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새 계명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베드로의 부인 예고 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모든 사람이 알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 하십니다.
-----
사랑의 새 계명 13:31~35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과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과거 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겠지만, 인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죽음은 이미 계획되었고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구원 역사를 위한 죽음과 영광은 예수님의 일이기에 제자들은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33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완성이자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새로운 계명입니다(34절).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입니다.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릴 것입니다(35절).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인가요?
나는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
베드로의 부인 예고 13:36~38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십니다(36절).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했다며 호언장담합니다(37절). 모든 사람을 잘 아시는(2:24)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 반문하시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라고 예고하십니다. ‘세 번’은 횟수이면서 강도 높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인간의 의지나 열정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무엇을 예고하셨나요?
내가 호언장담하기보다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일은 무엇인가요?
========
차별화가 아닌 동질성으로
“차별화로 승부해야 한다.”라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품고 사는 사람이 많다. 남들과 달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라. 자기만의 특징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라. 어느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남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늘 자기를 주변 사람들과 비교한다. 내가 좀 더 착하거나 잘생겼거나 똑똑하기를 바란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가진 아주 기본적인 고민이며, 그 속에는 “내가 세상에 일으키는 변화는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들어 있다. ‘차별화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의 덫에 빠지고 그게 정체성의 주를 이룬다면, 경쟁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가끔 장난으로 즐기는 경쟁이 아니라, 남을 이기는 것이 삶의 관건이 되는 그런 경쟁 말이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르치신다. 우리 존재를 차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공통된 성질을 지닌 동질성으로 파악하게 하신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서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동질성이다. 이 동질성을 공유할 때 우리 내면에 소속감이 찾아든다. 이는 기쁨과 화평의 원천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삶의 주요 기조는 경쟁이 아닌 긍휼과 사랑이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의 공동체 / 헨리 나우웬_ 두란노
===========
한절묵상:요한복음 13장 31절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가자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오는 때에 예수님은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뜻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뜻을 따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나아가 우리 삶도 영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며 주님이 인간에게 가장 기대하시는 것 역시 사랑이다. - 데이비드 램
오늘의 기도
참혹한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으신 주님! 저도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제게 생명 주신 주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증언하게 하소서. 때때로 찾아오는 시험에 넘어지고 두려움에 망설이지만, 다시 일어나 주님 손 붙들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요한복음13:31-38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할때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31절입니다 "그가 나간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그가 나간 후에"라는 말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간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에게 위기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과거로 말씀합니다
위기 가운데 계신데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실수 있으신 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위기 가운데 십자가 즉, 하나님의 뜻을 바라본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위기를 보는 경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위기속에 위기를 봅니다
그런데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위기를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보느냐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시면서 새계명, 제자의 삶을 소개하셨습니다
새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죄인을 사랑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사랑의 끝은 구원임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5절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겠지만 최고의 전도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3) 33절에 예수께서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면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은 38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얼마나 놀랬을까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한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예수님을 따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예수님을 따를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 만으로 예수님을 따를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의 사람으로 바뀐 것을 볼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주님을 따라갈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떠난 후 예수님은 유언과도 같은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인자와 하나님의 영광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 예수님이 감당하셔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치욕적인 죽음이지만 곧 많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지켜야 할 계명을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손해 볼 것 같아도 사랑하고 나를 배신할 것 같은 사람까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랑을 나누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의 나눔은 예수님의 육신적 부재를 보완하는 길입니다.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째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느냐고 항변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물론 그를 아는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 역시 어떤 모습이 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계명을 실천하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1,32절 어둠의 시간(9:4)이 오고 밤(13:30)에 넘겨지셨지만,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죽음)가 생명과 영광을 얻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세상은 그것이 예수님의 실패이고 자신들의 승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나는 누구 말을 믿고 삽니까?
33-35절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따라야 할 모범이고 또 사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섬김을 받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사랑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받은 것만 계산하여 다 주고도 아쉬워하는 사랑입니다.
관념의 사랑이 아니라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내 돈주머니를 여는 사랑입니다. 그때야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이고, 그때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을 기쁘게 참고,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공동체는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나부터 미움의 대상을 지우고 사랑하는 일에 나섭시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6-38절 베드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역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고를 하십니다. 가룟 유다처럼 베드로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지 않으면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충성을 장담했지만,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누구보다 연약한 자기 자신을 위해 주신 말씀임을 먼저 깨달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더 제대로 알 때 그의 고백은 성취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기다려 주시듯,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여러 실수에 낙담하지 말고 깨달았다면 돌이키십시오.
기도
공동체-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삶으로 살아 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 제자로서의 바른 삶은 무엇입니까?
➲ 구원을 문을 열어 주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1~32절).
‘속히 하라’(27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다가 나갔을 때, 예수님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자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31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으로 겪게 될 십자가의 수난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이 체포가 되어 심문을 받고,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질 때가 임박해졌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사건으로 규정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32절)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발적인 예수님의 순종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심으로 모든 구속 사역이 완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순종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신 역시도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영광을 돌리는 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역에 임할 때에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을 힘입고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기억하고,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새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사랑의 길을 보여 주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33~35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사랑스런 자녀’라는 의미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아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숙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미숙함을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끝까지 유다를 배려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34절)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써 보지 않은, 새로운, 알려지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질적으로 새로운 상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35절)임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나올 뿐만 아니라 유대인 랍비들도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명령하셨기 때문이요,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하라는 점에서 새 계명입니다.
또한 이런 사랑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며, 제자들이 그 모델을 따라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 계명입니다. 즉, 형식적인 사랑의 섬김에서 벗어나 주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해 끝까지 변호하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시고,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 자신의 삶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상태이고, 참 제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마 5:44,눅 6:27), 예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신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6~38절).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베드로의 질문에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절)말씀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여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라며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의 열심이 인간적인 열심과 의지로 하는 열심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의욕만 앞서서 행하는 사역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날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성령보다 앞서지 않으며,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내 감정과 세상적인 판단을 앞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를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할 것(마 10:32)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늘 기억하여 자만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 근신하면서 주님을 담대히 전하고, 고백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므로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겸손히 십자가를 지시며 사랑의 참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참 제자로서의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 계명을 지키며, 시험을 이기는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13:31~38절)...
31-33절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인자의 영광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따라올 수 없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주시겠다는 것은 옛 계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 계명은 모세에게 주었던 언약입니다. 옛 언약의 부족함을 예레미야 31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1-33)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언약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옛 계명의 문제는 율법을 지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근거해서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에게 새로운 언약을 인간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즘 시대는 사랑의 홍수 시대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그냥 사랑하자고 외치고 사랑의 형태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질문해야 할 내용은 과연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입니다. 내 아내를, 내 자녀를 나 자신만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새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새 계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온전한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삼 년 동안 따르며 표적과 말씀을 보고 배웠던 가룟 유다의 배신 앞에서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배신을 했습니다. 배신당할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배신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십자가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손해 볼 것을 두려워해서는 십자가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처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는 십자가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볼 것인가? 이익을 볼 것인가?’를 생각할 때부터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핑계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합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사업이 어렵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핑계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서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신 그 은혜로 인해 힘을 내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어렵고, 어색하고, 심지어 용서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사랑을 나눔으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1절 유다가 나간 후, 자신의 사명에 관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유다를 막지 않으시고 제자의 배신을, 그 배신으로 인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유다가 그 자리에 없다고 배반자라는 낙인을 찍고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내게 상처를 주는 것 이상으로 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큰 상처를 남깁니다. 유다를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뜻이 품속에서 자라게 하십시오.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 내 앞에 있습니다.
31~33절 ‘잠시’ 함께하십니다. 유다의 떠남과 동시에 ‘예수의 들림’ 곧 체포와 재판,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고난 받는 종이 되는 동시에 ‘영광의 왕’으로 등극하는 길입니다.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그 잠깐의 시간에 예수님은 고별설교와 세족과 만찬을 나누십니다.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높임 받고, 용서해야 용서 받는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어둠의 시간이 오기 전에, 어서 빛 가운데 나아가 진리를 듣고, 사랑을 품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릅시다.
34,35절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입니다. ‘네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정도 관념도 아닌 실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사랑이 제자의 길입니다. 모든 전도와 변증의 출발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전하는 모든 말이 헛것이 됩니다. 사랑 없음이 전도의 최대 걸림돌입니다. 서로 사랑함이 무언의 전도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6~38절 배반 예고에 유다는 잠잠했고, 부인 예고에 베드로는 장담합니다.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고 어디든 가겠다고 장담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뿐입니다. 의욕은 진심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께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부정’을 하지 못했기에 ‘예수 부정’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의욕만으로는 주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기도
공동체-한 번의 실패로 뒤로 물러서는 법 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하소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1-3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막 14:27-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1-34)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19~22)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