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링에서는 유도매트에서 겪은 비운의 시간을 재현하지 않을 거다. 내가 또다시 거친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지난날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다. 그리고 당당해지고 싶다.(사진 이휘영) |
유도 매트 위에서 윤동식(36,팀윤)은 무적이었다. 유럽 무대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파리 오픈과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세 번씩 우승했고 1994년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승하지 않은 국제대회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을 빼면. 윤동식은 유도계에 뿌리 깊은 파벌의 희생양이다.
86kg급으로 체급을 올리기 전의 전기영과 78kg급에서 경쟁한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다. 그의 이름 앞에 ‘비운의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그때였다. 이종격투기인 프라이드에 진출해서도 그의 불운은 계속됐다. 4전 전패.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땀을 링 위에서 흘렸다. 그리고 지난해 6월 K-1 다이너마이트 미국대회에서 멜빈 마누프(32,네덜란드)를 꺾은 뒤 3연승했다.
윤동식은 힘줘 말한다. “나의 앞날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지난날의 불운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일까.
요즘 어떻게 지내나. 열심히 훈련하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4월 경기 일정이 잡힐 것 같은데 아직 대진은 나오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면 집에 들어가 쉰다. 책을 읽거나 TV를 본다.
어제(2월 27일) MBC ‘무릎팍도사’에 유도선수 출신 이종격투기선수 추성훈(33)이 출연했다. 재미있게 봤다. (추)성훈이가 조리 있게 말을 참 잘했다. 특히 유도계 파벌의 희생자였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피해자 가운데 하나다 보니. 성훈이가 자세하게 설명했을 텐데 많이 편집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예능프로그램이다 보니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 힘들었을 거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올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추성훈과는 친한 편인가. 알고 지내는 사이다. 유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 때문에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성공했다고 본다. 성훈이가 국내 유도계의 파벌 때문에 당한 아픔을 조금씩 떨쳐 냈으면 좋겠다. 지금 더 성공했으니까. 누구나 지난날에 대해 아쉬움 하나쯤은 안고 산다. 그런 아쉬움 하나 없다면 나중에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슬플 것 같다.
유도선수 시절 파벌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모두 잊지는 못했다. 그 많은 아픔을 어떻게 다 잊겠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36년 세상을 살면서 배운 삶의 지혜다. 어쩌면 성훈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자신의 불행을 넘어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추성훈은 “여기는 말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뒤 한국 유도계를 떠나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냥 담담했다. 성훈이 말처럼 정말 말을 해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많은 유도인이 대한유도회에 수없이 시정을 건의했다. 하지만 다음 대회에서도 또 그 다음 대회에서도 편파판정은 그대로였다.
자신이 당한 편파판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나. 판정으로 가면 언제나 용인대 재학 또는 출신 선수들의 승리로 끝났다. 나와 맞붙은 용인대 선수 대부분이 방어에 치중했다. 공격을 하지 않으면 단계별로 지도와 주의, 경고를 받는다.
그런데 지도나 주의 또는 경고가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한판승뿐이었다.
부담을 안고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겠다. 그런데 한판으로 넘기려고 해도 상대선수가 앞으로 같이 넘어져 전혀 소용이 없었다. 유도경기의 특성으로 볼 때 상대선수가 방어에 치중하며 시간을 끌면 한판승이 나올 수 없다. 나중에는 공격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헷갈렸다.
한 언론사에서는 국내 유도 심판들에 대해 ‘승패를 만드는 마술사’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럴 만하다. 매트 안에서 내가 넘어뜨리면 바깥으로 처리하고 내가 매트 바깥에서 넘어지면 안에서 넘어졌다고 판정했으니까. 관중들조차 어이없어 했다.
1996년 5월 7일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벌어진 애틀랜타올림픽 유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78kg급에서도 같은 이유로 조인철에게 져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는데. 당시의 회색 빛 매트를 정확히 기억한다. 경기가 끝난 뒤 모두들 내가 판정승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관중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30분 동안 매트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나. 나갈 수가 없었다. 판정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무언의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매트에서 나가야 다음 경기가 열리는데 억울한 마음에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다음 경기는 열리지 못했다.
그 경기 이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국내 유도계에서 용인대의 힘이 세다는 걸 다시 알게 됐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조인철과는 그 뒤 이야기를 나눠봤나. 꽤 시간이 흐른 뒤 조인철이 “그때 미안했어요”라고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그저 인철이가 부러울 뿐이었다.
파벌의 혜택이 부러웠다는 건가. 후배들을 챙겨 주고 싶은 건 어쩌면 선배로서 당연한 자세가 아니겠나.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선배들을 따르는 용인대가 나중에는 부럽기도 했다. 사실 모교인 한양대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다. ‘왜 내 선배들은 후배들을 이렇게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을 수백 번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전에는 파벌에 관한 언론의 질문을 회피했는데. ‘내가 용인대 선수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할 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었다. 언론에서 자극적인 주제를 갖고 내게 접근하는 것도 싫었다.
전에 KBS 다큐멘터리 팀에서 일본까지 찾아와 대한유도회에 관해 모든 걸 밝혀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밝힐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담당 PD가 다시 찾아와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 변조까지 할 테니 대한유도회를 엎어보자”고 했다.
나는 유도만 20년 넘게 했다. 유도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던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유도천재 부상도 ‘비운의 스타’로 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특히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당한 오른 무릎 내측인대 파열은 선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세계선수권대회를 두 달 앞두고 체육관에서 훈련하던 도중 옆에서 훈련하던 동료 헤비급 선수가 나를 안고서 넘어졌다. 일어나려는데 비명이 나왔다. 인대가 끊어졌다.
곧바로 김창호 대표팀 감독과 대회 출전 여부에 대해 상의했다. 김감독은 내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세계선수권대회는 2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대회다. 당시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전을 강행하겠다고 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대회 3회전에서 탈락했다. 2주 동안 보조운동만 한 채 경기를 치른 탓이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회에서 오른팔이 골절되기도 했는데. 그것도 체력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매트 위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매트에 복귀한 뒤 바로 1996년 독일오픈 78kg급에 출전해 우승했다. 그래서 내게 ‘유도 천재’라는 별명이 붙은 것 같다. 정말 운동을 많이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출전한 건데. 내 스스로도 놀라웠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12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3년 동안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전기영(35)에게도 단 한 번 졌다. 세계 최고라는 평가도 받았고. 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딸 거라고 장담했다.
확신이 있었다는 건가. 당시 국제대회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한판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래서 애틀랜타올림픽이 8개월가량 남았을 때는 남몰래 거울을 보며 올림픽 금메달 세리머니를 해보기도 했다.
|
윤동식이 지난해 10월 열린 K-1 히어로즈 한국대회에서 파비오 실바에게 테이크 다운을 빼앗은 뒤 그라운드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윤동식은 실바를 1라운드 6분 12초 만에 암바로 꺾고 K-1 히어로즈 3연승을 달렸다.(사진 김수홍) |
당시 국제대회 47연승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제대회 결승에서 늘 만나는 선수가 전기영이었다. 대회마다 결승까지 거의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고 올라갔다. 당시 대표팀 코치들이 어차피 나와 (전)기영이가 결승에서 만날 거라고 대회 개막도 하기 전에 내기를 할 정도였다.
외국선수들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선수였겠다. 매트에 마주 서면 기싸움에서 이미 눌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격을 하려고 하면 뒤로 물러나기 바빴으니까. 나를 ‘저승사자’라고 부르는 나라도 있었다. 외국선수들은 한판으로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효과나 유효를 얻었는데도 공격을 안 할 정도였다.
경기를 하기 편했을 것 같다. 상대방이 공격을 하지 않으니까 무리하게 경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판정으로 지겠다는데 무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국제대회에 나가면 언제나 즐기는 마음으로 경기를 했다.
전기영을 유도 인생 최대 라이벌로 꼽았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라이벌이었다. 초반에는 내가 많이 졌지만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는 내가 4번 연속 이겼다.
나를 피하려고 기영이가 체급을 올렸다. 기영이도 인정한 사실이다(웃음). 체중조절이 힘들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체급을 올리고 처음 나간 국제대회에서 바로 우승했다. 정말 무서운 녀석이다.
전기영과는 한국마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는데. 룸메이트였다. 그러다 보니 경기를 앞두면 이틀 전부터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웃음). 조심스럽게 내가 “기영아, 체중은 다 뺐니”라고 물으면 “아직이요”라는 짧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기영이는 성격이 털털하다. 내가 이겨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축하했다. 기영이가 체급을 올린 뒤에는 매트에서 마주 설 일이 없다 보니 더 친해졌다. 사실 기영이보다 내가 라이벌 의식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길래. 기영이에게 지면 잠이 오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해서. 그런데 기영이는 져도 곧바로 툭툭 털어버리곤 했다.
이루지 못한 올림픽 메달의 꿈유도선수 생활을 30살까지 했다. 올림픽에 대한 미련 때문인가. 파벌에 의해 올림픽 출전권을 놓치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편파판정에 시달리다 보니 경기 감각을 잃어버렸다. 매트 위에 오를 힘도 나지 않았다. 기량이 앞서도 기싸움에서 눌리면 패배하는 게 바로 유도다.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끝내 실패했다. 4년을 기다리고 도전했지만 매번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가슴 속에 이루지 못한 한으로 남았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지금은 괜찮다. 더 큰 무대에서 재기했으니까.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이유로 당신을 ‘비운의 스타’ ‘비운의 유도왕’이라고 부른다. 사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솔직히 비운의 유도선수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운이라는 말에 스타나 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나.
그럼 어떻게 불리길 바라나. 비운의 유도선수가 좋겠다. 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올림픽만큼이나 세계선수권대회도 아쉬움이 많을 텐데.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가 가장 아쉽다. 조인철을 피하려고 90kg으로 체급을 올리고 나간 대회였는데 세 번째 경기까지 모두 한판으로 이겼다.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준결승전에서 프랑스의 몽파브콘에게 졌다. 경기 초반 빼앗긴 절반에 놀라 경기를 쉽게 풀어나가지 못했다. 한판을 줘도 할 말이 없는 절반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적극적인 공격을 했지만 몽파브콘이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시간을 벌었다.
서로 지도를 하나씩 받은 뒤부터는 아예 대놓고 도망다녔다. 그런데 주심은 그에게 지도의 다음 단계인 주의를 주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한동안 매트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나. ‘이걸로 내 유도인생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결승에만 올라갔다면 정말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는데. 그 대회를 마치고 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2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 한국마사회에서 코치로 일하는데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선수로 복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2003년 리투아니아대회에 코치 신분으로 갔는데 선수단에서 농담조로 나보고 한번 뛰어보라고 했다. 그 대회는 출전 신청을 현장에서 했다. ‘몸도 근질근질한데 한번 뛰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출전선수 명단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실격 처리 될 뻔했다. 파란색 도복만 갖고 갔기 때문이다. 하얀색 도복을 입어야 될 경기에 걸리면 출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대진 추첨을 했는데 대진표를 보니 1, 3, 5, 7번 등 홀수 번호를 받은 선수들이 파란색 도복을 입게 됐다. 그런데 내가 1번에 걸렸다.
그래서 2회전, 3회전으로 계속 올라가도 도복 색깔이 계속 파란색이 됐다. 하얀색 도복을 입는 번호였다면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실격 처리 됐을 거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겠다. 축하만큼 지탄을 받았다(웃음). “왜 코치가 선수로 뛰느냐”며 선배 코치들이 많이 나무랐다. 나이 어린 후배들은 “나이도 많으신데 쉬셔야죠”라고 농담을 하며 출전을 말렸다.
그러나 2003년 리투아니아대회에서 우승한 뒤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다.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훈련했다. 마음 놓고 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만큼 간절한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다시 한번 출전했다. 그런데 한국마사회 제자인 권영호와 만났다. 제자와 매트 위에서 마주치니 기분이 참 묘했다. 변명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경기에 지고 매트에서 나오는데 제자의 올림픽 진출을 도와준 것 같아 뿌듯했다. 전처럼 아쉬움이 들지는 않았다.
한국마사회 제자 가운데 2004년 아테네올림픽 73kg급 금메달리스트 이원희도 있는데. 내 제자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특별히 내가 가르친 게 없기 때문이다. 소속이 같았을 뿐 많이 가르쳐준 게 없다. 선수들이 수많은 코치를 만나지 않나. 나도 그런 코치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이원희는 당신의 국제대회 47연승 기록을 깬 선수이기도 하다. 어차피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 아닌가. (이)원희의 메치기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 원희가 경기하는 걸 처음 봤을 때 ‘내가 함부로 경기 스타일을 손 보면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내가 해낸 것처럼 기뻤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면 이종격투기로 전향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어도 이종격투기에 도전했을 거다. 이종격투기를 보면서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링 위에서 두 남자가 정정당당하게 맞붙는다는 게.
‘프라이드’ 4전 4패
|
윤동식의 번쩍 든 두 손이 비운과 안녕을 뜻하는 듯하다.(사진 김수홍) |
프라이드 진출이 전기영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처음 프라이드에서 영입을 하려고 한 선수가 (전)기영이었다. 프라이드에 진출한 유도선수 요시다 히데히코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기영이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요시다를 두 번이나 누르지 않았나.
요시다가 프라이드에서 앙갚음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기영이는 이미 운동을 안한 지 7년이나 된 상태였다. 살도 쪘고 배도 많이 나왔다. 완전 동네 아저씨가 된 거지(웃음).
프라이드 관계자들의 눈길이 나에게 쏠렸다. 유도선수 시절 기영이와 라이벌이었으니까. 나는 그때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라이드 관계자가 뭐라고 했나. “프라이드에 진출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유도를 20년가량 했으니 타격기술만 조금 배우면 성공할 수 있을 거다”라고도 했다. 많이 망설였다. 타격을 해본 적도 없었고 유도와는 관련 없는 관절기술도 낯설었다.
2004년 12월 일본으로 가 프라이드와 계약하기에 앞서 사전 조사를 했다고 하던데. 가족, 변호사와 함께 일본에 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경기장에 가 프라이드 경기를 보기도 하고. 링 아래서 경기를 지켜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4월 계약을 했다.
그런데 계약 직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경기에 나갔다. 더군다나 상대는 일본 최고의 이종격투기 선수인 사쿠라바 가즈시(40)였다.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기 때문에 상대선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경기 일정을 잡을 줄은 몰랐다. 5일 동안 연습했는데 잽을 몇 번 내민 게 전부였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가. 프라이드 진출을 추진한 매니저가 아무 것도 모르고 계약을 했다. 스포츠 에이전트인데 축구 쪽만 하던 사람이라 이종격투기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밀고 당기면서 계약 내용을 조율했어야 하는데.
매니저가 최고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라는 말만 듣고 출전에 합의했다. 결국 나만 죽어라 고생했다(웃음). 선수인 내가 뭘 알겠나. 나가라면 나가는 거지. 프라이드의 농간에 놀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라이드 관계자에게 터무니없는 일을 많이 당한 걸로 알고 있다. 사쿠라바와 경기에 앞서 타격훈련을 하지 말고 유도 연습만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기 당일에는 선수대기실에서 쉬고 있는데 등장 곡을 바꿔야 한다고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 황당한 요구가 세 번 이상 있었다.
경기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겠다. 처음 맞았을 때 순간적으로 무서웠다. 나중에 녹화 테이프를 보니 제대로 맞지도 않았는데 당시에는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한 건 석연치 않았다. 주먹을 맞고 유도 자세를 취했는데 그걸 보더니 38초 만에 TKO를 선언했다. 난 경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는데.
왜 링 위에서 항의하지 않았나. 내 의견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생각을 안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링에서 내려왔다. 경기 뒤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잠시나마 떠나고 싶었다. 2주 정도 쉬고 한국에 돌아와 어느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기자가 인터뷰 내용을 이상하게 쓴 모양이었다. 지인들에게서 내 기사에 ‘악플’이 엄청나게 달렸다는 전화가 왔다. 2천 개가 넘었다고 한다. 좋게 생각했다. 나에게 그만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쿠라바와 경기한 뒤 다카다도장에서 훈련했다. 다카다도장은 당신에게 패배를 안긴 사쿠라바가 소속된 곳이기도 한데. 나보다 훌륭한 선수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복잡했던 마음을 사쿠라바와 훈련하면서 다잡았다. 사쿠바라는 잘 대해줬다.
38초 만에 많은 돈을 안겨준 선수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웃음). 그런데 사쿠라바와 경기한 뒤에 다카다도장에 간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게 무슨 말인가. 프라이드와 계약했을 때부터 난 다카다도장 소속이었다. 그런데 다카다도장의 주인인 다카다 노부히코 프라이드 총괄본부장이 이 사실을 숨겼다.
한일전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홍보를 하려는데 같은 도장의 선수끼리 맞붙으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나는 도장에서도 자유롭게 훈련할 수 없었다. 5일 동안이었지만.
경기 전 당신에 대한 정보가 사쿠라바 쪽에 흘러갔을 것 같다. 경기를 3일 정도 앞두고 다카다 총괄본부장이 내 그라운드 기술을 보고 싶다고 스파링을 하게 했다. 그때 경기를 지켜본 전직 심판이 사쿠라바에게 내 약점을 다 말해 줬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나중에 사쿠라바가 전직 심판을 가리키면서 “윤, 저기 있는 전직 심판이 너와 경기하기에 앞서 나에게 정보를 알려 준 스파이였어”라고 말하면서 깔깔 웃었다.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프라이드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일본 사람들이니까.
추성훈이 지난해 12월 ‘야렌노카! 오미소카! 2007’에서 미사키 가즈오(31,일본)에게 진 걸 보면 모르겠나. 그건 엄연한 반칙이었다.
다음 경기 상대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유도 남자 81kg급 금메달리스트 다키모토 마코토(34,일본)였다. 다키모토는 당신이 국제유도대회에서 2번이나 이긴 선수인데 가벼운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렇지는 않았다. 프라이드에서는 그 친구가 나보다 선배니까. 나는 한 경기도 제대로 못 뛴 초보에 불과했다. 38초 만에 진 걸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프라이드는 실전에서 기량이 늘어난다.
당시 판정패했다. 편파판정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그라운드에서는 비슷했지만 파운딩에서 내가 미흡했다고 생각한다. 유리한 자세를 더 많이 가졌지만 어떻게 주먹을 뻗어야 하는지 몰랐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경기 뒤부터 타격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경기에서 다키모토는 로프를 잡는 등 반칙을 많이 저질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석연치 않은 판정이 있다면 급소를 때렸다고 주의를 받은 것이다. 일부러 찬 게 아닌데 고의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졌다고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 때마다 패전에 대해 핑계를 대지 않았다. 억울해도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진정한 선수가 아닐까. 경기에서 진 주제에 변명을 늘어놓는 건 상대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퀸튼 잭슨(30,미국)이 나에게 이긴 뒤 친구로 지내자고 얘기한 것도 이런 점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선수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거다.
퀸튼과 경기를 하기 전에 전 시애틀에 있는 AMC 판크레이션에서 훈련했는데. 한 달 정도 있었는데 주변 환경이 놀라웠다. 일본 격투기 시장은 미국 격투기 시장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가 엄청났다. 퀸튼과 치른 경기는 많은 걸 깨닫게 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서 걱정을 안고 링에 올라갔는데 희망을 안고 링에서 내려왔다. 주먹을 맞았지만 아프지 않았다. 타격만 배우면 나도 세계 최강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라이드에서 맞붙은 선수의 대부분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프라이드 최강자로 불리는 반달레이 실바(32,브라질)와도 싸울 기회가 있었다. 마우리시오 쇼군(27,브라질)과도 경기를 할 뻔했고. 그런데 쇼군이 나와 경기를 거절한 걸로 알고 있다.
타격으로 상대를 제압한 적이 아직 없다. 격투기선수로서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윤동식하면 대부분 암바를 떠올린다. 넘겨서 꺾을 줄 밖에 모르는 선수가 아닌데. 언젠가 타격으로 승리해 고정관념을 깨겠다.
어느 인터뷰에서 유명우, 장정구에게서 복싱을 배웠다고 했는데. 프라이드 관계자들이 시켜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거짓말을 하기 싫었지만 경기 일정을 잡아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놔 어쩔 수 없었다.
선한 인상 때문에 변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
윤동식은 링 밖에서는 따뜻한 남자다. 추성훈은 윤동식을 겸손한 사나이라고 표현했다.(사진 이휘영) |
다른 선수들처럼 눈싸움을 강렬하게 하고 싶은 데 잘 안 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선수들은 경기 전에 서로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까지 내 기분을 상하게 했던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나에게 진
멜빈 마누프(32,네덜란드)가 그나마 사석에서 나를 노려본 친구로 꼽을 수 있다. 별로 무섭다는 느낌이 안 든다. 이상하게 인상을 쓰는 모습이 더 귀엽다. 다시 붙자고 하면 그럴 의향도 있다.
프라이드에서 거둔 성적은 4전 전패다.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언제나 이길 수 있었는데 아쉽게 졌기 때문이다. 연습에서는 잘 됐던 기술이 이상하게 실전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경험 부족 탓이다.
반다레이 실바의 경기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전형적인 인파이터 아닌가. 경기가 늘 시원시원하다. 공격적인 면에서는 내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실바와 경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얼마 전에 FEG관계자에게서 전해 들었다.
고뇌 프라이드에 진출한 걸 후회한 적은 없었나. 없었다. 일본인들에게 우롱당한 일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유도를 했을 때보다 돈도 많이 벌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일본 격투기 시장에 진출하는 한국선수가 있다면 말리고 싶다.
프라이드는 없어졌지만 어떤 일본 단체든 자신들이 간절히 필요하지 않으면 자국 선수가 아닌 이상 쉽게 포기한다. 위험 부담을 정확히 인식하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 진출을 모색했으면 한다.
K-1도 우려 대상 가운데 하나인가. 그렇다. 국내 이종격투기 시장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지금이야 케이블방송사에서 비싼 중계권료를 지불해 일본 측에서 한국선수들을 잘 대해 주지만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승리만이 필요하다. 일본단체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선수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극진하게 대접한다. 나 역시 K-1으로 옮겨와 3연승을 거두자 대접이 달라졌다.
지난해 12월 31일 열린 ‘야렌노카! 오미소카! 2007’에서는 시노다 소타로(37) 프라이드 부사장이 직접 에밀리아넨코 효도르(32,러시아)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 대회에서 효도르와 경기를 치른 최홍만(28)의 세컨드로 나섰는데. (최)홍만이는 정말 대단한 선수다. 언론 보도를 통해 보름 동안 그라운드 기술을 익혔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나흘 밖에 안됐다.
처음 홍만이를 다카다도장으로 불러 할 줄 아는 걸 해보라고 했는데 아는 그라운드 기술이 하나도 없었다. 기본 자세조차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효도르에게 엄청 얻어터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기에서 최홍만은 두 번이나 효도르를 넘어뜨렸다. 그래서 대단한 선수라는 거다. 처음에는 가르치다가 답답해서 무작정 일본 레슬링 선수들과 스파링을 붙였다. 그런데 쉽게 레슬러들을 넘겨버렸다. 스탠딩에서 파운딩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홍만이가 덧걸이 기술 하나는 자신 있다고 해서 그걸 최대한 이용하기로 작전을 짰다. 졌지만 홍만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경기가 끝난 뒤 최홍만은 뭐라고 하던가. “세계 최고라더니 무슨 애가 이렇게 약해”라고 하더니 “형님, 우리 미국 UFC나 정복하러 갑시다”라고 말했다.
홍만이가 한 달만 그라운드 기술을 배우고 경기에 나섰다면 분명 이겼을 거다. 장신 선수지만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다. 힘이 세고 운동감각도 있다. 두뇌회전도 빠르다.
일본 관계자들과 술자리를 하면 현지인들이 재미있어하는 일본어만 외워서 분위기를 띄우기도 한다.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라운드계의 최강자가 될 것이다.
최홍만과 친분이 상당히 두터운 걸로 안다. 홍만이는 변명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자기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선수들을 가끔 말하는데 내가 특정선수를 지목하면 “왜 그 친구는 아직까지 은퇴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홍만이에게도 천적이 있는 거다. 새미 슐츠(35,네덜란드)는 아니다. 언제든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진짜 맞붙어보고 싶어 하는 상대는 레미 본야스키(32,네덜란드)다. 2005년 월드 그랑프리에서 진 빚을 꼭 갚아주겠다고 한다.
당시 경기가 끝난 뒤 다리가 아파 한 달 동안 걸어 다니지 못한 걸로 안다. 로킥을 너무 많이 맞아서 다리 근육이 다 터졌다. 하지만 다시 싸운다면 그때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자신의 이름을 딴 종합격투기팀 ‘팀윤’을 만들었는데. 유도 출신 격투기 선수들끼리 함께 훈련하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내가 사쿠라바에게 패한 이유는 이종격투기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에 진출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타격기술을 배우고 간다면 한국선수들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팀윤’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를 꼽는다면. 정부경(30)이 곧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어제(2월 27일)도 훈련 중에 내 팔을 꺾었는데 아직까지도 아프다. 내 특기인 암바에 내가 걸렸다.
이종격투기를 겨우 세 달 정도 배웠을 뿐인데 몇 년을 수련한 선수처럼 노련하다. 같이 훈련하면서 ‘내가 이렇게 애를 먹는데 과연 얘를 누가 이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부경이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회사는 차렸는데 아직 번듯한 체육관 하나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뛰며 많은 돈을 벌지 않았나. 그렇지는 않다. 더 많이 이겨서 더 벌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27)처럼 부모님께 집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팀윤’은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 스폰서를 구하고 있다. 지원의 손길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이종격투기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종목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이종격투기의 미래는 불안하다. 기업의 지원이 끊기면 선수들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뛸 수밖에 없다. 이종격투기를 사랑하는 분들의 지원이 절실하다.
K-1 대회를 여는 FEG에서는 지난해 FEG 한국지사를 세웠다. 사업은 커지는데 정작 선수들의 경제 사정은 어려워지는 것 같다. FEG 한국지사가 어느 정도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국내 이종격투기 선수들의 미래가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몇몇 중소기업이 도와주고 있지만 대부분 생계 유지를 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이종격투기는 프로스포츠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선수들은 자비를 들여 링에 오르기도 한다.
최근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는 이종격투기 선수 양성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런데 출연한 선수들 모두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시청률에 놀아나는 젊은 선수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선수들이 얼마나 어렵게 훈련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인데도 출연료 한 푼을 쥐어주지 않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링 위에 서 있는 내가 초라하다고 느껴진다. 내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이들을 도우려면 좋은 성적을 올려 돈을 많이 버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 혼자 이들을 책임질 수는 없다.
국내 이종격투기 선참선수로서 어깨가 무겁겠다. 긍정의 힘을 믿겠다. 나는 한때 ‘비운의 선수’라고 불렸지만 재기했다. 이종격투기선수들 모두가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한다.
혹시 이종격투기에서 은퇴하면 유도계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유도를 20년 넘게 배웠는데 왜 돌아가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종격투기에서 챔피언 벨트를 따는 것이다. 그게 유도 선후배들에 대한 도리이자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SPORTS2.0 제 94호(발행일 3월 10일) 기사
이종길 기자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
첫댓글 최홍만...졌으면서 효도르를 약하다고 하다니...최홍만은 다른 뭐 연예계 활동이나 이런건 자기 하는대로 한다지만 지고 나서도 매번 분수를 모르는 것 같군요. 그럼 이겨 보던가...ㅡ_ㅡ 원 참...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는 선수 양성 프로그램은 혹시 '사나이'인가요? ㅡ.ㅡ;;;
비류 님 심정도 이해하고...또 윤동식 선수 인터뷰 내용에도 살짝 뭍어 나지만..운동..좀 게을리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운동 게을리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많이 지고 있다..고로..운동 게을리 한다..라는 뜻이 내포된게 아닐까요? 그리고 최홍만 선수도 같은 나라...그리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선수니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죠..
팀 윤이 도장도 아직 없다는 건..조금 신선하네요...생각 외로..이종격투기가 돈이 안된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UFC가 돈이 시작한 것도 얼마 안되었고요..세계적으로 좀 인기가 많아지고..선수들 보호나..시청자..시청아동 들에 대한 보호 정책이 자리잡기 시작하면 좀 더 잘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게다가 윤동식 선수...시원시원 하고 인자한 성격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이트 출연이건 연예인 활동이건 최홍만은 배고픈게 싫어서 씨름을 그만두고 격투기로 간 것이고...또 연예인 활동도 나이트 출연도 뭐 자기가 여유가 된다면 해서 돈을 버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고나서 꼭 저런 소리 하는 것이 몹시 거슬립니다. 누구나 지고 나서 생각하면 그때 이랬으면 이겼겠다 하겠죠. 효도르가 그렇게 약하다고 느꼈다면 왜 이길만큼 연습하지 않았는지? 이런 것이 글쎄요. 저 개인적으로는 별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