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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 13:12~17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 13:18~20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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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주’와 ‘선생’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겼으니 그들도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보냄받은 자를 영접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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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 13:12~1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들에게 생생한 교훈을 전하십니다. 세족식을 마치신 예수님이 겉옷을 입으시고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선생’ 혹은 ‘주’라고 불리는 그 지위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13~14절). 예수님의 행위는 높은 자가 마음을 낮추지 않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희생의 본’입니다. 당시 사회가 계급 사회였음을 고려할 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겨 주도록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15절). 그리고 보냄을 받으신 종으로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16절).
● 더 깊은 묵상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몸과 마음을 낮추어 섬겨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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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 13:18~20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다 아십니다(6:70).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어떤 인물인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뜻밖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까운 자의 배신을 언급한 시편 말씀의 성취입니다(시 41:9). 가룟 유다의 배신이 일어나면 다른 제자들이 당혹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일에 대해 예고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그’인 줄(19절,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 이것이 신앙의 초석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믿고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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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는 사랑
호주 북부에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생성된 ‘에어즈 록’(Ayers Rock)이라는 거대한 모래 바위가 있다. 호주 원주민들은 그 바위를 ‘울룰루’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늘이 지나간 장소’라는 뜻이다. 호주 교민인 수필가 남홍숙 씨는 울룰루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그늘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밝힌다. “그늘 속에는 슬픔, 아픔, 고픔이라는 세 결핍이 산다.” 그 그늘은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고마운 그늘이 아니라, 영혼을 우울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음습한 그늘이다. 그런 그늘을 운명처럼 견디며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그늘을 없애 주려는 이들이 아니라, 말없이 그들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염려하여 애태우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이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린다. 그래서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그늘 또한 짙어 간다. 하지만 사랑은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을 허물며,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새로운 현실이 태어난다. 슬픔, 아픔, 고픔의 자리에 선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는 일이다.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은, 먼저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 김기석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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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13장 14~15절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르는 자가 제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가장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것을 만지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죽임 당하셨고, 죄 없는 분이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그 섬김으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질긴 교만은 오직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으로만 끊어질 수 있다. - 레이먼드 브라운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은 섬김으로 본을 보이셨는데 저는 높임받고 대접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종으로서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믿음을 흔드는 상황과 시험 앞에서도 저를 강건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계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게 하소서.
요한복음13:12-20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제자는 섬김의 삶을 살때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제자들이 선생 혹은 주인의 발을 씻기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가 가져야 할 삶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겸손과 섬김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 셨다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말씀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하는것은 섬김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과같이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기 바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과 같이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기 바라셨다는 말씀에는
다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는 제자의 삶을 살때 행복한 삶을 살고 그러나 제자가 주인의 삶을 살면
불행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1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절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이라"
여기 종이 주인 보다 크지 못하고 에서 종이 복이 있으려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이 되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이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면 그 종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 행세로 교만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그 종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같은 의미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겸손하면 그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낸자 처럼 행동하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 그리고 보냄을 받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종이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정체성을 기억하여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았던 사람중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종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복 된 분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12~17절).
예수님은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자신이 선생님과 주님으로서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말씀하십니다.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삶으로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본받아 서로 발을 씻어 주며 섬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금 분명하게 밝히십니다(16절). 예수님이 행하신 섬김의 실천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주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17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셨지만, 그 권리와 혜택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직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인과 선생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종이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군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내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영적 자유를 얻은 자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짊어지고, 사랑으로 겸손히 섬기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 내 자신의 정체성임을 알고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삶이어야 합니다(18~20절).
예수님은 시41:9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선택한 열두 제자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고, 제자 중의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시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제자들이 믿게 하려는 것(19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2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배신하는 가룟 유다까지도 포함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사랑을 몸소 보여 주신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믿음의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이 아직 죄인일 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언약을 이루어드리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성도들이 유대인이나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명심해야 되는지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모범
예수님은 주와 스승이시면서 친히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심지어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그것은 제자들도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어 발을 씻어주라고 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 적대하는 사람까지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나 직분자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열심히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자기 이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클 수 없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클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도들은 언제나 자신이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삶을 드렸는데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보다 더 높고 부유한 지위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그런 자리에 있을 때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배신자는 가까이에
예수님은 이미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다.
시편 41편을 인용하셨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배신을 예견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올 것을 알고 계셨다.
교회를 넘어뜨리거나 걸림돌 역할을 하는 사람은 초신자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어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언제나 종의 위치에 서서 낮은 자로서 섬기는 성도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다.
쓰임 받는 사람들이 더 겸손히 종의 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일 때 교회는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섬김의 자리를 찾으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할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13:12) 예수님께서 주가 되심에도 종처럼 겸손과 사랑의 도를 보여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도 그 본을 따라 행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그러므로 우리가 주처럼 섬기는 자로 있는 것이 옳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겸손과 사랑의 멍에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쉼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6~17) 누가 복을 받겠습니까?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시34:12)
바로 주의 겸손과 사랑을 닮아 성도의 발을 씻으며 곤고한 자를 도울 줄 아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입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5:10)
참으로 주의 말씀대로 주의 겸손과 사랑의 본을 따르는 자에게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9:1~2)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눈에 띄는 주의 교훈에 충성하는 복된 자 되기 원합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영접(20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외에는 모든 것을 허용하셨는데,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그 권위에 대항하려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죄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처음부터 그 죄가 허용되지 못하게 만들지 못하셨을까?’,
늘 되묻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하게 하는 주제입니다. 완벽하고 온전한 교회가 있다면 부족한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 다시 불완전하고 부정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주님은 결국 배반할 가룟 유다라는 제자를 처음부터 허입하고 그를 권면하고 가르치고 그 발까지 씻으심으로, 근본적으로 이 세상 가운데 교회가 불완전할지라도, 믿는 자들이 온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시편 41편의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41:9-11)’
말씀이 당신의 삶을 통해 이뤄지게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이 시험을 이겨내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그분을 보내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자로 살아갈 힘과 능력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초대와 끝까지 충성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축복 가운데 거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15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서로 발을 씻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섬길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섬김을 형식적인 겸손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조심해야 할 유형이 있습니다. 계산된 겸손으로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진정으로 낮아져서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계산된 겸손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겸손의 행동을 한다면 발을 씻기는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발 씻는 사건의 온전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이런 일을 행하기 전에 너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종이기에 주인이 명하는 명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에게 종이란 표현은 억울하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종이란 예수님에게 속한 자요, 그의 인도를 받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다스리는 자가 누구인지 온전하게 인정한다면 그의 종이 되는 것이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4-16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표현을 하고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표현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향기의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편지의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결단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는 것만이 아니라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행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떠한 일들(주일을 지키는 것,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등)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행한다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 즉,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바울은 이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시면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자랑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질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께 죽기까지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낮아짐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낮아짐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며 성도들에겐 격려와 힘으로 전달되길 소원합니다.
본문(21-30절)은 가룟 유다에 관한 공통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18절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이것은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팔레스타인의 문화에서 어떤 사람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우정의 표시이며, (왕과 신하 사이에는) 충성의 행동입니다. 시편 41편 9절은 다윗의 시로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히도벨입니다. 그는 다윗의 가장 신실한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다윗의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다윗을 돕기보단 압살롬을 도왔던 자입니다.
압살롬의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인해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의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아히도벨의 제안을 압살롬이 무시하자 아히도벨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집으로 돌아가 목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히도벨이 자결했다는 사실을 시편 41편을 통해 인용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도 결국은 목매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동안에 함께 했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지속해서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온전히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고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들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사상과 꿈과 유익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꿈치’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의 배신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담의 배신을 통해서 인간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가룟 유다의 배신의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이 여인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발 씻기는 사건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의 비밀과 그의 낮아지심의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비밀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복음을 향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아무리 따라다닌다고 해도 아무런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성공의 도구로, 복음 받는 방법으로 믿는다면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입니다.
우리들은 심각하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내가 본 것, 경험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있는가? 오직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오직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구원의 감사와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풍성히 누리길 소원합니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8~29)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왕상 19:21)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삼하 15:12)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0~33)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우리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낮아지시고,
불같은 사랑으로 겸손히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본을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겸손히 나아가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이끎을 받는 인생 되게 하심에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만을 바라보는 복된 인생으로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 가운데 보내어진 그 뜻을
넉넉히 감당하는 제자의 삶 살아가도록 날마다 힘과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어둠과 죄를 향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시는
선교사님들의 모든 발걸음 위에 기름 부어주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에
부족함이 없도록 동행하여 주시고 풍성하게 그 필요를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고통, 수많은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아버지의 자비로 회복과 치유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과 소망을 붙들고 사랑으로 행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겸손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