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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으로 초막을 지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유혹도 은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유혹을 많이 받으셨죠?
사순절을 맞아 희생 봉사, 극기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없던 일이 생기는지…
그래도 나름대로 절제된 삶을 통해서 기쁨을 간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 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 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루카 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도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피정을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바뀐 것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바뀌었습니다.
나의 얼굴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흰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예수님으로 온몸을 무장한다는 의미(로마 13,14)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옥좌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는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묵시 7,13-17)
결국 흰옷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이니 만큼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 줌으로써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위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명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에 보면 (“오직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하며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루카9,35).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 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손에 펴들고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 삼아 주님의 초막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2베드 1,16-18)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들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잘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삶 안에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고,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계시하신)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율법의 대표자와 예언자들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과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시고 보증하신 말씀입니다.
3)
33절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황홀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도 아니고, 아무 말이나 막 한 것도 아닙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너무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 라고 소망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소망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중단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원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든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부터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수난 때에 모두 달아나 버렸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사도들이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타볼산에 오르는 법>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두 사람'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루카복음 24장 4절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빈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마르 1,12; 마태 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표현은 “고통 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변모의 여정 -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시편 27,9ㄱㄴ)
사순시기 제1주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화가 나오고,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소개됩니다.
수평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이어 수직의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산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변모 사건에 앞서 바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최측근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토록 하시니 참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나야 한다.”
이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확실한 지침을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어둡고 무거운 경직된 상황에 이어 주님은 다소 긴장되었을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여드레쯤 되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는 물론 삶의 여정에 참 좋은 세가지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기도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 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어느 때보다도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세인들의 타락한 삶이 더욱 우리의 기도를 부추깁니다.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이런 세속적 육적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복음 첫 대목부터 ‘기도’란 말마디가 나오고 기도의 결과 주님의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바로 기도와 더불어 발생한 주님의 변모 사건이요 여기서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해줍니다.
깊은 기도중에 시공을 초월하여 두분의 자문을 받으며 친교를 나누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 역시 주님을 만나 축복말씀을 들었으니 이 또한 깊은 기도중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도 중 이런 신비 축복 체험은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초연하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중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성급한 이기적 집착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연중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신비 체험은 독점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잠정적 삶의 여정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또 여기는 궁극의 머물 안식처나 정주처도 아니고 삶의 제자리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상중에 있는 순례자의 삶임을 잊은 것입니다.
셋째, “순종하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집착을 교정하는 하느님의 기민한 개입이 뒤따릅니다.
집착하지 말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중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을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내려 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요 빛이자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인도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사순시기 광야여정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의 세 제자들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며, 파스카의 여정중에 지칠줄 모르는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복된 제자들이요 이제 예전의 세 제자들이 아닙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세 제자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거룩한 신비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이 세 제자들은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이심전심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과 더불어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용기백배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흡사 오늘 주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매일이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삼아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필리 4,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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