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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일치주간)
제1독서 : 히브 7,1-3.15-17
복 음 : 마르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 엄마들의 뇌를 분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엄마들에게 특정 자극을 준 뒤에 뇌를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우선 “우리 아이가 90점을 맞았어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들의 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뒤, “우리 아이는 70점을 맞고, 옆집 아이는 50점을 맞았어요.”라고
했을 때의 뇌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90점보다 낮은 점수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보상을 담당하는 쾌락 중추가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더 나은 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복을 찾는 사람은 계속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거부의 삶을 삽니다.
마음은 더더욱 완고하게 변하면서
어떤 말과 행동도 좋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의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보시지요.
손에 주어지는 고통은 둘째치고, 사람들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단정 지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만 강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남을 해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속 좁은 판단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주님의 자리를 없애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해도 되느냐?’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 (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시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8살에 억울하게 3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흑인청년 보젤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보젤라가 사는 동네에 할머니가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젤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보젤라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렇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지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보젤라를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2년을 지낼 무렵 무죄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보젤라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심 끝에 보젤라는 50세가 되는 해에
무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32년 동안 죄를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젤라에게 감옥에 있던 32년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젤라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료 죄수를 면회왔던 여인을 알게 되어 감옥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보젤라는 언젠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보젤라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보젤라의 정신과 영혼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감옥에서 27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감옥이 만델라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만델라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긴 감옥에서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국가부도 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였습니다.
불의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의 정신과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하였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오그라드는 것을 넘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저 자신은 보젤라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넓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과 영혼은 때로 오그라들었고, 쪼그라들었던 적이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허영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의 정신과 영혼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안식일은 규정과 율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안식일은 내가 있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편하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비록 몸은 삶의 자리에서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배움의 여정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교회는 오늘 1월18일부터 1월25일
성 바로오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일치주간으로 지냅니다.
올해 주제는 “선을 행하고, 공정을 추구하라(Do good; seek justice)”,
이사야서 1장17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일찍 정해 놨습니다.
‘배움의 여정-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라는,
제가 자주 사용했던 좋아하는 제목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시 6섯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여전히 공감하고 마음 중심에 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참으로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신원임을 참 많이도 나눴습니다.
이 셋 중 오늘은 두 번째 영원한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싶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평생과제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항구히 충실함으로
은총의 선물을 완성해가야 하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배움의 여정에 있어
초발심의 겸손한 순종과 섬김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승의 신원을 요약하는 두 필수적 말마디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이 평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날마다 일기 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어제 잊지 못할 세 경우를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배움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이요,
이런 여정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1. 끊임없이 불도佛道를 찾아 나섰던 구도자求道者
선재(善財))라는 이름을 가진 꽤 커다란 착하고 순한 개에 관한 일화입니다.
얼마 전부터 수도원 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마치 개들의 맏형처럼 보이는 크고 흰 개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웃 불암사의 개라는 것입니다.
불암사 절에서는 잠만 자고 낮에는 요셉 수도원의 개들과 하루 종일 사이좋게 놀다가
밤에는 절로 간다는 사실을 개를 돌보는 자매들이 밝혀낸 것입니다.
아마 외로워서 동료 개들을 찾아왔는가 봅니다.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새삼 배워 깨닫게 되는
수행생활 중 더불어의 도반들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이에 저는 기발한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아마 선재라는 불암사의 개는 전생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듯,
옛집 수도원이 그리워 날마다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2. 제 손자뻘 되는 아이가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한동안 방황하다가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해군 조리병으로 근무하던 중
제대를 앞둔 얼마 전 해군에서 있었던 조리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며
조카가 상장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이제 방황은 접고 제대하면 제 좋아하는 대학 ‘외식조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할 것이라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가 뭐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며
제 손주뻘 되는 아이를 아낌없이 격려했습니다.
3. 오랫동안 수도사제로 생활하던 한 형제의 퇴회 소식과 더불어
사제직으로부터도 떠나게 되었다는 충격적 소식을 접하고 잠시 망연자실했습니다.
한시도 방심하면 안 되는 수도 성소의 길임을 새롭게 배웁니다.
새삼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분투의 노력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미사 중 본기도 마지막 부분과 얼마 전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를 배우는 마음으로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평생 배움의 여정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했던 아드님 예수님이요
그분의 자비와 지혜가 바로 여기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자유로운 처신이 인상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것이며
두려움 없이 소신대로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 아닌 사랑의 법이란 잣대로 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본질을 직시하라는 물음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질책성 물음 안에 자명한 답이 있으니 적대자들은 묵묵부답할 뿐입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며 예수님 자신임을 배우게 됩니다.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깊이 생각하면 저절로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신비의 사제, 멜키체덱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히브리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에 관해 더 깊이 배우며 이해하게 됩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은연중 하느님 아버지께 뿌리를 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암시처럼 읽힙니다.
예수님 역시 오늘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110,4ㄴㄷ) 라는
화답송 시편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자주 확인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런 이해와 더불어 초대 교회 신자들의 ‘정의의 임금’, ‘평화의 임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에 대한 이해 지평도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며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린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리사이 적대자들인 무지의 닫힌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배움의 자세가, 회개가 절실한 이들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소홀하여 무지의 감옥에 갇힐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완고한 마음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말씀하시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성하게 해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 성하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으면 몸도 오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활짝 열린 마음의 자세가, 배움의 자세가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했으니,
말 그대로 점입가경의 야합이자 악의 카르텔입니다.
이렇게 무지의 눈이 멀면 악과의 연대도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이루어집니다.
말 그대로 악의 카르텔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 전 원로 정치인에게 들은 ‘선무당과 색맹色盲의 카르텔’이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지 못할 때 악의 카르텔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처럼,
무지무식하여 용감한 선무당들과 교통 신호들을 보지 못하는 색맹들이 결합하여
악의 카르텔을 이룰 때, 이보다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이렇게 불의하게 이뤄졌지만, 하느님은 파스카의 신비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심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서 매사 깨어 겸손히 지혜로이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배움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아멘.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출애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야훼께 대한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앞서간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행동으로 안식일 법을 어겼고,
오늘은 예수님 스스로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 법을 어기셨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 편에서 보았을 때 치유의 행위가 犯法이 되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아니다.
우리는 앞서간 복음을 통하여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 두 가지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27)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은 원래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 반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일단락 짓기 위해서이다.
물론 논쟁의 일단락은 예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반대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결의하고 그 작업에 착수하겠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더라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밝히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을
실천 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 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카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고, ‘지금’과 ‘여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좋은 일을, 안식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서고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無爲徒食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福이 많은 날이다.
이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主日이다.
따라서 이날은 죽은 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行爲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은 바로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다.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명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어긋난다.
예수께서 자신은 스스로 죽임을 당할 줄을 내다보시면서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활짝 펴진 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출애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다양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이고,
질투로 혈육인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이며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손은 폭력의 손이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스쳐 지나간 사제,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간호해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활짝 펴진 손입니다.
성령께서 죄로 오그라든 저희의 손을 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인 동시에 사랑하는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