숙제가 끝난 것을 확인한 어머니가 "지름단다. 일찍 자거라"라고 말씀 하시면 이를 거역할 수 없었으며, 어린 소견에도 기름값이 수월찮다는 것을 익히 알았다.
'지름'은 '기름'의 사투리이며, 지금도 서해안의 사람들은 'ㄱ'을 'ㅈ'으로 발음한다.
산골 아이들은 나름대로 기름을 아끼는 지혜를 가졌으며, 돈이 없어도 불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길 정도의 대나무 막대로 얼기설기 엮는 싸립문 틈새로 내다보이는 황씨네 종산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아람들이 소나무가 많았다. 이 왕솔밭에 몰래 들어가서 붉은 색의 밑잔둥 뿌리가 있는 나무만을 골라서 괭이로 흙을 파내고 붉은 뿌리만을 골라서 톱으로 흠집을 내고 다시 자구(農器具의 일종)로 찍어 냈다.
이 나무뿌리를 땅위로 곧게 세운 뒤 자귀로 살짝 내리 찍으면 나무뿌리는 곧게 직선으로 잘 뽀개졌다. 붉은 송진이 제대로 총청히 밸수록 자구날이 잘 먹혔다.
이 왕솔뿌리를 '관솔'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낱개로 태워 불을 지피웠으며 이 불빛으로 어둠을 조금은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송진 타는 냄새와 그으름은 밀페된 방안에 있는 아이들의 코와 눈을 맵게 하였기 때문에 방문을 열어 놓지 않은 한 오래 태울 수는 없었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들지름(들기름)을 종재기에 담고, 한지(문종이)로 손끝으로 꼬와서 길게 만든 심지에 불을 붙으면 들기름 타는 냄새와 함께 어둠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제삿상을 준비하는 날의 밤에 부엌의 '살강'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종재기에서 불을 밝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등잔불을 켜는 것이다. 등잔은 한 손으로 쥘 정도의 조그만한 크기 - 흰색 사금파리- 로 물을 담는 그릇이며 또 뚜껑이 있다. 등잔은 백토를 불에 구워서 만들었으며, 그 뚜껑 가운데에는 가느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이 구멍에 헝겊를 잘게 찟은 뒤 손가락으로 돌돌돌 말아 꼬아서 만든 심지를 힘들여 박았다. 뚜껑의 구멍 밖으로 심지가 조금만 겨우 나오게 한 뒤 불을 붙었다. 석유(등유) 타는 냄새와 함께 검정 끄름이 방안에 서서히 퍼졌다.
서해안의 이름없는 면 소재지에 가는 길목에는 - 일제시대에는 장터 - 삼거리가 있었으며 이 삼거리에는 기름집이 있었다. 모친은 오일장(2일장, 7일장)날에는 십리길의 읍내에 걸어 나가 장거리를 보고 귀가 길에는 이 기름집에 들려서 기름 한 병을 샀다. 기름장수는 커다란 드럼통 속에 - 함석으로 만든 - '자새'를 깊숙히 넣은 후 가느다란 쇠줄로 만든 고리(손잡이)을 상하로 잡아 당기거나 밀어서 공기의 압력으로 펌푸질을 하면서 이 자새를 통해서 석유를 조금씩 퍼 올렸다. 자새를 빠르게 잡아 당길 때마다 삑삑! 쇠소리와 함께 석유가 쏟아져 내렸으며 기름장수는 석유 한 방울이라도 땅에 흘릴세라 비루병(요즘의 맥주병) 또는 대두병(술병)에 부었으며 대두병의 무게는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당시에는 기름이 귀하고 비쌌으므로 맞돈 내고 사온 석유를 사용해야 하는 촌민들은 등잔불은 조금만 켰다.
등잔불은 방안에서도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불꽃이 흔들리며 쉽게 꺼졌다. 더우기 바깥으로 볼 일을 보러 갈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등잔불을 이용했다. 심술 사나운 바람이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등잔을 들고 한손바닥으로 바람막이를 해 주어야 불을 꺼뜨리지 않고 겨우 수십 보행를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불을 꺼뜨리지 않고 오래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사면을 유리벽으로 막은 네모의 나무상자의 속의 가운데에 등잔을 넣으면 웬만한 바람에도 등잔불은 제법 오래 버티었다. 이 상자는 한 뼘 정도 길이의 네모진 판목에 가느다란 홈을 길게 판 후 이 틈새로 유리를 끼워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나무상자 안의 등잔도 바람이 조그만 드세게 불면 나무 틈새로 몰려온 바람으로 등잔불이 위태롭게 견디다가는 급기야는 꺼져버렸다.
이를 개선하여 다시 등장한 것이 호야등(남포등)이다. 몸체가 둥근 원형의 유리이다. 위 아래의 구멍이 터진 호야등은 거센 바람이 아닌한 오래 불이 켜져 있었다. 다만 석유가 너무 헤퍼서 자주 이용하지는 못했으나 밤마실을 갈 경우에는 아주 요긴하였다.
불과 관계되는 또 다른 기억을 회상한다. 사십칠팔년 전 그 당시의 농가에서는 연엽초(담배)를 대량 재배하였다. 파초잎과 같이 잎사귀가 크고 긴 잎사귀를 따서 야외 헛간 등 그늘에서 바싹 말린 뒤 면소재지에 지게로 지고 날라서 공출하였다.
궐련을 사 필 형편이 안 되는 머슴들은 공출하기 이전에 양질의 담배 잎사귀 몇 잎을 골라서 별도로 보관하였다. 쌈지담배가 떨어지면 별도로 보관하였던 누런 잎사귀 한 잎을 꺼내서 양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가면서서 아주 정밀하게 돌돌돌 접어 말았다. 그런 연후에 잎담배를 木枕 위에 놓고 왼손 두 손가락으로 누르고, 오른손에 쥔 날카로운 주머니칼로 정성들여 잘게 썰면 제법 많은 양의 연엽초가 만들어졌다.
이 연엽초를 쌈지 주머니에 넣어 두고서 때때로 입안이 궁금하면 곰방대에 연엽초를 꾹꾹 눌러 다진 뒤에 화로나 아궁이의 잿불에 불을 당겨서 담배를 피우던 잉꾼(일꾼의 사투리)이 생각났다.
잉꾼 할아버지는 바같 사랑방의 부엌 아궁에 군불(쇠죽을 끓이기 위해서)을 때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불씨를 만들었다. 그 불씨를 만드는 아주 방법이 특이했다. 쌈지속에서 조그만한 크기의 차돌과 약간의 잘게 부순 솜를 꺼냈다. 양 손에 쥔 차돌끼리 세차게 부딛치면 미세한 불꽃이 튕기었다. 몇 차례 끈질기게 부딛치면 어느새 솜털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입김 바람을 조심스럽게 내뿜었으며 시간이 지나 조금씩 세게 불수록 불꽃은 거짓말같이 더 커졌다.
아이들은 그게 신기하여 알으켜 달라고 해도 잉꾼 할아버지는 웃기만 하셨지 아이들에게 그 솜을 보여주거나 직접 만져 보게는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은 잉꾼 할아버지처럼 불씨를 만들어 보려고 차돌팍(차돌맹이)을 줏어서 차돌맹이 끼리 세게 부딛치면서 생기는 찰라의 불꽃이 목화솜에 붙도록 몇 차례 시험을 해 봤지만 결코 성공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왜 목화솜에 불이 붙지 않았나에 대한 이유를 몰랐다. 나는 최근에서야 그 솜에 대해서 짐작을 한다. 잉꾼할아버지가 불씨를 만들었던 솜은 쑥을 말린 후 잘게 부벼서 만든 쑥솜이였으나 우리가 만든 솜은 집에서 재배하던 목화솜이었다고. 목화솜으로는 불이 잘 붙는 것인지 아닌지를 아직도 모른다. 아마도 당시의 아이들이 차돌을 잘 부딛치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이 쉰을 오래 전에 넘긴 나로서는 불씨에 관해서는 흥미도 없다. 더우기 끽연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불씨가 필요치 않거니와 설혹 불씨가 필요하다면 그 옛날 차돌팍으로 불씨를 만들려고 애를 쓰던 그런 방법으로는 전혀 만들지 않는다. 그 흔해빠진 가스라이터로 쉽게 불씨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간단한 차돌맹이로도 불씨를 얻던 옛날이 그리워지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2001. 8. 20. 글 씀
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