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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무림(靑春武林) 제 13 장 개전(開戰).-1
오시(午時) 무렵, 사자전(獅子殿).
입증이나 하듯 이곳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금시라도 펑 터져나갈 듯한 분노와 비탄으로 가득 찼다.
대전 내에는 백대봉공이 줄 지어 서 있었으며 상단의 태사의에는 유목공이 앉아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유목공의 뒤쪽, 육대당주가 섰던 자리에 후계자의 물망에 오른 서문한랑과 상황보의 여만옥 그리고 옥호방의 장청이 더 추가되어 서 있다는 것!
그리고 대전 복판에 뚜껑이 열려진 수많은 관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안에 머리 없는 시체들이 수두룩하게 누워있었다.
하나같이 시뻘겋게 핏발이 곤두선 눈에 바위같이 뻣뻣이 굳어진 표정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특히 봉공들 중 자신의 문파, 즉 혼천소마에게 살해된 삼십대 문파에 예속된 여만옥의 표정은 거의 사색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서문한랑의 표정 역시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곽나영을 통해 미리 훤백이 위험을 알려주었으나 그는 코웃음치며 무시했었으니...!
하나 막상 일이 닥치고 이런 엄청난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자 낯빛이 흑색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살해된 자들 중에 아직은 금천군이 보이지 않아 다소 안심할 수 했다.
와드득!
봉공 중의 하나가 무시무시하게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맹주, 속히 척살령을 내려 놈들을 추살해야 합니다! 어서 대책을...!”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그야말로 우스개소리였다.
기실 혼천소마에게 척살령이 내려진 것은 이십년 전, 지금에 와서 또 무슨 척살령을 내린다는 말인가?
추살하자는 것도 그러했다.
대체 혼천소마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유목공의 지금 모습은 이게 정말 무림맹주의 모습인가 싶을 정도로 초췌했다.
죽은 삼십대 문파의 대표들도 대표라 치지만 그 자신도 한 순간에 평생토록 가꿔온 이름에 먹칠을 한 꼴이 되었으니...!
그러나 어떻게든 힘을 내어야만 했다.
훤백이 이런 일을 예측했음을 알고서도 속수무책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터라 여기에서 주저앉으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셈...!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참으로 슬프고 분노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일단 냉정을 되찾으십시다...! 정황을 살펴보면 놈들도 하루이틀 사이에 일을 계획한 게 아닌 듯하고...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오.”
시립한 당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피해내역부터 보고해 봐라. 현재 밝혀진 사망자들은...?”
일내당의 적운협 유천소가 컥컥한 어조로 대답했다.
“상황보의 여상락 방주를 비롯... 살해되신 대표들이 알려진 분만 현재 서른 두 분이십니다. 기타 인솔하고 오신 가신들을 합하면 도합 천백스물세 명이 희생 되었사옵고... 혼천소마들의 상황은 아직 밝혀진바 없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피살된 인물이 무려 천백스물세 명...!
그야말로 염라대왕도 치를 떨만한 어마어마한 떼죽음 아닌가?
“천인공노할...!”
유목공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그 밖의 대표들께서는....?”
“떠나신 분은 도합 여든 두 분으로... 도처에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소식이나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놈들이 계속 노린다면 피해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백대봉공의 얼굴에 한결같이 극심한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피해가 계속 될 것이라면... 아직은 이 자리에 시체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언제 자신들 방파의 대표들도 목 없는 시체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대비책은...?”
일외당의 적수환월 설궁도가 포권과 함께 대답했다.
“별로...! 무엇보다 떠나신 대표들의 위치가 파악되어야만 경호 및 후사를 도모할 수 있기에 피차 연락이 닿지 않는 한 방법이 없습니다...! 특히 놈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더욱 어려온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현재로서는 알아낼 방도가 없사오라...! 도원주께서도 백방으로 추적하고 있지만 여전히 실마리를 잡지 못하셨다 합니다...!”
속수무책.
이쯤 되면 여하한 계속 일어날 피해를 줄인다거나, 혼천소마를 잡아내는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유목공은 피가 흐를 정도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일...! 각처의 분향과 동도들에게 일러 내려진 경계령을 일급비상경계령으로 바꾸고... 도처를 이잡 듯 수색하라고 전달하라.”
진작 상신되었던 일을 이제야...!
“그밖에 생사가 불분명한 대표들의 방파에 급보를 띄워 서둘러 강력한 군마(軍馬)를 보내 중도에서라도 안전을 도모케끔 이르고...! 내삼당은 추호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유사시 놈들의 공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외삼당은 전 인원을 동원, 놈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태화성 일대를 순회하며 감시에 나서도록 한다.”
“명!”
“그 밖에... 또한 중원전역, 지역마다 금(金) 만 냥의 현상을 걸어라. 놈들의 행적을 알려오거나 목을 하나 베어올 때마다 그 자리에서 일만 냥의 현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명(命)!”
여섯 당주를 비롯 서문한랑 등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어 부복지례를 취했다.
유목공은 비로소 백대봉공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슬프지만 지금 본좌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조치뿐인 것 같소...! 그런즉 봉공들도 상황이 호전되기까지 함께 무한 대기를 해주기를 부탁드리며... 비록 직무는 행정을 도모하는 것이나 일이 엄중한 만큼 유사시에는 함께 나가 싸워야할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리고 돌아가신 대표들의 주검은... 일단 대내 근처의 들에 안치하도록 합시다. 본좌 기필코 혼천소마를 일망타진하고 영전에 그들의 수급을 바쳐 위로할 터인 즉...!”
일급 비상경계령에 지역순찰령, 대내외삼당의 시위에 혼천소마의 머리통 하나마다 일만 냥의 포상!
그야말로 완전히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런들 모든 것이 미봉책, 도처에서 살겁을 벌이는 혼천소마를 따라 잡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예비책들이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
그러한 한편.
부용원(芙蓉院).
“크핫핫핫핫...! 통쾌합니다! 맏형, 역시 세상이란 오래살고 볼 일이구려. 하룻밤 사이에 방주나 명숙으로 불리는 놈들의 머리통이 서른두 개, 아마 이런 일은 무림이 생긴 이래 처음이 아닐까 싶소!”
혼천소마의 임시 거처가 되어있는 이곳은 거의 축제분위기로 변해있었다.
“크흐흐... 실로 이십 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오! 지금쯤 유목늙은이의 낯빛은 완전 사색이 되어있을 테지!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엄청난 일을 벌였는데도 우리를 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요. 역시 명분을 가져야 한다는 맏형의 지략이 적중한 것 같소!”
그러했다.
살해된 서른 두 대표들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현재 무림은 일괄 처리된 무림맹의 존속문제와 후계자 승계 문제에 대해 더 시끄러운 상태인 게 분명했다.
어차피 혼천소마라는 존재는 무림최대의 악한들로 낙인찍혀 있는 상태였으므로 무슨 짓이던 으레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반면, 무림맹에서는 실로 쉽게 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서백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싸움이란 명분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 절대 안심할 수는 없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치더라도 유목늙은이가 보통이 아닌 만큼 단단히 고삐를 조여야 해. 특히 그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자가 또 있는 것 같네.”
“응...?
“유목 보다 더 경계해야할 자라니...?”
순간 소마들의 얼굴에 일제히 흠칫,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누굽니까?”
서백은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예감일 뿐이네만 지난 밤 금천군을 도왔다는 두건인들일세. 그들은 정확히 우리가 그를 습격하는 때에 맞춰 그를 구해냈어. 우연히 지나던 길에 나섰다면 모르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는 실로 심각한 일이네. 필시 누군가가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떳이 되는 것인데, 속히 내막을 알아내야 하네.”
들썩하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역시 우연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습니까? 기실 누군가가 정말 맏형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면 사전에 이 일을 무림맹에 일렀을 터이온데... 처음부터 봉쇄조치를 했을게 아니겠습니까?.”
하나 서백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아...! 아무리 상대가 내 생각을 읽어도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한갓 예측에 지나지 않을 뿐인 걸세. 따라서 추측만으로는 결코 군림대회 같은 사안들을 취소할 수 없네. 이는 설혹 유목공 본인이라도 마찬가지지.”
차갑게 눈을 빛내면서도 극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장기나 바둑판이 바로 그러하네. 대개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이라고 상대가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당하는 것은 아닐세. 보다 상대의 수가 완벽하게 되면 휘말리는 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거지. 지금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상태인 거고!”
“…….”
“하지만 문제는 공격하는 쪽도 상대가 내 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면 크게 조심을 해야 하네. 만에 하나 패착이 생길 경우에는 단숨에 상황이 역전될 수 있으니까. 또한 아무리 당한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인 싸움은 없어. 상대를 읽는 만큼 최대의 항거를 할 것이고, 이런 경우 승기를 잡은 쪽도 당연히 큰 피해를 보게 마련이지. 실제로 그로 인해 우리도 네 아우가 희생되었네. 이로서 일흔 셋이던 형제들이 예순아홉으로 줄었고. 이렇게 야금야금 파 먹히다가는 아무리 승기를 잡고 있다 쳐도 결국 우리가 패하게 되는 걸세. 무엇보다 저 쪽은 수효가 훨씬 많지 않은가. 이것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일세.”
혼천소마들의 얼굴에 잠시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맏형의 생각을 읽고 있는 자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우리도 계속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온데...?”
서백은 갑자기 모두의 사기가 죽자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했다.
“이미 묘수 풀이를 말해주지 않았나? 한들 이젠 소용없는 것일세. 설령 누군가가 정말 나를 읽고 있다 치더라도 여기까지가 전부라는 거지. 다시 말해 지금 경우를 바둑으로 보면 귀 싸움에 지나지 않았던 걸세. 어제 일은 모여든 대표들을 친 것이라 매우 범위가 좁았다는 것이지. 이에 요행히 저항수를 읽고 급습, 겨우 금천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하나 더는 우리가 어떻게 치고 들어갈지 알 수가 없게 된 거야. 중앙을 칠지 가지를 칠지...! 칼자루를 이미 잡았네.”
칼자루...!
“따라서 더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보네만, 여하튼 내 말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일세. 무공역시 보통이 아닌 자들이니 속히 제거해야 우리가 보다 쉽게 일을 진행할 수 있긴 하겠지.”
혼천소마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맏형만 믿겠습니다. 하면 다음 순서는...!?”
서백은 서두르지 않고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계획은 모두 완벽히 세워뒀어. 일단 유목의 반응을 봐야지. 여기에 맞춰 계속 허를 찔러가며 우리 할 일을 해나가는 걸세. 이제 급선무는 여길 떠나 다음 은신처로 옮기고, 더불어 오늘 밤 안으로 대형사고를 한 번 더 쳐보세. 그렇게 하면 무림맹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할걸세.”
대형사고...!
사건이 있고 보니 말만 들어도 왠지 섬칫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흐흐흐...! 듣기만 해도 기분 좋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전에도 말씀 드렸듯, 평생 쫓기며 사는 것 보다 소제는 차라리 놈들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죽는 게 더 났다고 생각합니다.”
살무흔 이소량이었다.
“아우들의 그런 점이 더욱 마음에 좋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세. 계획대로만 따라주면 곧 좋은 날이 올 걸세.”
거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어조였지만 한마디 한마디에는 실로 큰 설득력이 실려 있었다.
“말씀만 하십시오! 당장이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에 혼천소마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침을 발하며 일제히 서백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서백...!
혼천소마의 맏형이자 만가무불살(萬家無不殺)이라 일컬어지는 자객집단을 이끌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살기나 사악한 내음을 풍기지 않는, 다만 무심한 기운만 느껴지는 악한 같지도 않아 더욱 무서운 악한...!
*
같은 즈음.
추밀원.
“결국 예측한 게 모두 맞았군...!”
훤백과 황보선, 사도횡, 당삼화, 황보소미, 곽나영도 나란히 가을햇살을 받으며 툇마루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혼천소마가 대표들을 급습한 것에서부터 격문을 올린 것에 이르기까지...! 격문의 글자, 토씨까지도 비슷해...!”
뻔히 예측했던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난 후의 허허로운 심정이었다.
황보소미가 기묘한 시선으로 훤백을 보며 질문했다.
“그런데 댁에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그렇게 족집게처럼 알아낼 수 있었던 거지? 마치 서백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잖아?”
훤백의 표정은 전에 본적 없었을 만큼 씁쓸했다.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놈들이 된 입장으로 일을 살핀다면 그 정도 예측이야 별로 어렵지 않아.”
음색 역시 무거웠다.
“어쨌거나 그렇다 쳐도... 피해가 생각보다 너무 크다. 하룻밤 새에 죽은 대표가 서른둘이라니, 이런 일은 듣던 중 처음이야. 무림맹이 너무 크게 실수한거 맞지?”
황보소미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자체가 생긴 이래 처음 맞아. 그러나 솔직히 대책도 없었잖아. 첩지는 넉 달 전에 발견됐지만 끝내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훤백은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군림대회를 강행했다거나 턱도 없이 후계자문제를 일방처리 한 것 등, 무조건 책임이 있어.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던졌던 거나 같았던 것이지.”
황보선이 무겁게 질문해 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설마 놈들이 여기서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인데 뭔가 또 짚이는 점 없어?”
훤백은 씁쓸히 실소를 머금었다.
“뭐 계속 대형사고가 터지겠지. 어차피 칼자루는 놈들이 쥐었으니... 아마 이젠 더 마음대로 설쳐 댈거야. 분향을 부수거나 백대방파를 치거나 혹은 더 지독한 어떤 음모를 꾸며대거나...!”
“막을 방법은 없는 건가?”
“없어. 이젠 압축 됐던 범위가 풀렸어. 다시 말해서 내가 서백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서찰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젠 회합의 범주를 넘어섰으니까. 그런 이상 나도 더는 그가 뭘 할지 알 수가 없지. 이 넓은 세상,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무림맹도 그래. 뒤늦게 비상경계령에 뭐에 온갖 예방책을 내렸다지만 다 실없는 거고, 실질적인 대책이 아닌 다음에야 살겁은 이제 갈수록 눈덩이 구르듯 커지게 되어있는 거야.”
잠자코 있던 당삼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림맹이 정말 붕괴될 수도 있단 소리니?”
훤백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무림맹이라고 어디 불사신인가? 장기판을 한 번 생각해 봐. 아무리 쪽 수가 많고 강성한 세를 가진 사람들도 자칫하면 패하기 일쑨데, 사실 그건 전쟁과 똑 같거든? 지금 무림맹이 바로 그런 외통수야.”
휙,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난 역시 무림맹 뿐 아니라 이런 일 자체에서 떠나고 싶어졌어. 이제야 아버님 등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공을 배우는 걸 반대하셨는지도 알 것 같아. 죽은 자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야.”
황보소미가 이런 그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댁에... 처음이라서 그래. 사실 일반 사람들은 처음엔 뭔가 알지도 못하면서 무림에 대해 괜히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거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악당들을 무찔러 천하인들에게 마구 존경을 받는 그런 환상 같은 것 말이야. 하지만 막상 진짜 무림인이 되어보면 실상은 다르지. 늘 죽음과 피라는 것을 대해야 하니까. 끔찍한 거지.”
“…….”
훤백이 침묵을 지키자 황보소미는 비로소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눈에 더욱 기묘한 빛을 떠올리며 얼른 화제를 바꿨다.
“아, 참! 그래! 그러고 보니 그건 그렇다 치고, 댁에의 내공은 어떻게 된 거야?”
내공...!
“응...?”
순간 훤백은 크게 흠칫하는 기색을 떠올렸다.
“내공이라니 무슨 내공...?”
황보소미는 잔뜩 콧잔등을 찡그렸다.
“또 사기 빨 올리려고 하지! 어제 밤 금천군을 구하러 갔을 때 댁엔 경공을 구사하던데? 가르쳐 준건 나지만... 분명히 내공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 여섯 중 누구 못지않았던 그 경공술은 대체 어디서 나왔어? 요즘은 내공 없이도 경공술을 전개할 수 있어?”
우리 여섯!
그렇다면 지난 밤 서문세가를 도와 금천군을 구한 것은 역시 도천을 비롯한 이들이라는 것!
그 중엔 훤백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아, 그거...!”
훤백은 허둥지둥, 졸지에 엄청스레 당황스런 표정이 되었다.
“글쎄...? 그러고 보니 그런데? 확실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엉겁결에 황보소저가 가르쳐준 구결대로 막 하다보니 되던데??? 가르쳐준 수법이 워낙 좋은 거라 그런 건가? 아냐, 어쩌면 하느님이 기적을 내렸을 수도...!”
그야말로 멋대로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황보소미는 기가 차다는 듯 찍, 흘겨보았다.
“정말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남자야! 분명 절정의 내력이 있는 것을 짐작했었는데 계속 시침 떼고, 심지어 무장원에서의 수련에서 조차 내공이 있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어! 이건 정말 상상을 벗어나는 일이야! 수련 중에는 누구건 실수로라도 한 번 쯤은 내공을 사용하게 되는 법이거든? 한데 머리가 터지면서도 노출시키지 않았으니 댁에, 정말 사람 맞아?”
아닌게 아니라 그렇다면 실로 묘하기 이럴데 없는 노릇!
기실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시피! 훤백이 가진 무공이란 것은 고작해야 관서표국의 담장너머로 배운 몇 수의 무당검이 전부였다.
그나마 정식으로 수련을 쌓은 것조차 무장원에서의 두 달여가 전부.
한데 당토 않게 이런 그에게 갑자기 내공(內功)이라니...?
격공술수조차 도천에게서 간신히 배우게 된 그로서는 분명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난 밤, 금천군을 도운 여섯 두건인들은 나타날 때와 사라질 때, 모두에 걸쳐 강력한 내공을 기본으로 한 경공을 구사했고, 여기에 정말 훤백이 있었다면... 역시 뭔가가 또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다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너구리에게는 분명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더 많은 무엇인가가 감춰져 있다는 뜻이 되는 셈인데...!
이에 훤백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황보소미는 얄밉다는 표정을 지었다.
“쳇, 이래저래 댁에를 가리켜 보기 드문 효웅으로 무림의 큰 복이 아니면 재앙라고 하신 천노선배님의 말씀이 옳군? 대체 뭐가 그렇게 숨기는 게 많아? 나 댁에 애인 맞아?”
“글쎄 그게...! 그건 역시 하느님이...!”
그러자 훤백은 잔뜩 난처한 표정이 되어 우물쭈물, 또 되지도 않는 엉뚱한 소리를 마구 늘여놓으려고 했다.
“하느님 같은 소리하네! 콱!”
황보소미의 눈이 동그랗게 부릅 뜨여졌다.
“어쨌거나 무림에 복이건 화건 아무래도 난 아무 상관이 없어! 보단 워낙 사람이 음흉한 것 같아서 걱정인데, 전에 말한, 나 책임지는 건 확실하지?”
“응...!? 책임...?”
찰나 훤백은 더욱 크게 당황한 심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더 앉아있다가는 계속 당할 것 같은 눈치...!
이에 그는 급급히 황보선 등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후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래, 맞아. 그러고 보니 소변 봐야 할 시간이 됐군? 깜박 잊었네.”
괴상한 핑계.
역시 괴상스런 놈인 만큼 아마 소변도 시간이 되야(?) 보는 듯 했다.
이어 그는 정말 급하다는 듯 뒤도 안돌아 보고 잽싸게 바깥으로 튀었는데...!
“정말...!?”
이에 황보소미의 눈 꼬리가 쭉 찢겨져 올라가자, 곽나영이 갑자기 야시시하게 눈을 빛내며 황보소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사람이 뭔가 책임질만한 짓을 했어?”
사실 이런 방면(?)에는 워낙 좀 거시기한데가 있는 곽나영 아닌가?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에 황보소미는 그만 부끄럽고도 어이가 없어졌다.
“참나...! 곽소저는 늘 제사보다 젯밥에 더 생각이 있는 것 같어. 하도 의기소침해 하기에 다른 데로 정신을 돌려주려고 한 소리야! 왜? 혹시 곽소저 저이에게 관심 있어?”
“쳇...! 시시하게.”
곽나영은 대답이 기대에 못 미치자 크게 실망했다는 혀를 찼다.
“그래, 뭐, 솔직히 말해서 전엔 나도 관심이 좀 있긴 했었지. 아무튼 저런 사람 사귀는 거라면 황보소저는 진짜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 같아. 대개 저런 남자들이란 건 큰일은 잘해도 여자들에게는 거의 쑥맥이거든. 모르긴 해도 황보소저가 더 적극적이 되어야 할걸?”
역시 선전수전, 물전(?)까지 다 겪으신 고수다우신 말씀!
잠자코 있던 사도횡이 듣기 거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쩝...! 옆에 남자들 앉혀놓고...! 하지만 소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훤백이 보기보다 여린 데가 있어놔서...! 속이 깊고 통은 무지 크지만 워낙 정에 약한 게 흠이다. 모르긴 해도... 이번 일로 정말 무림맹이 뒤집어질 정도로 큰 일이 일어난다면 막아낼 사람은 훤백 정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군. 흔들리지 않게 잘 잡아주기 바래.”
황보소미는 더욱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글쎄, 잡아주는 거야 꽉 잡아줄 수 있지만...! 오라버닌 이상하지도 않나보네? 내공도 없다던 사람이 저런데 한 마디 쯤은 해야 하는거 아닐까?”
하지만 사도횡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툴툴, 실소 지었다.
“뭘, 어차피 녀석이 밑도 끝도 없는데. 그냥 처음 본데로 인정을 하면 그만이지. 우리 중에 녀석이 고수 같다고 여기지 않았던 사람 있었던? 그럼 그대로 믿어버리면 돼. 저 놈의 말 중에 제일 믿어서 안 될 것은 ‘맹세코’ 라는 거다. 워낙 도깨비 방망이라고 보면 돼.”
“쳇! 심하거든? 수련한답시고 박이 터지면서도 내공을 사용 안한 건 뭐지?”
황보선이 간략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 진짜 수련인거지. 잘은 몰라도 녀석에겐 아직도 많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어쨌건 수련은 처음이 맞을 거다. 요는, 대단한 술수에 내공까지 겸해 있을 경우라면 여하한 고수들이 아닌 한 수련이 될 리가 없지. 너무 싱거우니. 아마 그래서 사용치 않은 걸 거다. 어떻게든 감각을 살리자면 위험을 맛봐야 했을 테니까. 그 머리통을 잘라 내 머리 속에 넣고 싶을 정도지.”
실로 끔찍한 녀석...!
“이래저래 그냥 느껴지는 대로 믿어야 할 놈임에 맞는 거야. 보여 지기 전에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니까.”
황보소미는 꽤 심각했다.
“쳇, 거짓말도 능란하고 하는 짓도 그렇고...! 심계에 내공에 감각에... 사실이라면 우리 중에는 이미 적수가 없겠어! 정말 어찌된 사람이지?”
갸웃갸웃...!
하나 황보선 역시 이런 따위는 더 신경 쓸 게 없다는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걱정이군요, 정말. 말마따나 무림맹이 세운 대안이란 것은 고작해야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다음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한들 달리 해결할 방도도 없는 것.
오로지 더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첫댓글 잘밧어요
감사 감사 합니다.
즐독하고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