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 김해민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 누런 옥니를 보이며 하회탈처럼 웃는 한 노인이 무씨 반 줌과 한 묶음의 잎담배를 사갔을 뿐이다.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사리고 있다.
씨앗의 환(還)을 꿈꾸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약국 안 시계가 한시를 가리킨다. 담배 한 개비로 허기를 막으며 서 있다. 자전거의 삼천리표 글자도 흔들린다. 시계가 세 시를 가리킨다. 그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 꿈을 매만지며 고개를 떨군다. 균형 잃은 약사의 걸음이 봉투 앞에 멈춘다. 그는 여전히 씨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약사가 건네준, 알싸한 박카스 노란 액속에 애간장 타는 그의 뒷모습이 섞여 넘어간다.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킨다.
환(還)의 길을 찾아주지 못한 씨들을 다시 품고 삼천리표 자전거에 앉는다. 그가 종묘처럼 떨궈놓은 새끼들은 떨이한 간고등어 대가리를 뼈까지 야무지게 발라먹을 것이다. 방죽 지나 흥얼대는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자전거머리도 흥얼흥얼 박달재를 넘는다. 검은 대지에 뿌려진 씨처럼 푸른 별들이 하늘에 흩어져 있다.
[당선소감] "이제 겨우 시의 한쪽 맛봐"
사과가 다섯알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김현 선생님의 `반 고비 나그네 길에'에 수록된 `사과 다섯알'이란 수필에서 읽은 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남는 말입니다. 가장 맛있는 것부터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놔두고 항상 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불만이 있지만 대신 다음 것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아무렇게나 뒤섞어놓고 집어먹는 방법에는 아무런 부담도 기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어야 가장 잘 먹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살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제가 지금 입안 가득 단물이 고이는 사과를 베어 물긴 했지만 남겨놓은 사과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건 이미 조금 맛본 사과와 남겨둔 사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앞으로 써야 할 시와 제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것입니다. 이를 감당함에 있어서 할 수만 있다면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키고 처음 시를 만났을 때의 떨림과 긴장을 지니고, 어느 것보다 귀함에도 사람들에게 하찮고 작게 여겨지는 것들을 질료로 삼고싶다는 바람과 동시에 다짐을 해봅니다.
이미 받은 복을 세어보게 하는 감사한 얼굴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셔서 제 삶을 도우시는 그분과 분명히 뜬구름 잡는 일로 여겨졌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문학을 하겠다며 서른이 되도록 걱정만 끼쳐드린 딸을 믿음의 눈으로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흐트러지려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도록 용기를 주신 분들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심사평]
신인을 기다린다는 것은 패기넘치는 사유와 활달한 상상력의 소유자를 기다린다는 뜻일 것이다.
치열한 언어 수련의 내공이 엿보이면서 기존의 시적문법에 오염되어
있지않은 시를 고르기 위해 응모된 시들을 꼼꼼히 읽었다.
일곱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상훈의 `그물'은 시에 투여하는 열정에 비해 감동의 폭이 좁다는 게 흠이었다. 평이한 시적구조, 이미지의 불투명성 등을 차차 고쳐나갔으면 한다.
길동호의 `등나무'는 세심한 관찰에 의한 발견의 눈이 시선을 끌었으나 `이제 무겁게만 느껴지는구나' `
나는 그것이 두렵다'와 같은 직설적 표현이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나경의 `환한 방'은 언어를 매만지는 살뜰한 솜씨가 돋보이는 시다.
하지만 `길' `허공' `꽃' `나비'로 변주되는 이미지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복처럼 서러운 흰빛'과 같은 표현도 신인으로서의 참신성을 의심하게 만든 대목이다.
김해민의 `희망약국 앞 무허가 종묘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는 규격화된 틀에 맞춰 쓴 시라는 오해와 세밀하고 따뜻한 묘사로 성공한 시라는
장점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하지만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나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도사리고 있다'와 같은
구절들은 아주 뛰어난 표현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대상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문학의 밭을 힘차게 갈아엎는 좋은 쟁기꾼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형만, 안도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