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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리’>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치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다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은총의 담지자? 낭비자?>
우리가 겸손하게 되면 다른 사람 위에 있으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눔을 어제 저는 했지요.
겸손하지 못한 제가, 다시 말해서 교만한 제가 저를 경계하는 뜻으로 겸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다음 말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는 선행을 배워라.”
(이사야 1,17)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3,10-11)
둘을 합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선생이라고 불리길 좋아하며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진 점은 옛날보다는 좀 겸손해진 점이 있고, 어디서나 남을 가르치려 드는 훈장 기질은 좀 나아졌지만 배우려는 자세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에 아직 저의 겸손은 멀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겸손하다고 할 수 없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그래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어디서나 배우고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진정 겸손하다고 할 수 있고 성숙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교묘한 교만이 있습니다.
삼십 대 후반부터 저는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 외에 다른 책은 거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참고하는 차원에서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답과 지침이 되는 것은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얻지 다른 책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그래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이것이 교묘하게 저를 영적으로 교만케 합니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며 은근히 남을 낮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우려는 자세일 때 그때 모든 사람 밑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 겸손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스승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더 나아가 섬기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은총의 담지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담지자(擔持者)란 맡아 지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누가 은총의 담지자가 되느냐 하면 겸손한 자가 되는 법이지요.
그것은 비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산꼭대기지만 다 흘려버리고 제일 낮은 계곡에 빗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바다가 제일 낮지만 제일 넓고 모든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의 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다 흘려버리는 낭비자지만 겸손한 사람은 은총의 가장 훌륭한 담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가르친다며 입으로 다 흘려버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 마음에 간직하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나는 담지자인지 낭비자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만나기만 하면 강력한 경고 말씀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날 선 발언의 이유들은?
거룩함을 가장한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실제 삶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중성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앞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덕에, 그리고 조금 나이가 든 덕에,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주로 하는 일이 허드렛일에다 수렵 활동이다 보니, 늘 입고 다니는 옷은 시장표 작업복이요 추리닝입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몇 년째 배수로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인 낙엽더미를 제거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보니,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넘어져도 크게 충격받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높은 데 있다가 급추락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전치 8주인데, 낮은 데 있다 보니,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즉시 일어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교만하거나 위선적이지 않더군요.
그들의 삶은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어떻게든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봐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말과 행실이 다르면, 그 말은 ‘빈말’이 될 뿐입니다>
1)
3절의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가 아니고,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말을 해도,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가 본래의 뜻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과 거룩한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실이(삶이) 전혀 좋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그 말 자체를 귀담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마르 1,22).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의 4장에 있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마태 4,6)
“사탄이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말은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도...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위선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하는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그 위선자는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될 뿐이고, 그들의 말은 전부 다 ‘빈말’이 될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지 간에,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과 가르치신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금하신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 10,24-25ㄱ)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능가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2코린 11,3-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겪었던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5)
12절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만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만을 희망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 - 경청, 회개, 섬김>
“살펴보소서,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
(시편 13,4)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국내외 상황이 그렇습니다.
내전 상황의 국내 상황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희망을, 꿈을, 빛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대혼돈의 시대에 은총의 거룩한 사순시기가 있음이 구원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일희일비, 부화뇌동, 경거망동할 것이 아니라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 안에 머물면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초발심의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막연한 그리움만 품으면서 정작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마음이 식고 가라앉아 멀어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다산>
“‘산앵두나무꽃이 펄럭이면서 펄럭펄럭 나부끼네.
그대 어찌 그립지 않겠소만,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 머네.’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먼 것이 있겠는가?”
<논어>
모두 실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진정 생각한다면 생각은 지금 여기서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마음으로만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시공을,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특히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을 배웁니다.
첫째, 부단한 자발적 경청의 삶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경청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 뒤따르는 겸손과 순명입니다.
경청이 바로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사순시기 경청의 선택과 훈련, 습관이 절실합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어리석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아아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영성생활의 기초가 침묵과 경청입니다.
회개 역시 침묵과 경청으로 시작됩니다.
갈수록 시끄럽고 혼란한 가치관 부재의 시대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침묵과 경청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말하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눠야 할 영적훈련의 사순시기입니다.
둘째, 부단한 자발적 회개의 삶입니다.
모두가 절박한 회개의 실천동사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대로 우리의 무딘 마음을 울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1.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자신은 물론 이웃 약자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가 선행과 공정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실천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축복이 따름을 밝히십니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 바,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포함합니다.
언행불일치의 삶, 타인의 인정을 추구하는 외적 허영의 삶이 바로 회개의 대상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이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이들의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 하십니다.
참으로 알맹이가 아닌 실속없는 껍데기의 삶을 추구하지 말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적 허영의 삶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회개입니다.
본말전도本末顚倒, 주객전도主客顚倒, 지엽말단枝葉末端의 무지에 눈먼 무분별의 어리석은 삶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회개입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의 회개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부단한 자발적 섬김의 삶입니다.
참된 회개의 열매가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실천이요, 섬김은 영성의 모두입니다.
자유 또한 섬김을 위한, 섬김을 목표로 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의 영성이요, 이는 섬김과 겸손의 영성으로 표현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모두가 명심해야 할, 배워야 할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의 진수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분뿐이시고 너희는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섬기는 이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지혜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입니다.
이어 주님은 자발적 섬김과 겸손이 참 영성의 잣대임을 설파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요, 겸손으로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자기 비움의 섬김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친히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경청과 회개와 섬김의 참된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50,23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4월 26일 토요일에 황창연 신부님이 ‘선교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수녀님이 포스터를 2장 만들었습니다.
사목 회의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사목 위원들은 대부분 파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를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한 주일학교 선생님과 홍보분과장은 하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가 좋다고 했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신문 광고에서도 파란색 바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장 눈에는 파란색 바탕이 좋아 보이지만 홍보용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던 사목 위원들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하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습니다.
구역을 나누는 것은 구역분과에서 하고, 사제관 신축은 건축 위원회에서 하고, 본당 설립 50주년 행사는 준비 위원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는 다수결이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은 결코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길, 생명 또한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는 우주에 여러 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고난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지은 나를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 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
사순시기에 본당에서는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지난주, 십자가의 길을 신자들과 함께 할 때였습니다.
5처에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5처는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된 것이지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형수인 예수님을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지를 세워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 삶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 중 부모님 돌봄을 전담하게 될 때, 직장에서 사람들이 내게 자기가 할 일을 넘길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하게 될 때,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나의 꿈이나 계획을 희생해야 할 때….
이런 상황일 때 “억울하다”라고 말합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하면 그 모든 보상을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억울함을 잘 보지 못합니다.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보상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억울함에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위로와 놀라운 힘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께 불충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무조건 실천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데, 그들은 아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자기 맘에 들어야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뜻 안에 머무르고 또 실천할 때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순간의 만족만을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내게서 멀리 밀어놓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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