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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군대시절1 -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가기전 한두달의 여유가 있어 그녀에게 참새를 잡아 구워주려고 시골의 똘(농사짓는 물 수로)을 건너 뛰다가 발목을 삐었다.
입대가 한두 주 후인데 걱정스러웠다!
80년 3월 입영한다니 시골동네 어른들이 여비를 주셨다.
어렸을 때 입영열차가 동네 앞 마루고개를 꽥괙거리며 헐떡이며 속도가 줄어지면 열차 안의 장정들에게 손을 흔들며 나란히 달려가곤 했었다!
입영열차가 출발하는 김제역에 머리를 빡빡민 장정들과 가족들 중 대개는 사귀는 애인들이 플랫홈에 가득했다.
이별은 항상 슬펐다!
그날도 그녀가 홀로 플랫홈에 서서 손을 흔든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고 기다려 줘!"
열차는 103보충대가 있는 한번도 와보지 못했던 강원도 춘천까지 달려가 장정들을 토해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민간복을 소포로 싸서 고향집에 보냈는데, 기분이 묘하다.
자식이 보내온 옷과 소지품을 보고 많은 부모님께서 울기도 하셨단다!
문제가 생겼다! 지급받은 군용스푼을 관물대에 걸어놓게 되었는데 누가 훔쳐간 것이다!
쩔쩔매는 나를 본 학교선배가 "군대 물건은 다 국가거여!" 하며 다른 스푼을 가져다 줬다.
하긴 군선배 중에 모자를 잃어버려서 응아하고 있는 병사의 모자를 뒤에서 훔쳐 쓰고 도열해 있는데, 누가 꿀밤을 주며 모자를 빼앗아 가더란다. 알고보니 하필 다른 소대장 중위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훔쳤대나! ㅋ
거기서 이삼일을 대기하다 다시 군용트럭으로 화천군 풍산리 7사단 신병교육대로 옮겨졌다.
민통선을 통과하는데 철모 대신 털방한모자를 쓰고 하얀 눈이 반사하는 자외선에 노출되어 까매진 피부에 두눈만 반짝이는 군인들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더우기 삼월인데도 덜녹은 눈이 간간이 보이는 병풍처럼 둘러싼 높은 산 정상을 따라 긴 철조망을 보고 마음까지 쫄았는데 나중에 보니 낙엽이 져서 앙상한 나무줄기들이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영하 1도, 밤새 비가 내려 황토 연병장을 물이 2-3센티로 살짝 얼어 있어 훈련을 오늘은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합호각이 분다.
동작이 굼뜬 몇 훈련병 때문에 엎드려 뻗쳐를 시킨다.
"살얼음이 얼어 있는 연병장에 엎드려 뻗쳐라니? 훈련교관이 부부싸움을 하고 나왔나?"
이제는 "뒤로 취침!" 하랜다. "세상에 멀쩡한 내무반 놔두고 살얼음 낀 연병장에서 취침이라니!"
이번에는 "좌우로 굴러!"
"우리를 아주 닭강정 재료감으로 보이나 보다!"
오전 훈련이 끝날 무렵 훈련복 위에 1센티 골고루 황토가 발라진, 닭튀김용 인육이 되어 있었다.
물이 차서 얼어 있던 연병장은 물기가 말짱해져 있다.
"아하! 군대식 연병장 말리는 방법이구나!"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밥을 먹는 시간은 5분,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물우물 삼키는 정도이다.
너무 배가 고파 하나님께 배고프다고 불평했다.
그날 점심배식담당인 소대 선임하사가 소대 향도를 맡고 있는 내게 "우리 향도! 수고많지?" 하면 배식량의 두 배를 퍼주는 것이 아닌가!
밥을 퍼넣으며 불평했던 것을 회개했다.
PT(Physical Training) 체조는 "피똥체조"로 불릴만큼 힘들었다.
더우기 목봉체조는 전봇대같은 통나무로 6인 정도가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체조하는데 팔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10분 주어지는 휴식시간에 화장실로 뜀박질을 한다.
칸 수는 적고 훈련병은 많으니 첫번 열어본 칸에 사람이 있으면 그날은 대변 배설이 힘들다.
교육대 옆 무호교회에서
첫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시간 내내 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찬송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었다.
주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계신 느낌이었다!
할렐루야!
소대 향도를 맡아 비교적 다른 훈령병에 비해 바빴지만 틈틈이 포켓성경을 읽어 6주 동안 신약성경을 일독했고, 다른 친구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더니,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아 흩어질 때 많은 동료들이 기도하는 자세로 서로를 격려했다.
8.군대시절2 - 드디어 신병교육이 끝나고 자대배치가 되었다.
7사단 5연대로 배속되고, 따블백 매고 육공트럭에 실려 훼바지역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 사방이 병풍처럼 높다란 산이 둘러쳐진, 해가 져서 더 음산한 숲속의 중대본부로 이송됐다.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전라도 대학생 있나? 죽여버릴꺼야!"
분위기가 살벌하다.
5.18 광주사태가 터져 손꼽아 기다린 휴가가 미뤄진 고참병들의 눈이 원망으로 이글거렸다.
식사하러 취사장 앞으로 도열해 있는데, 키작고 통통한 박재민 취사병이 "전라도 출신 있어?"
"네! 접니다!" "집이 어디야?" "군산입니다!"
"야! 나도 군산이다! 반갑다! 이리 들어 와라!"
따블백을 맨채로 취사장 한켠으로 인도하더니 내 식판에 2L는 될 법한 쇠고기 국을 쏟아부었다.
앗싸! 그날 저녁 고향을 잘둔 이유로 입과 배가 호사를 누렸다!
늦은 밤 소변을 보려 일어나면 시커먼 주위의 산에서 소쩍새가 울어대는데 저러다가 피를 토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쩜 소쩍새가 내 갈급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몰겠다!
"요즘 신병들은 빽도 좋아!"
통상 훼바지역의 장병은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데 신병인데도 면회가 허락됐다는 것이다.
대대장 참모의 짚차 한구석에 앉아 면회소에 도착하니 뜻밖에 그녀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 놀랍고 반가와서 얼싸안아도 부족했지만 칼같이 군기로 날선 나는 얼어붙은듯 눈물만 핑돌았다!
"이 여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야할 듯하다!"
지난 번 아버지를 설득해서 맛있는 요리를 잔뜩 마련하고 그 먼길을 달려왔는데, 부대훈련으로 되돌아 가셨다가 지인을 총동원해서 억지 면회를 성사시킨 것이다.
"어줍잖은 사윗감 위해 친히 왕림하시다니 황공무지로소이다!"
전투력 향상을 위한 부대측정 준비로 대대 전체가 분주했다.
야간사격을 준비하는데 그날은 비가 오기에 내무반에서 불을 꺼놓고 엎드려 쏴 자세로 표적을 식별하는 훈련을 했는데 주간엔 행군과 사격으로 극도로 피로한 병사들이 코를 골고 있는 모습을 중대장에게 들켰다.
그날밤 우리는 빗속에서 홀딱젖은 생쥐들의 "진흙 튀김 집단매스게임"을 연출했다!
철책으로 투입준비를 하는 중, 정신전력의 강화 방법으로 군종병의 임무가 중요하게 떠올라 중대군종으로 픽업됐다.
입대할 때 주님께 군종병으로 근무하게 해주시라고 기도드렸는데 응답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중대 군종병이 없고 열심있는 병사 한두 명이 주축이 되어 대여섯 명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등병이지만 열심있는 나를 대단히 반겨주셨다.
많은 눈이 내려 천지가 새하얀 날 우리 연대는 휴전선에 투입됐다.
밤새 행군하는데 타중대의 병장들도 낙오하여 눈밭에 널부러져 있고, 자존심이 상한 중대장이 개머리판으로 내리쳐도 꿈쩍하지 않아 쇠스라치게 놀랐다.
행군 도중 땀이 나서 전신이 젖고 십분간 휴식하면 온몸의 젖은 땀이 얼어 붙어 괴로웠다.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허기는 물론 비탈길에서 양쪽 새끼발가락이 너무 아파 뒤로 걸었다.
나중 양말을 벗어보니 두 새끼발가락의 발톱이 모두 빠져버렸다!
휴전선과 십여 미터 떨어진 산꼭대기에 소대별로 머물고 나는 중대본부로 배속되어 각 소대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소대를 방문하면 밤새 뜬눈으로 보초를 선 병사들이 잠들어 있다.
어떤 병사는 코를 너무 골아 방독면을 쓰고도 있고, 이를 뿌득뿌득 너무 갈아 이빨이 몽땅 빠져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병사들이 밤세워 근무 서고, 오전에 잠자고, 오후엔 방카 보수작업을 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돌아가 군화를 닦을 시간이 없어 돌부리 등에 부딪혀 하얗게 닳아 있다.
또한 양말을 빨아 신을 여유가 없어 며칠씩 같은 양말을 신기 일쑤다.
난 탄입대에 양말 몇개와 구두약과 구두솔을 가지고 가서 병사들이 벗어놓은 군화들을 말끔하게 손질했고, 몇 친한 병사에게는 깨끗하게 빤 양말을 건네고 헌양말을 건네 받았다.
잠에서 깬 병사들은 자신들의 군화가 말끔히 손질된 것을 보고 감격했고 더불어 군종에 대한 협조로 예배참석 인원도 늘어갔다!
할렐루야!
9. 군대시절 3 - 우리 중대는 고지에 위치했고 트럭도 올 수 없어서 부식을 이웃중대원들이 조랑말로 실어다 주었다.
사람도 등산하다시피 오가는데 말등에 실어 오니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래서 항상 부식은 양이 적었다.
밥을 군용 스푼으로 크게 뜨면 서너 숟갈 정도, 반찬은 세 가지, 단골인 깍두기는 서너개 정도, 국은 된장국이 대부분인데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은 비계가 한두 점, 돼지가 샤워한 물 정도! ㅋ
밥숟갈 놓으면 눈물이 핑돈다.
이런이런! 다큰 청년이 밥숟갈 놓고 눈물바람 하고 있는 처량한 모습이라니 원!
병사들이 휴식 중에 모여 한담하는 주제는 거의 먹는 얘기다.
지난번 휴가 때 한번에 밥을 7공기 먹었더니 어머니가 보시고 우셨다 라느니, 순창고추장으로 참기름 넣고 세그릇 비빔밥을 먹었다느니,
그 곁에서 전우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마음은 고향 어머니가 차려주신 풍성한 밥상 위에 가 있었다!
한번은 뙤약볕 행군 중에 너무 목이 마려웠는데, 마침 길 옆 옹달샘에 누가 빨래를 한듯 세탁비누가 할렐루야 하얗게 풀린, 옷 때가 둥둥 떠다니는 물이 있어 정신없이 마시고 해갈한 적이 있다.
난 그때 강아지 밥도 먹을 수 있는 자신을 얻었다!
주인님! 저는 뷔페도, 생선회도 싫어요!
그저 배만 채우면 되오니 평생 밥은 굶지 않게 해주실거죠?
이필흥 중사님이 주일예배가 끝난 후 내무반에 들어와 담배 한보루를 찢어버렸다.
"나! 담배 끊는다! 이제부터 제대로 예수 믿겠다!"
그리고 저녁 근무 투입 점검 때
"얘들아! 내가 너희들 괴롭혀서 미안하다! 이제 정말 잘해 주겠다!"
사과까지 하셨다.
그 후 그분은 정말 좋은 내 동역자가 되셨고 그 소대 많은 병사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몇주 후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중사께서 병사를 다시 때리고 담배를 피우셨단다.
나는 그 형제를 위해 일주일을 아침금식하기로 하고 사흘 금식 후 하나님께 항복했다.
"주님! 배고파서 도저히 금식 못하겠어요! 불쌍히 보시고 그 형제를 다시 변화시켜 주세요!"
며칠 후 이 중사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나같이 염치없는 놈도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시냐?"
"그럼요!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되돌이켰어요!"
눈물로 같이 기도를 드리고 그는 다시 병사들 앞에 서셨다.
"얘들아! 진짜 미안하다! 내가 잠시 헷갈렸다! 베드로도 헷갈렸단다! 한번 봐주라!"
할렐루야!
주일예배를 뒤에서 지켜보는 표정이 벌레씹는 표정의 한 병사가 있었다.
서재성 상병이다.
전직 조폭 출신인 그는 180센티 정도의 키에 매부리코, 기골이 장대하고 큰 세퍼트도 눈을 맞추면 오금이 저릴 매서운 눈매를 가진, 선임병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와 한 초소에서 2인1조 근무를 서게 됐다.
"야! 너 대학 다닐 때 연애 얘기 해봐!"
한겨울 저녁 5시면 투입돼서 아침 7시 정도 교대한다.
14시간 정도를 방카에 서서 근무하는데, 영하 30도면 체감온도는 영하 50도 정도이다.
얼굴에 동상을 입을 정도여서 얼굴 전체를 뒤집어 쓰는 두건을 쓰는데, IS대원과 같은 모습이다.
군화가 얼어 찢어질 수 있기에, 군용 방한양말 위에 덧신을 신고 그 위에 방한화를 신는데 초저녁에는 땀이 나 곧 얼어붙어 얼음 위에 서있는듯 얼마나 발이 시리운줄 모른다.
옷은 메리야스 속옷 위에 모직 내복, 깔깔이, 작업복(통상 군복), 야전잠바 (여기까지가 겨울 근무복), 그위에 방한복, 그리고 항공복 같은 겉옷을 입는데,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기가 힘들다!ㅋ
그 긴 근무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고향과 두고온 애인이 편지라도 빼먹으면 혹시 고무신 거꾸로 신지는 않았는지, 온밤을 하얗게 걱정으로 지세웠다.
지루하기에 유행가를 수십 곡 뽑기도 하고, 사회에서 무용담이나 연애얘기를 침을 튀겨가며 과장해서 하다보면 어느새 동이 텄다.
"저는 연애얘기는 별로구요, 성경얘기 해드릴께요!"
"그래! 아무 얘기나 풀어봐!"
14시간 정도를 버텨야 하니 무슨 얘기도 통과다!
"햐! 이 기막힌 기회를 놓칠 수야 없잖은가?"
밤세워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얘기했다.
새벽 동이 틀 때쯤 얘기가 끝나자 그가 내손을 덮석 잡고
"야! 니가 믿는 예수 나도 좀 믿자!"
할렐루야!
그와 나는 두 손을 부여잡고 초소에서 무릎을 꿇고 영접기도를 드렸다!
그가 자기 얘기를 하는데, 고위공직자이며 예수믿는 부친이 세컨드를 얻어 모친과 자기를 돌보지 않아 예수쟁이들을 죽이려 했단다.
힘이 장사인 그는 여수와 순천의 주먹계를 휘잡았고,
철책근무를 설 때 후임병을 괴롭히며 시간을 떼웠단다.
후임병들을 만나 자기가 괴롭혔음을 사과함은 물론 얼싸안고 축복하는 기도도 했단다!
할렐루야!
"양일병! 나 한자 좀 가르쳐 주라!"
가방끈이 짧아 한자는 까막눈이란다.
당시 전우신문이 국한문 혼용체여서 신문 측면의 여백에 빼곡히 토를 달아 한자를 읽도록 했는데 두어달 후에는 토를 보지도 않고 읽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좀더 수준높은 성경한자에 도전하기로 했다.
국한문 혼용성경을 구해서 읽도록 했는데, 마침내 마태복음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마침 성경읽기에 열심을 가진 형제들이 대여섯 명이 금박 국한문 혼용성경을 사자고 해서 휴가나가는 병사에게 부탁했다.
당시 일병이던 내 봉급이 3.000 원 정도에 전방군인에게만 주는 생명수당 하루 100원을 합하면 한달에 6-7.000 원 정도인데, 성경 값이 3-40,000원이니 서너달 봉급을 모아야 했다.
그가 휴가를 다녀왔는데 씩씩거리며
"전ㅇㅇ 전방에 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
광주에 가서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순천과 여수, 광주의 조폭들을 한 극장에 불러모아 일장훈시를 했단다.
"우리가 평소 시민들을 등쳐먹으며 살았잖냐? 그런데 그들이 죽어가면 그 신세라도 갚아야 의리 아니냐?"
당시 휴전선 일대는 북한군의 심리전의 일부로 고음의 이상하게 소름끼치는 음악이 밤마다 귀가 먹먹하게 틀어댔다.
또한 전아무개 합수부장의 졸개들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총칼로 찌르고 때리는 잔인한 장면들이 사진과 만화로 만든 삐라가 하루 밤에도 수십 장씩 야산에 뿌려져 웬만한 스토리는 짐작할 수 있었으나 사실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가 일등병 시절 연대장이 군부대 시찰을 나왔다.
훼바 지역에서 각개 병사는 움직일 때 단독군장을 하게 되어 있어 마침 삼사십 키로 쯤 하는 벙커용 통나무를 운반 중인 그를 불러 세워 "철모를 똑바로 쓰라!"고 지시했단다.
그가 왈 "저 친구는 화장실서 큰일 볼 때도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을 ×!"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한번은 아침에 근무를 마치고 자고 있는데 내게로 쿵쾅거리며 달려와서 이마에 혹이 난체로 한숨을 크게 내쉰다.
왜그러냐니까 근무 마치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휴거야!" 하는 소리와 함께 형제들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가더란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관물대에 머리를 부딪혀 이마에 혹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아플 겨를도 없이 앞에서 자고있는 형제를 보고는 "양군종을 봐야 휴거를 알 수 있다!"고 내게로 달려온 것이다.
할렐루야!
그가 제대하는데 우리는 굳게 포옹하고 떠나 보냈다.
십개 월 만에 내 첫 휴가 때 그를 찾아 광양으로 심방했다.
그는 친구들과 화투를 치고 있었고, 성경을 누이에게 주었단다.
그를 시내의 기독서점에 데리고 가서 금박성경을 사드렸다.
일년 후 제대하고 다시 그를 찾아 광양으로 심방했을 때 그는 이 땅에 없었다.
직장생활하며 임신 중인 약혼자와 동거 중이었는데 아침에 보니 소천했단다!
홀홀 단신으로 살아가실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재성 형제! 천국이 참 좋죠? 제가 갈 때까지 기도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