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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 이사 49,3.5-6
제2독서 : 1코린 1,1-3
복 음 :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연중 제 2 주일을 맞아 복음에서 요한이 전하는
주님 세례 사건과 요한의 그분에 대한 증언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고,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유다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친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시대 변화의 한 가운데 선 인물입니다.
정통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입니다.
밉기 짝이 없는 인물.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밉지요. 그러나 그는 자기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으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듣는 것처럼 세례를 준 사람,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그는 외쳤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에서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바치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혹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할 때, 그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자기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이어서 요한은 증언합니다. 그분, 자기 뒤에 오시는 분, 예수님이 바로 그분, 구세주라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듣지요. 그의 고백을.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노라고.
그래서 제자들을 시켜 묻게 했지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메시아이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이제 그는 알았고, 알았기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찬미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깨닫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녔던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도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지요.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과 증언을 들으면서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첫째는 세례자 요한의 열려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깨어있는 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며 스승으로 삼고 추종했지만
자기 뒤에 오시지만 자기보다 더 앞서신 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낮출 수 있었던 그 겸손입니다.
그것은 실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겸손은 어려워.’ 누가 불렀지요? 조영남 씨입니다. 그의 노래 가사 중에는
“겸손하지 못한 점 하나 빼놓으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겸손은 어려워”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하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였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분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요한에게 듣는 증언입니다.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대목이 바로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보았고 알았고, 그래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증언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우리도 요한처럼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십니다.
믿음의 눈을 지니기만 한다면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요한이 보았던 그 광경,
성령이 내려와서 주님, 바로 예수님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한처럼 증언해야 합니다.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작은 형제회의 유명한 까를로 까레또 수사님이 쓴 책 중에
‘나는 찾았고, 그래서 발견했습니다.’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리치아르레토라는 작가의 ‘나는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에 대한 항변으로 붙인 제목입니다.
까레또 수사님은 물음을 던집니다. 왜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일까?
찾는 대상이 바로 하느님 그분이었는데도.
“나는 하느님을 찾았는데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늘 그럴 수 있지요. 저는 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무디게 지닌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까르또 수사님은 너무나 순수하신 분,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태양을 바라보면서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그는 리치아레또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나는 당신 책의 제목을 보았지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바다에 가서 옷을 벗고 해변으로 다가가서 바닷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다음에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지요. 그러다가 헤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물 에 있다가 나와서 당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물을 찾는데 물이 어디 있나요? 물이 무엇인가요?”
히브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물고기가 맨 마지막에 보는 것은 물이다.’
까레토 수사님은 말합니다.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물고기와 같아서 물을 잃게될 때에야 물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고.
그렇지요. 사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때는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하지만, 뭔가가 잘 안되어 갈 때
어떤 전율을 느끼며 그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때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지니지 말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사랑을 느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다가가서 그분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을 읽다가 저자가 수도원에서 피정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매일 바치는
시간경이라고 하는 성무일도를 함께 한 체험을 적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바쳤던 기도보다 훨씬 길고,
또 시편이 주를 이루기에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심이 깊지 않고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 한 번 참석했다가
끝나자마자 지쳐 쓰러졌다고 자기 책에 적었습니다.
아마 이 작가의 글을 읽는 사람은 성무일도를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기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성무일도를 바쳐온 저로서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것과 30년 넘게 해오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인이라면 그 누구도 매일 아침 씻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머리 감기도 너무 어렵고
무서웠던 일로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좋아하는 연인도 처음에는 만남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만남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이 어색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고 또 주님을 많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질수록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합니다.
거친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모두의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자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본인 스스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했다.”(요한 1,31)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예수님의 인기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였습니다.
요한의 말 한마디면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겸손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라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1코린 1,3 참조).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울 것’이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 형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언하며,
성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줍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먼저, ‘첫 번째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부릅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이레”,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에서 보듯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제사에 쓰기 위해 준비한 ‘제물’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7; 레위 23,5-6; 신명 16,1-7)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죽음의 재앙을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입니다.
셋째는 “아자젤”, 곧 대신 죽는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사나운 맹수들이 위협할 때마다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주었고,
가나안에 정착 후에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제의로 바쳐지면서(매년 7월 10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보냈던 “아자젤”, 곧 ‘속죄양’입니다.
넷째는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묵시 5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함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신 분”(묵시 5,13)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따르는 우리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뒤에 오신 분이지만
당신보다 앞서신 분이요, 이미 전에 증언한 분이요,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다음,
‘두 번째 증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는 먼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2-33)라고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이 존귀하신 분,
곧 아버지의 권능이신 성령으로 도유 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생명의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신적 생명이 자라고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옷 입듯이 입었고(갈라 3,27),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일인지요!
그러니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활짝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내어 주고 피 흘려 죄를 없애는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서 위하여 바쳐지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주일: 가해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명을 참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화답송의 내용을 잘 묵상하여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순명과 희생의 신비이다.
그분은 순한 어린양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이사야서는 야훼의 종의 노래 둘째 노래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이사 49,5-6).
야훼의 종의 활동은 이스라엘의 재건뿐 아니라 땅 극변의 모든 민족에게 이르게 된다.
즉 구원은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해줄 것이다.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이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의 모든 증언의 핵심이다.
이 ‘어린양’의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과월절 어린양(탈출 12,1-28)과 연관을 지어 해석하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탈출 29,38-46)과 연결해 생각하기도 하고,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 7)라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과 관련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의미는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희생되심으로써
결정적 파스카를 성취하여 실현하는 고통 받는 종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29절) 것이다.
여기서 없애다(희: árein)는 말은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의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본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거룩한 때를 시작게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참조: 1요한 3,5-6).
또 이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사야는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2) 하고 있다.
이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그분과 같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거저 내어 주시고,
당신의 겸손과 순명과 무구함을 통해 종의 사명인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 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
즉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이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선물들, 특히 세상의 죄를 태워버릴 성령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반드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사가는 십자가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9,34.36).
이것은 과월절의 어린양(탈출 12,46)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해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의 뿌리 즉 죄를 없애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단수로 쓰였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러 오신 것은
어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바로 죄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우리가 모두 그분의 도움으로
영적 물질적 구원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길, 순진무구함,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어린양에 대한 증언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닮아 우리 자신 또한 구원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전해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만국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서도 드러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닦으시고’라며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그냥은 외우기 힘든 것도 곡조를 붙이면 외우기가 수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학생 때 조선의 왕 이름도 그렇게 외웠고, 어려운 원소기호도 그렇게 외웠습니다.
100명의 위인 중에는 왕이 많았고, 장군도 많았습니다.
학자와 선비도 있었고, 스님도 있었습니다.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었습니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도 있었습니다.
제게 가장 인상적인 이름은 ‘순교 김대건’입니다.
노래 가사를 만든 사람이 천주교 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사가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대한민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최근에는 예술 분야에서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감동의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빛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었던 이승훈 베드로가 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머나먼 땅에서 사목을 하다가 순교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인 첫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이 있습니다.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던 정하상 바오로,
여성 전교회장 강완숙 골롬바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생이별을 하며, 관노로 제주도에서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가 있습니다.
얻어먹을 것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꽃동네’를 일구어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의 쉼터를 만들었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참된 사제의 길을 보여주었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아름다운 참 신앙인들이 있기에 교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렸고, 앗시라아로,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담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의 눈으로 보았고,
언젠가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바리사이파 사람, 율법학자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 명예, 재물,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권력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경쟁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욕망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예수님의 허물과 단점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분의 신분, 학력, 직책이 먼저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가 많았습니다.
성공, 성장, 물질,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절망 속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명예, 권력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잡아 가두어야 했고,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고,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매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신앙이 언젠가 교회를 빛낸 위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수행자, 성소자, 증언자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참으로 오랜만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많은 국민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주인공의 영화, ‘영웅’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사형을 앞둔 아들 안중근 도마에게 보낸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입니다.
동영상을 대할 때마다 코끝을 찡하게 하며 눈물짓게 하는 장면입니다.
너무 감동스러워 두 번째 강론에 인용합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은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제가 주목하는 것은 조마리아 어머니의 신앙입니다.
흡사 마리아 성모님과 예수님 母子 사이처럼 느껴지는
조마리아와 안중근 도마 모자의 관계입니다.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 없이는, 사랑 없이는 이런 마지막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안중근 도마 역시 얼마나 신앙으로 무장된 인물인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안중근 도마 의사의 죽음은 말 그대로
순국殉敎의 죽음, 순교殉國의 거룩한 죽음입니다.
또 한 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2022년 12월31일 향년 95세로 선종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아마 참 좋은 선종의 죽음보다 이웃에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선종의 죽음은 그대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삶의 요약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황님께서 마지막 남긴 임종어로 그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도 이와 똑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주님의 증언자로 일관된 삶을 사신 성인 같은 교황님입니다.
프란치스코 현임 교황님과의 형제적 우정의 사랑도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베네딕도 교황의 ‘나의 영적 유언서’ 내용도 감동적입니다.
겸손과 진실,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유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님의 증언자로 한 점 부끄럼 없는 최선을 다한 삶이셨습니다.
-“1. 감사입니다.
우선 언급되는 것이 하느님께, 부모님께, 이웃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 용서입니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3. 믿음입니다.
교회의 모든 이에게 믿음에 대한 당부입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그의 몸입니다.
4.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되이 요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원한 거처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모든 이에게 날마다 나의 진심어린 기도가 향할 것입니다.”-
참 겸손하고 아름다운 평생 삶이 요약된 유언입니다.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발광체 주님을 잘 반사한 반사체 증언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긴 유언이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침 예전에 어떤 자매가 들려준 임종시 남편의 고백, 세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 고맙다, 2. 미안하다, 3. 사랑한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 모든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사후에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고백은 마지막 임종시
하느님께 드려도 참 좋겠다 생각되어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내적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자유롭고 부요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세 가지 답을 찾아냈습니다.
첫째, 주님 사랑의 수행자修行者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세례자 요한은 물론 모든 성인들의 예외 없는 공통점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승들에게
세상에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 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려고 노력한 분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려고 노력한
가톨릭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교황님은 진리의 협조자라는 주교 문장처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그분의 협조자로 사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물론
모든 성인들이 다음 제 기도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하느님께 불림받은 주님의 성소자聖召者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존재근거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불림 받은 존재로
하느님 뿌리에 닿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엄한 품위의 근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화답송 후렴이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를 새삼 확인하게 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수행자의 삶에 항구할 때
우리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불림 받은 성소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은 받은 바오로가 그 성소의 그 좋은 모범이며
다음 사도의 말씀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께 불림받은 주님의 종은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 됩니다.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또한 불림받은 성소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소를 깨닫는 주님의 종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제 연중1주간 토요일 아침 성무일도시 베드로 2서 독서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가 얼마나 큰 은총의 선물인지 깨달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또한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2베드1,10-11)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證言者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언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알게 되어
저절로 주님의 증언자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소자에 이어 주님의 증언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가 그 좋은 증언자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태양처럼 결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발광체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일 뿐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은 바로 반사체의 삶입니다.
사랑의 수행자의 삶에, 주님의 성소자의 삶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증언자의 삶, 반사체의 삶입니다.
바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모든 성인들은 물로 우리 역시 이스라엘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과연 주님의 영광을 잘 반사하는 반사체로서의 증언자의 삶인지 반성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는 참으로 주님을 잘 반사하는 증언자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한 요한 세례자인지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알아보고 고백하며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감격에 벅찬, 주님의 빛을 찬연히 반사하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일러 주셨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자의 모범이 주님의 종인 복음의 요한 세례자, 그리고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의 증언자 되기에 앞서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사랑의 수행자였고,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달아 알았던 주님의 성소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확연해졌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수행자, 주님의 성소자, 주님의 증언자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엄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ㄷ).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부활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느님이 그분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버려두셨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성서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그 시대 유다인들의 해방절 관행을 상기시킵니다.
유다인들은 해방절에 어린 양(탈출 12장 참조)을 잡아 성전 구내에서 피를 흘리고,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어린 양’의 희생 의례를 참고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해방절에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代價를 치렀다는 믿음이 발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어준다.”(마르 10,45)는 말씀도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오늘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과거 사회에서 사람들은 높은 사람 덕분으로 산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백성은 임금의 聖恩을 입고 삽니다. 고을의 주민은 원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원님이 사람 하나 죽이려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쉽게 수긍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한 예수님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치러주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일은 그 시대의 관행입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다릅니다.
오늘은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결정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관행도 오늘은 없습니다.
몇 년 전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한국 선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사회의 관행이 아니라, 해적이 하는 蠻行이고 범행이었습니다.
그런 범행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소탕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은 인간 각자가 자기의 삶을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 세상입니다.
지위와 재물이 있다고 남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人權은 이제 우리 사회의 기초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런 현대인에게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인물이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현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서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방절 관행을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율법준수와 성전 제물 봉헌을 강요하던 유다교 당국에 맞서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버려진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외면당한 이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다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사람을 물에 잠기게 하는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 안에 잠기게 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고,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설립도 성서는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
그분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니,
이는 내 것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시겠기 때문입니다.”(16,13-14)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며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신아인에게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그것을 돋보이게, 곧 영광스럽게 하시는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失意와 절망에 빠진 병든 이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면서,
예수님은 그 불행들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고치고, 돕고, 살리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십니다.
인류는 심판하고 벌주는 하느님을 즐겨 상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에 준한 상상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운 하느님을 버리고,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
곧 고치고, 돕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라고 부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