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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4)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이스라엘인들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는 일입니다.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층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훗날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게 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또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참으로 놀라운 소명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라’고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삼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한계와 결함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2코린 12,9)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완전한 사랑에 초대 받은 복된 우리>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결점 완벽주의 차원에서 완전성의 문제라면,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완전함이고,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엄청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이나 하실 수 있는 원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원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지니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에 도전할 때 제일 먼저 지녀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내 사랑으로는 할 수 없다고, 우리 사랑 능력의 가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써 1억은 벌 수 있어도 100억은 벌 수 없는 경우, 그것을 도둑질하거나 사기 쳐서 벌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니 도와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하느님 도움 청하는 것인데,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려는 의지는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할 힘, 곧 애덕을 주십사고 청하는 겁니다.
애덕(Caritas/Charity)은 말 그대로 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Amor/Love)과 다른 것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 또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인 애덕이 없는데, 애덕이 내게 없음을 우리가 겸손히 인정하면, 그리고 애덕을 지니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갖고 있다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 곧 만덕의 근원이신 분에게 그것을 청할 겁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덕들이여,
주님께서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온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정녕 먼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덕은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청해야 하는 겁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고, 희망을 버려서도 안 되며, 열망을 가지고 주님께 청하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라고 억지 부리며 부담을 주신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그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시고 ‘그래, 너는 원수를 죽을 때까지 미워하며 살거라.’ 또는 ‘너는 자기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그 찌질한 사랑이나 하다 죽거라.’ 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이 고귀하고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만이 영원하리라>
소공동체 모임의 말씀 나누기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한 형제님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도 힘들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면 자기도 모르게 치유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분도 그에 공감한다며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을 담아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도 좋아지고 나도 분명히 좋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방을 내렸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내신 사랑,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분명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이 그를 한순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갑시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들을 때마다, ‘원수와도 같은 그 사람’부터 떠올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너무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예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늘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2)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받는 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주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정말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즉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실천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라는 시편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까?”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낱 죄인일 뿐인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도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창세 4,15).
우리는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 또 이웃들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벌입니다(루카 15.24).
말하자면 ‘밥부터 먹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선 먼저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진짜 회개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루카 15,28-30).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용서를 실천하지도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큰아들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과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과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명품인생(2) - “원수를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시편 119,1)
어제 복음이 예수님의 독특한 “제1 대당명제: 성내지 마라”가 주제였다면 오늘 복음은 훌쩍 뛰어넘어 “제6 대당명제: 원수를 사랑하라”를 다룹니다.
참고로 “제2 대당명제: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제3 대당명제: 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제4대당 명제: 맹세하지 마라, 제5 대당명제: 보복하지 마라”입니다.
모두가 “하지 마라”는 부정명령인데 오늘 복음의 대당명제만은 긍정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명품인생의 절정이 원수사랑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어제에 이어 명품인생 시리즈 2번째에 해당됩니다.
어제 명품인생 강론은 참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좋아했습니다.
어제는 미사가 끝난 후 미사도구를 치우는 젊은 수도형제 셋과 악수하며, “수사님, 명품수도자가 되십시오.” 격려하니 수줍은 듯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형제 한분 한분이 다 명품수도자로 보였습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평소 예사롭게 대하던 형제자매들 역시 명품인생으로 보였으니 놀라운 발견이요 깨달음이었습니다.
새삼 깨닫는 바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명품인생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소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매님의 명품인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보낸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명품인생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임을 뜻합니다.
사랑해서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아 본연의 품위있는 명품인생으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온 인류의 어머니 같은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연인간의 에로스 사랑이, 친구간의 필리아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 일방적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어제는 강론과 더불어 “사랑을 노래하라”는 시계 그림을 나눴고, 이어 작가의 같은 제목(sing of love 6)의 그림 하나를 다음과 같은 해설과 곁들여 선물 받았습니다.
70이 넘은 작가가 지금도 그리는 바 어렸을 적 바다같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어릴적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섬집아기 노래말이,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가면 아기는 혼자남아...’라는 노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도 그리워지고, 바다의 파도소리는 사랑으로 아기를 재워주지요.
또 바다밑 고래와 물고기 등 많은 생물을 품어주지요.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노래하며 안아준답니다.”
이에 대한 제 답글입니다.
“섬집아기 동요는 제가 2절까지 산책시 자주 부르는 애창곡이지요.
80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동요를 부릅니다.
어머님이 참 자상한 분이 셨네요!
신림 때 뵈었던 어머니는 사려깊고 어질고 지혜로운 모습이셨지요.”
바다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바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런 바다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한없이 인내하며 그냥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 측은지심의 사랑을 지니고 품위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내 눈에 원수지 하느님 눈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악이 사랑의 결핍이듯, 원수라하지만 뭔가 모르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 어머니에게는 우주같은 자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를 품에 안고 키우는 바다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명품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토록 높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를 말하지만 역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망애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이런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사랑은, 동호회의 동아리들이 주고받는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이런 유유상종의 사랑을 넘어 하느님 아버지의 차별없는 공평무사, 대자대비하신 사랑을 닮으라는, 다음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는 이들 누구나에게 주어진 평생 숙제입니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열려 있는 사랑의 완전함입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하느님 사랑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라 하는 것이요, 삶의 과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명품인생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함(perfection)은 온전함(wholness)입니다.
거룩함(holiness)과 온전함(wholness)이 영어 발음도 똑같습니다.
“둥근 삶, 둥근 마음”이란 제 저서의 말마디처럼 온전함은 둥근 사랑을 뜻합니다.
성인이라 일컫든 옛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의 언급도 신선한 충격의 감동이요 우리의 책임감을 고무합니다.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놀랍습니다.
... 여러분은 하느님께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을 위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평생 과제의 책임을 끝까지 이행할 수 있는가 묻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선물인생은 평생과제의 사랑 책임을 다하면서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명품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성장은 멈추고 노쇠해가도 하느님 향한 신망애는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집중적 영성수련으로 욕심을 비우고 몸은 가볍고 맘은 즐겁게 눈길은 주님께 두고 초연히 영적으로 살아야 할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새 모세인 예수님이 신명기의 모세가 명령한 말씀을 구체화 한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 말씀 중 오늘이란 말마디가 무려 3회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영원한 오늘입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 규정과 법규가 새 모세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5-7장)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산상설교의 절정인 원수 사랑의 경지에 이를 때 모세를 통한 주님의 약속대로 주님은 우리를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고, 우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며,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 합니다.
이 거룩한 명품종교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명품 미사 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 중 명품인생이 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시편 119,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백성’이 가야 할 길>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 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양인 대부분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는 ‘예포자’ 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낮추어 주님께서 나를 올리시는 삶>
어렸을 때 타고 놀았던 시소가 생각납니다.
이 시소는 혼자 탈 수 없습니다.
아니 혼자 탈 수는 있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꼭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재미없어집니다.
내가 내려가면서 상대를 올리고, 또 상대가 내려가면서 나를 올려야 놀이가 됩니다.
이 세상 삶도 시소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가만히만 있으면 재미가 없어지면서 시소 놀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고를 반복하는 시소 놀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만 높이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무조건 힘을 줘서 아래에서 자기를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가려는 마음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더 편하고 쉬운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큰 기쁨 속에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라고 그래야 힘센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을 낮추어 내가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 주님께서 나를 올리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인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은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시지요.
또 자기 형제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세상의 기준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즉,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담긴 사랑을 통해서만 그 사랑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 자기를 낮추는 사랑의 실천,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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