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자랑스런 경북 경주 양동(良洞)마을
양동(良洞)마을의 사적(史蹟)을 간략(簡略)히 정리하여 본다.
고려 말 경기도 여주 땅에 살던 여강(驪江) 이씨(李氏)
이광호(李光浩)가 변란(變亂)을 피해 경주(慶州) 땅
양동(良洞)마을에 내려와 숨어 살았다.
그 손녀와 풍덕(豊德) 류씨(柳氏) 류복하(柳復河)가 결혼을 하였다.
사위 류복하(柳復河)는 양동(良洞)마을 처가(妻家)로 들어와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남자의 처가살이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
고구려의 결혼제도에 “서옥제(壻屋制)”가 있다.
딸을 결혼시킬 때 집 뒤에 “서옥(壻屋-사위의 집)”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서 살게 한 데서 유래됐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도 신사임당고 혼인후에
강릉 처가살이를 했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平定) 공신(功臣),
월성(月城) 손(孫)씨 손소(孫昭) 가 류복하(柳復河)의 딸과
결혼을 했다.
사위 손소(孫昭) 또한 양동(良洞)마을 처가(妻家)에 들어와 살았다.
손소(孫昭)는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마을에 서백당(書百堂)을
지었다.
손소는 서백당(書百堂)에서 일곱 남매를 낳았다.
둘째아들 손중돈(孫仲暾)은 훗날 청백리(淸白吏)가 되었다.
손소의 맏딸과 또 다른 여강(驪江) 이씨(李氏) 문중 사내 이번(李蕃)이 결혼을 했다.
사위 이번(李蕃) 또한 처가(妻家)에 들어와 살았다.
아들을 둘 낳으니 장남 이름이 그 유명한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다.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性理學) 체계를 세운 공으로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명종(明宗)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종묘(宗廟)에도 위패(位牌)를 올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양동(良洞)마을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와 여강(驪江) 이씨(李氏)가 사는 마을이다.
이언적(李彦迪)은 외할아버지 손소(孫昭)가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 종가(宗家)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역시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난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은 청백리로 선정됐다.
손소(孫昭)는 공신이다.
외손자 이언적(李彦迪)은 선비 최고 영예인 문묘, 조선왕조 관료로 최고 영예인 종묘에 동시에 배향됐다.
두 사람은 불천위(不遷位) 지위를 받았다.
※불천위(不遷位)- 5대 이후 영원토록 집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스승이다.
조선 성리학(性理學)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다.
동방 성리학의 태두인 이언적(李彦迪)은 일찌감치 친영례(親迎禮)를 받아들여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 종가(宗家)는 처가(妻家)가 아니라 이곳 양동(良洞)마을에 있다.
종가(宗家)에 있는 그의 제청(祭廳) 이름은 무첨당(無忝堂)이다.
“조상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라(無忝祖考)”는 “서경(書經)” 군아(君牙) 편에서 따왔다.
양동마을 옆에 그를 기리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았다.
풍수가들 말에 따르면 서백당(書百堂)은 혈식군자(血食君子) 세 명이 날 길지다.
※혈식군자(血食君子)-“제삿상에 생고기를 올리는 큰 인물”이다.
경북 안동 지방은 제사음식에 생고기를 올린다
혈식군자(血食君子)둘은 우선 손소와 외손 이언적이다.
이언적은 외가인 이곳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이제 한 명이 남았다.
주변에서는
“다른 집에 뺏기지 않으려고 해산이 임박한 여자는 못 오게 한다”고 수군댄다.
정작 서백당 종손 손성훈(63)은
“나는 두 아이를 병원에서 낳았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하늘(天) 되려 하지 않고 그 하늘을 짊어질 군자(君子)는 어디에 있는가.
요즘 조국이나 추미애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을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어 양동마을 선인(先人)들이 생각 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