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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무림(靑春武林) ] 제 11 장 군림대회-2
그러한 속에... 밤(夜).
“핫핫핫핫핫...!”
사자전에서 역시 관례에 따라 유목공의 주최 하에 대회의 승리자들과 천하각처의 무림 명숙 등, 이백여 명의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새롭게 임명된 백대봉공을 축하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같이 자리를 같이 못한 명숙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는 자리기도 했다.
따라서 평소 엄숙했던 사자전의 회의실에는 기름진 안주와 미주(美酒), 그리고 천하명숙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살펴보자면 유목공을 위시한 육대당주 등 철기보의 주요 간부들, 대회를 주관한 칠대문파의 인물들과 대회를 승리로 이끈 각파의 대표들,
황보세가주 서호일선(西湖一仙) 황보욱(皇甫旭)을 비롯한 서문세가주 금천수라(琴天修羅) 서문협(西門峽) 등 세가의 인물들,
대회를 주도하기 위해 초빙되거나, 혹은 설혹 봉공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제각각 선출한 사람을 응원, 보호하기 위해 함께 온 각처의 대표들 등이었다.
그야말로 천하의 쟁쟁한 인물들이 대다수 한 자리에 모인 것!
유목공의 얼굴에 연신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헛헛... 다시 말씀드려도 참으로 감회가 새롭구려. 본좌가 무림맹을 맡은 지가 어제 같은데 어느새 벌써 이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여덟 번째의 군림대회를 치렀으니...! 돌이켜 보면 그간 무림이 이만큼이나 안정된 것은 모두가 여러분들의 덕택이 아닌가 싶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좌중의 인물들도 분분히 포권을 취하며 웃었다.
“우린 맹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랐을 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요.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던 천하가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분명 맹주의 탁월한 영도력 때문인 것입니다.”
“헛헛... 그렇게 여겨주신다면 본좌 역시 지난 세월이 덧없었다 하진 못하겠소. 하나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남아 여러분들과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어느새 몸은 늙고 기력이 쇄했으니...!”
그러자 좌중의 인물 중 하나가 물었다.
“맹주께서 하루라도 속히 짊어져 오신 무거운 짐을 벗기 원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하온데 무림맹이 계속 존속되는 게 좋다고 여기시는지 여쭙고 싶군요.”
무림맹의 존속여부!
유목공은 즐거운 표정으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이야 여러분이 하시겠지만 본좌의 생각으로는 아직까지는 그래야 할 무엇이 있다고 보이는구려. 확실히 무림의 정세는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이 안정이 되었소. 하나 혼천소마 등 아직도 도처에는 많은 사마외도들이 호시탐탐 혼란을 기다리고 있고, 방파간의 대립이 수월치 않은 상태가 아니겠소? 이런 불안정함을 방지하는 차원에서라도 무림맹은 존속됨이 좋지 않을까 싶소.”
유목공은 잠시 호흡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특히 본좌가 무림맹이 존속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소. 바로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한 자리에 모여 거듭 담소를 하고 싶어서인데, 맹이 없어지면 본좌가 언제 또 여러분들과 다시 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소? 존안이라도 한 번 뵐라치면 일일이 천리 길을 가야할 텐데 게으르기 짝이 없는 늙은이라 그게 실로 귀찮다 여겨지는구려.”
“하하하하하...!”
순간 좌중에는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하패주의 가벼운 농담이 모두를 파안대소케 한 것이었다.
또 다른 인물이 물었다.
“하오면 차기맹주의 선출은 어떻게 여기시는지? 항간에 떠도는 말들에 의하면 이번 백대봉공 중에서 걸출한 인물 몇을 뽑아 미리 맹의 일을 맡게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더군요. 이후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을 뽑아 차기를 계승케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들이온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백대봉공 중에서 차기맹주...!
“일 리가 있소. 또한 본좌 역시 그리되야 마땅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유목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기실 역대로부터 무림맹이 일어설 경우는 대다수 천하에 극한의 상황이 발생해 결성되어 왔었소. 본좌 역시 청화의 난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대개가 천하혈사(天下血事)를 진압코자 무림맹이 섰고, 이때 가장 덕망 높은 이인을 맹주로 추대했던 게 상례였었던 것이오. 이후 천하가 안정되면 다시 무림맹을 해산시키거나 했었고.”
유목공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오. 아시듯 천하가 흔들릴 만치 큰 혈사 따윈 없소이다. 이에 무림맹은 마땅히 해산되어야 하나 또한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단계...! 계속 무림맹이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천하를 더욱 안정시킴에 있다고 보오. 한즉 지금은 개인의 역량보다는 천하를 다스릴 강력한 조직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오.”
음성은 온화하고 차분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역시 현 무림에서 여러분보다 강력한 방파를 유지하시는 분은 없소. 특히 누구보다 무림의 정세라거나, 익숙해진 무림맹의 일을 잘 알고 계시기에 역시 이 중에서 후계를 이을 분이 나오시는게 옳지 않을까, 본좌도 생각하고 있소이다.”
조리 정연한 의견이었다.
이에 좌중의 인물들은 다소 미묘한 흥분감이 떠도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연륜이 돋보이는 의견이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중에 세력이 큰 문파가 있다 쳐도 지금처럼 천하를 다스리기는 어려울 터이온데...? 유명무실한 무림맹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야 무슨 문제가 있겠소.”
유목공은 잔잔한 웃음과 더불어 대답했다.
“무림맹이 계속 존속될 경우라면... 본좌가 천하를 위해 마지막 힘까지 보태야지. 본 무림맹, 철기보 산하의 육십 개 향을 그대로 차기방파에 물러줄 작정이오.”
쿵!
순간 좌중의 모든 인물들의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현 철기보의 육십 개 향을 내놓는다...!
이것은 실로 보통 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기실 현 무림맹과 철기보의 가장 큰 힘은 역시 중원전역의 이 육십 개 향에 있었던 것인데, 이미 알려졌듯 그 수효만도 무려 팔만! 하나하나가 모두 일개 군소방파를 넘어서 거의 대방파에 맞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힘이었다.
또한 이는 유목공이 오랜 세월 필사의 힘을 경주해 일으켜낸 무력이기도 했는데, 이런 거대한 힘을 내놓겠다니...!
“그 말씀이 사실이십니까, 맹주...!?”
이에 명숙들은 크게 경악한 표정으로 질문했는데, 그러나 유목공은 변함없이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헛헛... 필부가 여러분을 모시고 어찌 허튼 소리를 하겠소. 본좌 역시 겪고서야 알았지만...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 실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구려. 물론 혼자 해결치 못할 문제가 생겼을 경우 곧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소. 개파 간의 사사로운 다툼이 빚어질 경우 이런 것을 진압하기 위해 맹주령을 내린다는 것도 우습고, 또한 급한 경황에 수만 리를 달려갈 수도 없고...! 천하 각처에 즉각 이에 대처해야 할 분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오.”
“따라서 본좌는 평생에 거쳐 산하에 육십향을 만들어 천하를 안정되게 했소. 한데 본좌가 맹주직을 떠난다고 그 힘을 회수하면 당장 무림의 안정이 흔들릴 것도 분명하거니와, 이를 다시 세우라고 차기 맹주에게 또 이십여 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이에 육십향을 차기 무림맹에 넘기고자 결심한 것이오. 그리하면 천하는 보다 더 빨리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게 아니겠소.”
참으로 덕망 넘치는 이야기...!
“오...!”
“역시...!”
좌중의 명숙들은 이러한 유목공의 어진 생각에 분분히 감탄사를 토해냈다.
기실 이런 결심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유목공은 변함없이 모두를 훑어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허허... 사실 청화의 난 이래, 본좌가 평생을 바쳐온 게 천하의 안정을 꾀함이었고, 육십향을 세운 것도 이를 위함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무엇이 아깝겠소? 더욱이 자식이라고 하나 있어도 도무지 무림사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구려. 해서 본좌는 장차 철기보의 본성조차 어찌될는지 몹시 우려스럽소. 수백 년간 이어져온 가업이 내 대(代)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닐지...!”
“음...!”
좌중에서는 다시 가벼운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천비도룡(千臂屠龍) 유진학(柳眞學)!
기실 천하맹주의 아들이면서도 무림의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그를 모르는 인물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목공이 적지 않게 고심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덕도 높으시고 무공 역시 다시없을 만치 출중하다 들었거늘...!”
유목공의 그늘진 표정에 다시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사실 능력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갖추었다고 여겨지오. 하지만 아무리 호통치고 달래어 봐도 소용이 없으니... 결국 본좌로서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대관절 한사코 무림의 일을 피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온지?”
“피비린내가 싫다고 하더구려. 또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역량조차 없다고...! 거저 초야의 한 평범한 범부로서 생을 이어가고 싶다는 게 전부인 것 같소.”
안타깝다는 듯 다른 한 인물이 말을 받았다.
“의를 위해 피를 흘림은 더 무수한 죽임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억지로라도 대내의 일을 일임시켜 보심이 어떠실는지요?”
“허허허...!”
유목공은 더욱 어둡게 웃었다.
이어 보좌하던 옆의 무사에게 명했다.
“가서 진학을 잠시 들라 하거라. 아무리 무림의 일이 싫다 해도 오신 손님들에게 인사조차 드리지 않음은 크게 잘못된 것인즉 뵙고 가라 전해라.”
그러자 천비도룡 유진학! 곧 달포 전, 저 천룡폭에서 모습을 나타냈던 그가 부름에 따라 온 것은 그로부터 약 일다경 후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변함없이 온후한 모습에 허름한 차림새.
유목공은 이런 그를 크게 나무랐다.
“아무리 네가 무림사에 관심이 없기로 이런 자리에 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부족하기 그지없는 소치인 것이다. 여러 명숙들께서 잠시 너를 보고자해 불렀으니 인사부터 올리거라.”
“죄를 지었습니다.”
유진학은 곧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군웅들에게 포권지례를 취해보였다.
“껄껄... 부르기 전에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옳았을 터이나, 무림과 떨어져 지내온 몸이 갑자기 이런 자리에 나선다는 게 우스워서였으니 부디 양지해 주십시오. 새로이 백대봉공에 오르신 분들께는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많은 가르침 베풀어주시기 바라겠소.”
수백의 군웅들이 주시함에도 전혀 위축되거나 타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호방한 태도였다.
‘역시 빼어난 기도다...!’
군웅들은 그의 기도에 하나같이 크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와 안면이 있는 듯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외다. 유대협의 웅자를 한 번 더 뵙고 싶었기에 청한 것이오니 이해하시기 바라오.”
“별 말씀을...! 뵙고 싶기는 이 몸 매한가지였습니다. 늦게 인사드린 점 용서하십시오.”
여전히 소탈하면서도 타인을 압도해 나가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유목공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명숙들의 안타까운 의견이 있었기로 불렀다. 환담을 나누던 참에 우연히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터이었는데, 여러분이 네 자질을 크게 아쉬워하시더구나. 해서 대내의 일을 좀 돌보게 해봄이 어떨까 하는 말씀이 있으셨는데 생각이 어떠하더냐?”
유진학은 당토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그 말씀을...! 누누이 말씀 올렸지만 그 일에 대해서라면 소자 실로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내의 일이라면 보다 덕이 높으신 분이 맡으셔야지요. 아버님께는 크게 불효한 일이지만 소자는 전혀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다시 좌중의 인물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어여삐 여겨주신 명숙들께 재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몸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나서서는 안 될 자리라 여겨지는바, 그럼 불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휙, 등을 돌려 그대로 장내를 떠나고 말았다.
“저런 고얀...!”
유목공의 눈에 순간 적지 않은 노기가 떠올랐다.
기실 어떻게든 가업을 이어주기를 바라는 그로서는 당연했다.
“허... 거 참...!”
이렇게 되자 좌중의 인물들은 유진학의 기개에 감탄하는 한편 유목공의 노기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하나 여기에서 함께 머뭇대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터, 재치 있는 인물 하나가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헛헛...! 젊은 시절의 맹주를 그대로 대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지요.”
유목공은 잠시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하더니 이윽고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구려. 하나뿐인 자식이 저러하니 본좌 참으로 안타까워서...!”
“아직 무림에 뜻을 두지 않으셔서 그러실 것입니다. 무공과 인품이 모두 훌륭하시니 때가 되면 용이 승천하듯 천하를 호령하실 겁니다.”
그는 계속 유목공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 전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어쨌건 무림맹이 존속될 경우 육십향도 내놓으신다 하셨으니... 하오면 선출된 백대봉공들을 뽑아 직접 대내의 일에 참여하게 해보자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유목공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좋을 수밖에...! 아무리 명분이 무림 안정에 있고, 이를 위해 힘 있는 방파의 인물에게 후계를 잇게 한다 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좋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니...! 편파라는 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미리 공을 세운 인물에게 후계를 잇게 하는 게 좋겠지...! 특히 업무를 돌보며 맹의 일에 더 빨리 익숙해 질 터이니 더욱 좋은 의견이기도 하고...!”
모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명숙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하면 대내의 일을 돌보게 함이란 어떤...?”
유목공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러나 백대봉공의 직무란 크게는 본좌를 도와 함께 중원 무림을 바로 해 가는 것이며 작게는 무림맹이 올바르게 서도록 돕는 것이 아니겠소. 따라서 백대봉공이 모두 무림의 일에 모두 관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한즉 그럴 경우라면 역시 누가 차기 맹주에 도전을 하건 가급적이면 여러분들이 의논해서 몇 개의 조로 나누는 게 어떨까 싶구려.”
“그 말씀은…?”
모두의 눈동자가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이 발언이 곧 차기 맹주가 탄생시키는 가장 중대한 관건이기 때문이었다.
유목공은 이러한 중인들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어느 분이 이 자리를 맡아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하나 공명에 뜻을 두지 않은 분도 많으실 터이고, 출중하다 해도 우리는 때가 되지 않았으니 누가 취임하면 좋겠다,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오. 이런 분들께서는 협의를 거쳐 적임자를 본좌에게 천거해 주시는 것이오. 하면 본좌는 그를 차기 계승자 후보로 여기고 대내의 일에 직접 참여토록 하겠소이다. 무엇을 해서 천하의 인심을 살 것인가는 물망에 오른 후 각자가 계획할 것이며 공로는 정확히 삼년 후 오늘, 이 날짜에 다시 논하면 되지 않겠소?”
삼년 후 오늘!
“경중은 천하 무림인들이 먼저 판단하겠지만, 사실화 시키자면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이 썩 좋겠구려.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던 칠대문파 등 도처의 명숙들이 자리하셨고, 여간해서 대내의 일에 관여치 않으셨던 개방(??)과 황보세가(皇甫勢家)의 고인들께서도 오셨으니...!”
“아...!”
“음...!”
순간 모두의 시선이 중간쯤의 두 자리로 나뉘어 밀집되었다.
그곳에는 황보세가주 황보욱, 그리고 당삼화와 나타났던 거구의 거지노인이 앉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목공은 거지노인에게 먼저 시선을 고정시키며 질문했다.
“개왕(?王), 이는 무림에 중차대한 일이오. 물론 개방은 아주 오랫동안 무림에 별다른 관여 없이 지내 오셨지만... 그러나 이번만큼은 좀 거들어 주셨으면 싶구려. 필부가 은퇴하는 마당, 무림의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오.”
개왕(?王)이라 불린 노인은 술잔을 털어 넣듯 비운 후 껄껄, 웃었다.
“초야의 하찮은 거지가 무슨 힘이 될 수 있겠소이까. 우리 개방은 무림맹이 시작되면서부터 대내의 일에서 손을 뗀 상태인데 새삼 이런 자리에 끼이기도 이상하고...!”
유목공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그 점 또한 자식 녀석의 일과 더불어 본좌가 평생 가장 큰 한으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기실 역대로부터 칠대문파와 더불어 무림의 정(正)을 수호해 오셨던 개방이 무림맹의 출범과 함께 무려 이십 년간... 일체 무림사에 관여치 않고 침묵하심은 오로지 본좌가 부덕한 탓이었던 게 확실한 것이라...!”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들 이젠 다 지난 일이 아니겠소이까? 원인이 된 본좌가 이제 물러나려는 마당이거늘 그럼에도 개방이 원래의 자리를 찾지 않으신다는 것은 실로 유감이오라...! 다 고사하고라도 무림을 위해서 한 번 힘을 보태주시는 게 어떻겠소이까?”
필경 뭔가 비밀스런 내력이 있는 듯한 이야기였다.
개왕은 차분히 황보욱을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노부조차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십년이 걸렸으니...! 정히 맹주의 의향이 그러하시다면, 마침 오랫동안 문을 닫고 계시던 황보가주께서도 참여 하셨고... 늙은 거지 천상평(千常坪) 역시 조사(祖師)의 유시를 이젠 어겨보기로 하지요.”
천상평...!
순간이었다.
“오...!”
“마침내 개방이!”
좌중에서 분분히 경이의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개방이라면 역대로부터 칠대문파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림의 태산북두 자리를 지켜온 대방파가 아닌가?
따라서 개방이 무림맹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누가 봐도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지금의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처럼 보여 지니 실로 기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내막이야 어찌되건...!
“참으로 고맙소! 개왕!”
가장 기뻐한 것은 바로 유목공이었다.
개왕의 승낙이 떨어지자 그는 우울했던 얼굴에 크게 기쁨의 기색을 떠올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개왕의 그 한 말씀으로 본좌, 마침내 지난 이십여 년 간의 한이 사라지는 듯하니...! 어떻게 사의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헛헛헛... 정말 큰 결심을 했소이다, 천대인!”
칠대문파의 인물들 역시 더없이 기뻐하며 저마다 치하의 말을 쏟아냈다.
“세상사란 게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제자리를 찾게 마련인가 보구려!”
하나 무슨 일이 있은 것인지 개왕, 즉 천상평은 오히려 쓴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반갑게 다시 맞아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한들 이 늙은 거지는 선사의 유시(諭示)를 어기게 되어 마음이 그리 밝지가 않구려.”
칠대문파의 인물들은 일제히 흡사 눈앞에 다른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분분히 포권을 취해 올렸다.
“별 말씀을! 무위장문인(無位掌門人) 역시 사실을 알면 지하에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오. 개방이 오늘날 이렇게 적적하게 지내는 것은 어르신의 성품이 워낙 대쪽같고 의리가 높으신 분이셨던지라...! 하나 그 어르신께서도 지금은 아실 것이오. 당시 우려하셨음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정말 그러실지...!”
천상평은 이윽고 크게 심호흡을 해 정색을 되찾으며 유목공을 향했다.
“그래, 하다면 늙은 거지가 맹주께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소?”
유목공은 거듭 기쁨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나온 무림맹의 존속문제와 차기맹주 선출 등에 관한 것을 함께 토의했으면 싶소이다. 어찌하는 게 좋겠소이까?”
천상평은 묵묵히 염두를 굴려본 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장만 해도 혼천소마로 인해 각 문파에 경계령이 내려진 터이거늘...! 현 무림을 보면 맹은 더 존속되는 게 옳고, 여러분들의 의견들도 그르지 않으니 늙은 거지가 무슨 반대를 하겠소. 알아서들 결정하셔야지.”
“오...!”
순간 유목공의 만면에 더욱 커다란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헛헛헛... 개왕조차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십시다! 본좌는 언약을 지켜 육십향을 내놓기로 하고, 여러분들은 의논해 가장 적당한 차기후보를 선출하시고...! 노부는 거저 기쁘기만 하오!”
그러자 중인들은 일제히 웃으며 술잔들을 치켜들었다.
“핫핫핫... 사실이올시다! 정말 기쁜 날 아니겠소? 좀처럼 무림사에 나서지 않으셨던 황보세가가 이례적으로 문을 여셨고, 개방이 다시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소! 여기에 백대봉공이 선출됐고 차기 맹주후보가 선출될 것이니 어찌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겠소?”
“옳소! 이렇게 기쁜 날 크게 취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소?”
“핫핫핫...! 자, 드십시다!”
왁자지껄...!
그와 함께 좌중에는 호연지기가 충천했고, 도도한 주흥과 함께 웃음소리가 사자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
하나 사자전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가던...!
훤백이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추밀원에 위치한 자신의 처소에서 쌓인 장부들을 살피고 있었다.
대개가 무림 도처에서 올라온 솟장과 거기에 대한 처결안, 그리고 무림맹이 행사해온 지난 모든 일들이 기재된 것으로서, 잘못된 점이 없는지 살피는 것도 추밀원의 일중 하나였다.
하지만 훤백이 할 일은 과연 이 문서에 기재된 내용들이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혹은 거짓은 없는지를 알아내고, 부조리와 어긋난 점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훤백은 그렇게 할만한 여력도 마음도 없었다.
도천의 덕분으로 잠시 머물다 간다는 기분으로 앉게 된 자리...!
따라서 명색만 추밀원사였을 뿐, 처음부터 훤백이 나서야 할 일은 거의 없었고, 나설 생각조차 눈곱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응, 잘 정리되어 있군.’
훤백은 대충 쌓인 장부들을 살펴본 후 손을 서탁 위, 장부들과 함께 놓여있는 추밀원의 직인(職印)으로 가져갔다.
검토를 끝냈으니 직인을 찍어서 아침에는 다시 각 부서로 보내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훤백, 안에 있지?”
홀연 바깥으로부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더니 슬그머니 곽나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뭐해?”
“보다시피 문서정리를 하는 중이지. 한데 왠일로?”
곽나영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응, 그냥 혼자 있기 심심해서. 그러는 넌 왜 사자전에 안가?”
“사자전?”
“한창 연회중이잖아. 이야기 듣자니 무림맹 간부들이 다 참석했다던데.”
그러했다.
사자전의 연회에는 현재 새로 선출된 백대봉공과 무림명숙 뿐아니라 무림맹의 주요간부들도 거의가 모여 있었다.
따라서 훤백 역시 사자전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훤백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생각 없어. 알다시피 명색뿐인 추밀원사잖아. 가봐야 할 일도 없고.”
곽나영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가 술 마시는 것도 일이지! 그래야 안목도 키우고 무림고수들도 알게 될 것 아니겠어?”
“그렇긴 하지만,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무림맹에 계속 있을 것도 아닌데. 지금도 더 이상 남아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심하던 중이었어.”
“무슨 소리야?”
곽나영의 눈에 크게 의혹 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 말은 무림맹을 떠나려 한다는 소리야?”
“원래 내가 여기에 온건 곽소저의 영향이 컸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일이 벌어져 버려서...! 낙양의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니 이젠 돌아갈까 해.”
곽나영은 뱅어 같이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훤백의 이마를 콕 찍었다.
“표국의 담장을 넘겨 볼 때부터 끈질기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여튼 대단한 남자야. 금우부의 일도 그렇고... 처음부터 이 정도의 남자인걸 알았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매달렸을 건데.”
훤백은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없는 소리...! 도천형과는 어때? 잘 되어가?”
곽나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성격이 좀 괴벽하지만 생각보다 귀엽고 친절해. 그러나 문제는 나야. 요즘 내가 뭘 하는지를 모르겠어. 분명 그이가 좋아서 난리를 치고 오긴 했지만 막상 오니 그인 늘 바빠서 자릴 비우지, 밤에도 거의 오질 않아. 노상 기다림의 연속이지. 그렇다고 약혼을 한 것도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훤백은 씨익 웃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지만 곽소저는 도천형을 사랑하잖아? 앞뒤가 괴상했던 게 문제지만 어쨌거나 형을 얻었어. 다만 도천형이 워낙 바쁘다보니 심심하고 외로운 모양인데, 그건 곽소저가 이해하라구. 그토록 술을 즐기는 도천형이 연회조차 참석 못하고 지금도 외부 순찰중이잖아.”
“…….”
“나머진 도천형을 만날 때마다 바가지를 긁어! 약혼이라도 하자고 하는 거야. 안 그랬다간 도천형같이 자유분방한 성격에 평생가도 결혼 못할걸?”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해. 그나저나, 넌 정말 그만둘 거야?”
훤백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 이런 보리자루 생활은 내 취향이 아니야. 해보고 싶은 일들도 많고. 사도형님과 의논해서 대충 정리하고 그만두려고 해.”
순간 곽나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사도오라버니도 백대봉공의 서열에 올랐지? 듣자니 금우부의 실제 주인이 너라는 소리가 있던데...! 정말이야?”
훤백은 휙,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언지하로 잘랐다.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는지 절대 잘못된 소리야!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설령 힘이 조금 됐었다 쳐도, 금우부는 그런 것 없이 결국 커졌을 거고. 봤다시피 횡형님도 스스로의 힘으로 백대봉공 자리를 쟁취하지 않았어? 이런 인물이 있는 방파가 어떻게 커지지 않을 수 있겠어?”
이때였다.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다! 금우부가 오늘에 이른 것은 너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렇다 치더라도 금우부라는 이름조차 남았을 성 싶으냐?”
홀연 바깥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며 전혀 뜻밖의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불쑥불쑥, 실내로 들어왔다.
먼저 사도횡과 황보선, 황보소미의 모습이 보였다.
보다 여기에 뜻하지 않았던 세 명의 놀라운 인물이 더 들어섰는데, 황보세가주 황보욱! 그리고 개왕(?王)이라 불리웠던 거구의 거지노인 천상평과 사천당문의 독비접 당삼화 등이었다.
훤백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황보욱에게 먼저 포권을 취해 보였다.
“가주께서 오셨군요. 오랜만에 존안을 뵙습니다.”
황보욱은 보일락 말락, 특유의 실올 같은 미소를 떠올려보였다.
“응, 그래, 그간 잘 지냈나?”
“덕분에...! 이 누추한 곳에 왠일이십니까?”
“무림맹의 추밀원이 누추하다면 천하에서 누추하지 않은 곳이 어디겠나?”
황보욱은 거듭 조용히 미소 지으며 개왕과 당삼화를 가리켰다.
“인사드리도록 하게. 이 어르신은 개방의 대장로(大長老)이신 개왕 천상평, 천대인이시네. 그리고 소저는 사천당문의 독비접 당삼화여협.”
‘개왕 천상평…!?’
훤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기실 개방이 구름같이 많은 괴걸과 기인이사를 거느리고 칠대문파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온 것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닌 셈.
그 중 현 개방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 둘을 꼽으라면 역시 개왕 천상평과 개방방주 궁신(窮神) 이무기(李武幾)를 들 수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본시 전대 개방방주인 무위개(無位?) 전낙소(全落笑)의 적전제자로서 천상평이 사형, 이무기가 사제였다.
전대방주 전낙소는 세상을 등질 즈음 맏형인 천상평에게 의발을 잇게 해 방주직을 물러줬으나, 천상평은 워낙 자유분방함을 좋아하는 호방한 성품이라 의발만을, 직책은 이무기에게 물러주고 대장로의 직위에 앉아 유유자적 천하를 주유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결국 그의 배분은 칠대장문인과 동등한 것.
“말학 훤백,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훤백은 방심할 수 없어 서둘러 천상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천상평은 덩치만큼이나 우람한 눈으로 훤백을 주시하며 미소 지었다.
“자네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었네. 어리지만 잔뜩 꿍꿍이속을 품은 천하의 효웅이라고 하더구먼. 온 김에 잠시 얼굴이나 보고 가고자 들린 것일세.”
천하의 효웅.
대단한 찬사일수도 지독한 욕일 수도 있으나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기 나름.
“과분하신 말씀, 덕담(德談)으로 듣겠습니다.”
훤백은 다시 당삼화, 황보선, 사도횡 등에게 포권을 취했다.
“당여협의 높으신 명성 역시 익히 들었습니다. 더불어 황보형, 사도형, 당소저께도 백대봉공이 되셨음을 축하드리고.”
개왕이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일차에 먼발치로 한 번 본적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여간한 기질이 아니군. 이 나이에 벌써 신광이 눈 속에 갈무리되어 있고 심계가 빛을 발하니 이는 필시 무림의 대복(大福)이 아니면 대재앙이겠어.”
여전히 극찬!
먼발치로 봤다는 것은 서문한랑과의 다툼 당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말씀을...!”
하나 훤백은 한귀로 들어 넘기며 서둘러 모두에게 자리를 권해 둥글게 둘러앉았다. 극찬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어찌된 일이십니까? 사자전에 계셔야 할 시각에...?”
“허허... 남아봤자 술주정들뿐이지. 소란을 피해 온 것일세. 피신한 것이지.”
황보욱이 미소 지었다.
“한데 무심코 듣자니 원사직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구먼. 구태여 그래야할 이유가 있나?"
들어서며 곽나영과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훤백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기분이라 탐탁치가 않아서입니다. 미력한 놈이 남아 도움이 될만한 일도 없고.”
황보욱은 힐끗 황보소미를 쳐다본 후 말을 받았다.
“혼자의 생각이지. 세상에 처음부터 내 옷이란 건 없네. 입은 후에 맞춰가야지. 그렇게 보면 자넨 이제부터 시작 아닌가. 새 백대봉공이 임명되고 차기맹주의 후계까지 거론되는 형국이니 추밀원의 할 일도 전보다 열 배는 더 많아질 거고.”
“…….”
“내 생각엔 역시 도원주 등, 젊은 자네들이 힘을 한데 모아 미래를 도모해 가야 하지 않나 싶어. 특히 상황이 이리된 이상 노부도 이제 더는 무림 일을 수수방관하기 어려워졌고, 자네가 소미와 함께 선이를 좀 보살펴줬으면 마음이 놓이겠다 싶네만.”
역시 찬사 뒤의 대가...!
황보선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대리인을 쓰지 않고 황보형님을 봉공으로 지내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황보욱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아. 대개의 방파에서 대리를 내세우는 경우가 더 많지만 선이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 무림사에 참여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클뿐더러, 달리 내세울만한 대리인도 없는 터이지. 그렇다고 내가 남아 살펴줄 수도 없고... 해서 자네가 계속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일세.”
실상 그리되면 황보선에게는 분명 큰 힘이었다.
백대봉공의 힘이 적지 않다 쳐도 그것은 각종 무림의 사안들에 대한 결정권뿐, 실제 내부에서 가지는 세력이란 전무한 편이었다.
반면 추밀원의 경우라면 무림맹 뿐 아니라 무림 전체를 좌우할만큼 실질적인 내외의 힘을 가진 만큼, 훤백이 남아 황보선을 민다면 당연히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훤백의 생각은 달랐다.
“가주께서 말씀하신 뜻 잘 압니다. 하지만 황보형님의 경우라면 우선 도천형이 계시니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칫하면 오히려 후배가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지요. 기실 후배는 명색만 원사일 뿐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인데 함께 움직이면 황보형님께서 오히려 주위로부터 크게 질시를 살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기도 했다.
“따라서 후배가 남음은, 도천형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덕분에 분수에 넘은 옷을 입긴 했지만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길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고, 여기에 황보형님까지 가세하게 되면 자칫 세(勢)다툼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천상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옳아. 특히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네. 사자전에서 거론된 이야기지만 이번 백대봉공의 취임은 실로 큰 의미를 가졌어. 전 같으면 단순히 각종 사안을 구분하던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파벌이 생기게 된 것일세! 다시 말해 유목공은 백대봉공의 문파 중에서 차기를 잇게 하겠다고 분명히 말했고, 추천하는 인물들을 직접 일에 참여 시키겠다고 했으니, 곧 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파벌을 구축할 것일세. 이런 상태에 추밀원이 황보세가를 감싸는 눈치를 보이면 장차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네.”
사실이었다.
사자전의 이야기를 봐도 곧 백대문파가 차기 맹주 자리를 놓고 치열한 세력싸움을 하게 될 것은 역시 불을 보듯 분명했다.
천상평은 황보욱을 향해 충고했다.
“이젠 몸을 사리는 게 더 중요하네. 혹시 모르지.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차기맹주에 도전하겠다면 추밀원의 힘을 업는 게 좋겠지만.”
황보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배가 어찌 그런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태도를 분명히 해둬야 할걸세. 야심이 없음을 밝힌 후 중립을 지키게나.”
하나 황보욱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는데...!
“물론 그리 하겠습니다만... 하나 후배의 말은 이런 경황이니 더욱 이원사의 지혜가 아쉽기에...!”
훤백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질문했다.
“그 말씀은 차기 맹주 계승에 대한 이야기신 것 같은데...!”
황보욱이 대답했다.
“응, 사실 연회석에서 잠시 그런 사안이 거론되었었네. 차기 맹주의 계승에 관한 것으로 후계에 대한 대안이 세워진 것이지.”
후계에 대한 대안!
“무슨 말씀을...?”
일순 훤백은 크게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 문제라면 무림의 일 하고도 가장 큰 중대사가 아니겠습니까? 한데 술자리에서 그런 대안이 세워지다니...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언급했고 왜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단 것입니까?”
황보욱은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나올 이야기가 조금 먼저 거론된 것 뿐일세만...! 어쨌건 내용은 잡다한 말이 오가다 명숙 중 한 사람이 맹주께 후계에 대한 생각을 물었던 게 시작이었네.”
이어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진행되었던 사자전의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천하무림의 태두들이 다 모인 자리나 같았으니 역시 나옴직도 한 내용들.
하나 내용을 들은 훤백의 눈이 더욱 야릇한 빛을 쏟아냈다.
“이상한 말씀을...! 하다면 결국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신 것은 유목공이지 않습니까? 무림맹이 존속되는 게 좋겠다, 라는 것에서 이어진...!”
“뭐, 그렇긴 한 셈이지. 이야기가 시작된 직후 아드님이신 유진학 대협이 와서 분위기가 흐려졌던 통에...! 이를 호전시키는 의미에서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었던 것일세.”
분명한 정황이었다.
‘설마 이게...!’
하지만 순간, 훤백의 뇌리 속에는 돌연 내막을 알 수 없는 어떤 실로 커다란 의문 하나가 번뜩, 전광같이 떠올라 폐부를 찔렀는데...!
표정이 갑작스럽게 굳어지자 황보욱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이상하군? 한데 그 일에 대해 왜 이렇게 갑자기 집착을 하는가? 여기 천노선배님께서도 수긍을 하신 터인데, 혹시 뭔가 달리 생각하는 점이라도 있는 것인가?”
흠칫...!
훤백은 급히 정색을 되찾았다.
“아...! 아닙니다. 다만 황당하다 싶은 기분이 좀 들어서... 어쨌건 뭐 그렇다고 하시니 그렇게 되었나 보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묘한 의미가 담긴 얼버무림에 구린 냄새를 맡은 천상평이 즉시 물었다.
“무슨 뜻인가? 자넨 분명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좀 말해보겠나?”
훤백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뭐 이미 결정된 일이라니 더 거론할 것도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다만 조금 우습다 싶긴 하군요. 특히 노선배님마저 그렇게 간단히 그 일을 수긍하셨다는 게...! 어쨌건 상황이 그리되었다면 노선배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상당한 비난을 면치 못하실 것 같군요.”
“비난이라?”
천상평의 안색이 순간 홱, 일변했다.
기실 그는 개방의 대장로로서 방주직까지 사제에게 넘겨줬을 정도로 지금껏 살아옴에 단 한점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자부하는 인물인 터이었다.
한데 이런 자신이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더욱이 자신의 일이라면 곧 개방의 일이기도 했었으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분명 내 행동에는 털끝만한 실수도 없었거늘!”
훤백은 씁쓸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면 노선배님께 먼저 여쭙겠습니다. 불초가 알기로 개방은 지난 이십여 년간 줄곧 무림맹과 따로 지내오신 것으로 아는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천상평은 굳은 표정으로 훤백을 살피며 대답했다.
“별세하신 선사의 유시 때문이었네. 이십여 년 전에 벌어진 청화의 난(難)에서 비롯된 것이지. 당시 철기보는 군소방파를 핍박하는 대방파를 진압하는 명목으로 각처의 무수한 대방파들과 싸웠었어. 그중에는 우리 개방과 친분이 있는 방파도 많았고. 이에 선사께서는 어떻게든 양쪽을 말려봤지만 허사였고, 결국 싸움은 대방파들이 거의 다 붕괴된 후에야 끝이 났지. 이에 우린 자연적으로 무림맹에서 멀어진 걸세. 앞 서 친분이 있었던 방파들과의 의리도 그렇고... 철기보가 옳긴 해도 십분 잘했다고만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해서 선사께서는 철기보와 가까이 말라는 유시를 남겼던 것일세.”
훤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번 군림대회에 오시게 된 이유는 뭔가요?”
“유목공의 초빙 때문이었어. 그는 무림맹이 시작되고 나서 계속 우리 개방에 무림의 일을 같이 주도해 주기를 원했었네. 한두 번도 아니고 천하에 대소사가 있을 때 마다...! 하지만 선사의 유시도 있었고 해서 우린 계속 참여치 않았던 거야. 와중에 이번에도 참여해 줄 것을 청해왔던 것인데, 돌이키면 혈겁도 이젠 이십년이 지난 일이 되었네. 또한 유목공도 은퇴를 천명했고, 이에 우리 개방도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온 것일세. 혹시 이 일이 비난받을 소지라도 있다는 건가?”
훤백은 부러지게 대답을 했다.
“오신 일 자체라던가 다시 대사에 참여하시는 것에는 분명히 없습니다. 개방의 의리는 실로 천하가 배워야 할 일인 것이라...! 다만 후배가 말씀드리는 것은 전개된 상황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연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두 가지 실책을 범하시고 말았습니다.”
와르륵! 천상평의 눈에서 벼락같은 신광을 쏘아져 나왔다.
“말해보게나.”
“하나는 무림맹의 존속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것은 이번 군림대회 최대의 사안인 것이 확실하지요. 따라서 이 일은 참여한 명숙 이전에 먼저 천하 각 방파에 가부를 물어 정식으로 결정되어야 할 대단한 사안인 것입니다. 아무리 백대봉공이 신임장을 받은 인물들이라 해도, 이런 큰일은 역시 추천해준 각 문파들에게 가부를 물어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난 무림사를 살펴봐도 이건 상례지 않습니까?”
“그게...!”
“이런...! 그러고 보니...!”
천상평을 비롯한 황보욱 등의 안색이 삽시간에 순간 크게 일변했다.
그만큼 훤백의 말은 일리가 있었던 것!
기실 역대의 상황을 훑어보더라도 무림맹의 존속여부를 물을 정도로 큰일이라면 일차에 대표들이 추천해준 각파의 의향을 물은 다음, 다시 표결을 거쳐 찬반을 결정해왔을 만큼 중차대한 일인 게 확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경우는 이런 절차들이 죄다 생략된 상태에서 존속은 물론 차기 맹주의 선출에 대한 일까지 거의 확정짓다시피 해버렸으니...!
후계자의 부분도 크게 축소되어 멋대로 백대봉공의 문파 중에서 차기 맹주를 선출할 것으로 이야기가 모아졌으니, 일언하여 집안잔치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회합조차도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이런 중대한 일들이 거의 마무리되어 버린 셈이라 곧 도처에서 빗발치듯 비난이 쏟아질 것이 자명한 이치!
특히 천상평의 입장은 더욱 딱했다.
말마따나 개방은 무려 이십여 년 간이나 의리를 지켜 온 셈!
와중에 다시 기지개를 편들 나무랄 사람은 없겠지만, 하나 나오기 무섭게 크게 비난받아 마땅한 집안잔치와 그동안 멀리했던 무림맹의 실책을 한꺼번에 동조를 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이 무슨 딱한 꼴인가?
“실수였다! 내가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을...!”
천상평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그를 보며 훤백은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나 개방이나 황보가의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어차피 후배가 보기에도 무림맹은 좀 더 존속됨이 옳고, 백대방파에서 새로운 맹주가 탄생되는 것 역시 결코 나쁘진 않다고 보니까요. 다만 이런 큰일이 모양새조차 갖추지 않고 멋대로 결정되어 버린 게 흉한 것인데, 노선배님의 경우는 백대방파와 관련이 없으니 그저 분위기에 휘말렸을 뿐인 것입니다. 요는 집안잔치를 한 나머지 백대방파와 유목공이 가장 비난을 받겠지요.”
천상평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하나 본 방은 이로서 본의 아니게 화살 받이가 되어버린 것이기도 하네! 비난을 받기 시작하면 보나마나 다른 놈들이 우리를 팔 것이 분명하단 말일세. 황보세가에 개방까지 동의를 해서 함께 기울어졌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기 십상인즉...!”
훤백은 씨익, 웃었다.
“그런 일이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노선배님께서는 그냥 배 째라, 해 버리십시오. ‘하긴 했다만 나야 무림을 생각해서 그랬다! 오랫동안 우린 의리를 지켜 무림맹과 관련 없이 지냈지만, 마침내 존속문제가 거론되고 보니 아무리 원수 같은 무림맹이라 해도 현재 상황에서는 없어져서는 안 되겠더라! 그래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니 불만 있는 놈은 나서봐라!’ 하시는 겁니다. 분명 욕심 없이 한 일이시니 별 문제될게 없을 것입니다.”
그럴듯한 핑계!
천상평의 굳은 얼굴이 비로소 다소나마 풀리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회의를 제쳐두고 왜 술자리에서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해대면?”
훤백은 휙, 고개를 저었다.
“그야 노선배님께는 더욱 좋은 핑계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개방이야 백대문파와 달리 앞으로도 정상회의에 참여하실 일이 없으시니까요. 그냥 ‘우리 개방은 의리를 지키느라 봉공 따위를 배출해낸 적도 없고, 따라서 회의에 참석할 일도 없다. 작은 소신이라도 피력하자면 그 자리밖에 없어 그냥 한마디 했다!’ 라고 눈을 부라려 대는 것입니다.”
“핫핫핫핫... 거 참...!”
순간 천상평은 통째로 실내가 뒤흔들리는 광열한 대소를 터뜨렸다.
“병 주고 약 주고! 정말 대단한 입심일세, 그려! 딴은 그런 핑계가 있기도 하군. 확실히 그럴듯해!”
이로서 개방으로서는 면죄부를 받을 핑계거리를 확보한 것이었다.
“졸지에 이 늙은 거지가 적지 않게 신세를 진 셈이로군! 생각지도 않고 고개 한 번 끄덕였던 것이 큰 화근을 부르는가 싶었더니만... 크게 감사할 일일세! 자칫 생각 않고 지나쳤다가 실로 곤욕을 당할 뻔 했어.”
“별 말씀을. 또한 이는 황보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황보세가 하면 영욕이 없기로 이름 높은 가문이라...! 그냥 가주께서는 누가 뭐라 하면 ‘그래, 내가 망령이 들어 맹주 한 번 해보려 했다. 멋대로 생각해!’ 해버리면 끝나는 것이지요.”
“헛헛... 재미있군.”
이러한 그를 향해 황보욱이 미소 지었다.
“남은 것은 역시 남은 백대봉공의 문파로군. 우린 그렇다 쳐도 무조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국이니...! 이런 점을 봐도 특히 자네가 그대로 남아줬으면 좋겠는데 아쉽군. 천노선배님의 의견도 그렇고 자네 생각도 그렇고, 나 역시 무모히 파벌싸움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으니 말일세.”
훤백은 마주 웃어 보이며 포권을 취했다.
“황보형의 충후하신 성품을 봐도 문제될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게다가 도천형님이 손을 들어주실 것이고, 또한 사도형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눈치를 보니 당여협 역시 외인이 아니신 듯 하니 절대 맞서려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중립을 지키면서 그냥 하실 일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유사시 일이 생기면 미흡하나마 후배 역시 다시 합류를 하면 될 터이고요.”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사도횡이 끼어들었다.
“네가 같이 있어준다면야 태산이 버티는 것이나 같지.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 건 귀띔만 해. 금우부의 대표로 즉각 백대봉공에 앉혀줄 테니까.”
훤백은 미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형은 어쩌고?”
사도횡도 회색 눈에 특유의 차분한 웃음을 실었다.
“난 이것으로 이제 됐어! 봉공 따위 안 해도 우리 금우부의 위상은 이제 천하를 눌렀고, 특히 할 일이 좀 많더냐? 밤길까지 조심해야 할 상황이기까지 하니...! 어차피 한다 해도 대리로 있을 사람이 필요해.”
훤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두려고?”
“무창에서 사성(司晟)을 올라오게 할 생각이다. 그라면 생각도 깊고 눈치가 비상하니 충분히 자리매김을 할만하지. 넌 어쩔 생각이냐?”
무창 점포의 천수마영(千手魔影) 왕사성(王司晟)!
훤백 역시 만나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훤백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형님이라면 확실히 괜찮을 것 같아. 그 일이라면 나중에 따로 상의를 좀 해.”
천상평이 재미없는 얘기 그만하자는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눈치를 보니 뭔가 우리 모를 꿍꿍이가 있는 게로군. 아무튼 뭐든지 간에, 있는 동안에는 여기 삼화도 끼워 주도록 하게. 녀석은 사천당가의 맏딸이자 늙은 거지에게는 먼 질손(姪孫)이 되는 입장이야. 젊은이들끼리 의좋게 지내면 좋잖겠나.”
훤백의 시선이 슬며시 당삼화의 절륜한 미모로 옮겨졌다.
당삼화 역시 눈을 반짝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여협도 봉공으로 남으실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아마 그럴 생각인 것 같네. 경험도 쌓을 겸, 당분간 대내의 일을 맡아볼 생각 같으니까. 하지만 워낙 덜렁대는 성품이라 안심이 안 되네."
무림맹에 여자 봉공...! 실로 드문 일이었다.
“형.”
이에 훤백은 사도횡과 황보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이라면 역시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나은 것이었다.
황보선이 먼저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나야 부족한 몸이라 늘 수동적 입장이지만 사천당가 역시 외인이 아니야. 가주님 역시 아버님과 적잖은 친분이 있는 터, 사도형님만 좋다시면 나야 찬성이지.”
황보세가를 떠맡을 귀한 신분임에도 말이 없고 항상 있는 듯 마는 듯 뒷전에 머무는 조용한 청년...!
그로인해 무려 이개월여 동안 같은 추밀원에서 머물었지만 훤백과 그다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대화조차 몇 마디 나누지 않는 그런 묘한 조화를 이룬 채 지내온 황보선이었다.
하지만 훤백은 이미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삼랑일연 중 가장 극강한 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말이 없어도 보다 큰 지혜를 지녔으리라는 점.
또한 은연 중에 이런저런 상황을 판단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언제나 나타나 슬그머니 자신에게 보조를 맞추고 있음 역시 눈치 채고 있었다.
기실 평소에는 있는 둥 마는 둥 보이지도 않는 청년, 그러나 사도횡이 나타났을 때라거나 지금 같이 꼭 필요로 하는 자리에 언제 그가 슬그머니 나타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사도횡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 상태였기에 미소과 더불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우는 너무 자신을 낮추는 것 같아. 어쨌건 난 자네를 안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네. 당여협도 그렇고 우리 정말 친형제처럼 잘 지내보세. 보다 나는 지혜가 부족해 모든 걸 훤백에게 의존하는 처지이니 많이 가르쳐 주게.”
“형님...!”
황보선은 두 손으로 사도횡의 내민 손을 잡았다.
“숫기가 없어 항상 이렇다 말씀조차 드리지 못하는 터인데도 이렇게 기꺼워 해주시니...! 도천형님과 마찬가지로 친형님처럼 여기고 따르겠습니다.”
훤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와는 뭐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대충 호흡이 맞잖아. 그것으로 된 거지?”
훤백은 씩, 웃으며 맞장구쳤다.
“형이야 뭐 혼자서도 뭐건 잘 알아서 해낼 정도니까 구태여 말 같은 것도 필요 없지.”
당삼화가 잠시 머뭇대는 모습을 보이더니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죠, 이소협? 또 사도문주님과 황보소협에게는 소녀가 동생이 되기로 하고...!”
훤백은 서슴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누난 나 같은 동생을 두면 골치 꾀나 썩을 걸? 무슨 일이거나 서로 도우면서 지내기로 해.”
의기투합.
훤백을 중심으로 다시 당삼화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천상평이 크게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클흘흘... 오기까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럼 됐어! 이 정도라면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다지 걱정할게 없겠네. 물론 젊은이들 간의 일이지만, 하나 배경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대단해. 그야말로 폭풍의 눈일세, 그려.”
사실이었다.
말마따나 이것은 실로 간단히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
개인적으로 볼 때는 거저 한심스럽게 몇몇 녀석들이 노닥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들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실로 극악한 힘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살펴봐도 첫 째 훤백의 이가장의 막대한 금력!
전 무림의 존중을 받는 황보선의 황보세가의 위엄!
정사양도, 천하에 마당발을 뻗친 곽나영의 관서표국의 인맥!
유사시 누구하나 목숨을 아끼지 않을, 눈이 시퍼런 사도횡의 금우부의 끔찍한 의리!
설상가상 천하최대의 방파 개방과 유사이래 최강의 암기로 이름난 사천당가를 등에 업은 당삼화의 저력!
여기에 보태진 도천의 강력한 무력과 권력!
만에 하나 이들이 한꺼번에 뭔가 문제를 삼아 들고 일어날 시, 이것은 그야말로 무림이 한꺼번에 뒤흔들릴 만큼 무지막지한 대폭풍이 될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헛헛헛헛... 거 참!”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황보욱 역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대단하군요. 사실 선이가 무림으로 나서겠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이 앞섰는데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어차피 우리야 머잖아 일선에서 물러서야 할 참이니 자손들이 잘 어울려야지요. 크게 잘된 일 같습니다.”
이 어찌 흡족하지 않겠는가?
개왕 천상평의 화등 같은 눈이 일순 기묘한 빛을 품었다.
‘이 놈이 정말, 지혜에 인덕까지 하늘에 닿아있군...! 실상 이 폭풍을 끌어 모우고 중심에 선 것은 저놈이니... 정말 안심할 수 없는 놈이군.’
그놈이 바로 이훤백이란 웃기는 놈이었다.
첫댓글 잘 밨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즐~~~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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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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