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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쟤들이 아니라 저희가>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다니 9,5ㄱ)
오늘 다니엘서에서 저희는 죄를 지었다는 고백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이 고백에서 저는 ‘저희는’이라는 표현이 유독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쟤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지 않고, ‘저희는’ 죄를 지었다고 공동의 죄를 공동 고백하는 겁니다.
이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래야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공멸하는 공동체를 보면 서로 '쟤'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고 그래서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공멸의 길을 끝까지 가려는 그들이 가엾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서로 '너'를 눌러 이기고 자기만 살려고 하다 결과적으로 공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데, 먼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루카 6,37ㄱ)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함부로’라는 부사 하나가 빠져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판단은 그 자체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신으로나 정신으로 병이 있으면 그 병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래야 정확한 치료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치 말고 신중히 그리고 정확히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판단은 사랑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나 사람의 상황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판단이 문제이고, 그것도 단죄가 목적인 판단이 문제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루카 6,37ㄴ)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단죄하지 말라는 말보다 용서하라는 더 적극적인 사랑, 또는 더 적극적인 자비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종합하면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이와 관련하여 저는 옛날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저는 단죄한 다음 용서하느라 애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 멀쩡한 사람을 단죄하여 죄인 만들고, 그런 다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애초에 단죄하지 않았으면 용서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교만했기에 감히 단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고, 죄지었던 것이며, 교만을 제거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했기에 용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밑바탕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이 밑바탕 되었을 때야 우리는 다니엘서의 예언자처럼 쟤들이 죄지었다고 고발치 않고 저희가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한은 없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심판받을 죄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저 무식한 놈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이 무식한 놈들아, 저주나 받아라.(지옥에나 가라.)”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바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기도 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그 구원 사업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사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고, 사실상 사탄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 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은가?”
루카복음 17장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더 길고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마태 18,15-17)
형제가 죄가 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죄라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심판일까, 아닐까?
또 그 형제에게 가서 ‘너, 그런 짓을 하지 마라.’ 라고 꾸짖는 것은 단죄일까, 아닐까?
‘죄 짓는 형제를 꾸짖는 일’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죄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믿지 않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지옥에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천국에 가 있고, 당연히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연옥이나 지옥에 가 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는 원래 ‘정의와 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권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 실현’을 위해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닮의 여정 -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
(시편 31,17ㄱ)
하느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얼굴이 자비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만 점차 병세는 호전되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입니다.
새벽에 읽은 어제 발표한 삼종기도후 메시지도 교황님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은 약할지라도,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기도로부터, 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서로 희망의 빛나는 표징이 되는 것으로부터 막을 수 없습니다.
부단히 하느님 사랑의 광선을 반사하십시오.”
그 어떤 환경 안에서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나는 표징으로,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오늘날 모든 불행과 재앙은 하느님을 떠남에서, 하느님을 잊음에서,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발광체發光體 자비하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광신도狂信徒가 되어 발광發狂하지 말고, 광신도光信徒가 되어 하느님을 발광發光하는 삶은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하느님을 찾아야 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날로 나라 안팎으로 위험이 증폭되어가는 위기의 시대에 올해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더욱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느 때보다 절실한 4월 20일 부활대축일까지 기도와 회개, 절제와 극기의 사순시기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 늘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귀가를 간절히 한없이 기다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답임을 보여줍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은 ‘밖’을 두려워하게 된다.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산>
나로부터 벗어나 밖의 하느님을 향할 때, 부단히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오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서 나뉘어 산다.
길흉吉凶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
<논어>
부단히 한계를 넘어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닮아감으로 평화 공존의 삶을 살 때 길흉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다음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복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 믿는 이들을 향해, 아니 전 인류를 향해 당신의 평생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루카복음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제시하는 바 유일한 평생과제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소원이자 우리의 평생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날로 자비의 삶은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하늘’이란 고백 글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이 아닙니다.
애매한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동사입니다.
하느님의 깊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가 바로 답입니다.
예수님의 구체적 처방이 모두 실행동사입니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되로 되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이요 이런 행위 또한 부단한 의도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의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결정적 수행은 기도와 회개임을 제1독서 다니엘서가 제시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철면피, 적반하장의 뻔뻔한 미치광이,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극소수 양심과 상식을 잃어버린 무지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법에 따라 걷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마음에 새기듯 절실한 내용들이라 대부분 다 써봤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순시기 집중적 수행이 기도와 회개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기도가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회개의 기도와 더불어 하닮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좋은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
(시편 31,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
가톨릭 연구소에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성당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정도 되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입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 발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입니다.
여행을 가도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가톨릭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같은 전례를 하기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겸손, 희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섯째는 ‘전례와 의식 참여로 영적인 충만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성당을 떠나는 이유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삶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넷째는 성당 내에서의 소속감, 교제, 혹은 따뜻한 공동체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교회 조직의 경직된 구조나 변화에 대한 저항, 혹은 내부 정책과 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 교육 강화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입니다.
셋째는 신자들의 재교육입니다.
넷째는 성당의 시설 개선입니다.
다섯째는 청년 사목의 확대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축복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깊은 만남’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당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셋째는 ‘죄의 용서와 영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넷째는 ‘공동체로서의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교회가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
다섯째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현세에서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비록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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