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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신앙의 모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비오 9세께서는 요셉 성인을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1870년), 비오 12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요셉 성인께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로서 간구합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요셉성인의 ‘보편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하신 교황교서 <아버지 마음으로>(2020.12.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주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 위에 굳건한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필리 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는데 무조건 참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이고 존중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받은 만큼 되갚아 주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일깨워주는 스승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로움을 간직한 믿음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더 큰 사랑으로 그리고 더 큰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의 성 요셉: 고민을 오래 하지 말고 회의도 길게 하지 말라>
지금까지 성 요셉의 의로움과 정결함에는 많은 강론을 하였으나, 성 요셉의 기도라는 부분에서는 크게 묵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기도가 필수적이고, 성 요셉에게서도 그 특징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는, 혹은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고민을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단호합니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강한 사람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를 결정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기도하고 결정이 된 상태에서 와야 하고 책임자는 기도를 통해 빠르게 나아갈 길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전쟁이나 기업과 같은 경쟁 상황에서 빠른 판단력은 필수적입니다.
빠른 판단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이후부터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관식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황제의 왕관을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황 비오 7세가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1년 후인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러한 교만함과 홀로 결정해야 하는 지도자의 외로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아프게 경험하게 됩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른바 ‘백일천하’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약 7만 3천 명이었고, 상대편 연합군은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군 연합 6만 8천 명, 그리고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이 양쪽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 당일인 6월 18일,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전장이 심하게 질척거렸고, 포병과 기병의 이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오전 6시부터 공격을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측근의 많은 장군들은 즉각 공격할 것을 조언했지만, 모든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는 황제였던 그는 쉽게 결단하지 못한 채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조금 더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격 명령을 계속 미루었고, 그렇게 결정적인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무려 6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끝에,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첫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지연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공격이 늦어지는 동안, 18km 떨어진 곳에 있던 프로이센군 5만 명은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공격을 지연한 사이, 프로이센군은 오후 4시경부터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했습니다.
결국 저녁 7시가 될 무렵에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병력이 완벽히 합류하여 총 1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투를 너무 늦게 시작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미 피로와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단 하루의 우유부단함으로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프랑스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쓸쓸히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그가 홀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외로운 왕좌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신중하지만 빠르게 결단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눈치채고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은 ‘묵상’기도입니다.
마리아의 잘못을 자기가 다 끌어안겠다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여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관상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잉태가 곧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요셉은 그렇게 합니다.
이 외에도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꿈을 꾸고는 바로 짐을 싸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기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성모님과 결혼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결혼했다면 시간을 끌다가 메시아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모두 결단력이 좋고 빠릅니다.
1805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기사로서의 명예와 세상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살았지만, 전쟁터에서의 패배와 포로 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1205년 어느 날, 아시시 외곽에 버려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에 잠겨 있던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프란치스코는 망설이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즉시 자신의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아버지의 재물을 포기하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돌 하나하나를 손수 쌓아 올리며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호한 결단에 감동한 동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무너져가는 당신 집은 결국 탐욕으로 기울어져 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작은 하느님의 집인 다미나노 경당을 재건하기 시작한 그의 결단력은 바로 요셉 성인과 같은 기도에서 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도 있습니다.
그녀는 1929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인도의 콜카타로 파견되어 로레토 수녀회 소속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며 평범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9월 10일, 데레사 수녀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깊은 묵상 중에 강력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길거리의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소명을 명확하게 전하셨습니다.
데레사는 이 부르심을 듣고 즉시 결단을 내렸으며, 자신이 20년 가까이 지냈던 수도원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 콜카타의 빈민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맨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전 세계에 가난과 사랑의 가치를 전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절대로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 성인과 이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즉시 겸손과 용기로 결단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민을 많이 하지 말고, 회의를 길게 하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의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닉네임이 붙습니다.
마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양부, 나자렛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자들의 수호자, 성교회의 보호자...
구세사 안에서 요셉 성인의 공로와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지 미사 경문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찬 예식 내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리아 못지 않게 요셉 성인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습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평범하고도 단란한 결혼 생활은 하느님의 초대로 인해 일찌감치 물건너 갔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닭쫓던 개처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희망이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성가정을 위한 봉사와 헌신, 침묵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요셉 처지였다면, 입만 열면 불평불만에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묵했습니다.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흔쾌히 순응하며, 그렇게 순탄치 않은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덕행은 순례자로서의 충실함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성조 아브라함의 신앙을 느낍니다.
일어나라니 즉시 일어났습니다.
떠나라니 군말 없이 떠났습니다.
요셉 성인은 부단히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언제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같은 여정이었지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그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1)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는 요셉이 ‘율법의 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을 먼저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을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여기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남모르게, 즉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을 했다면,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파혼한 사실을 모르니까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도 아기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믿었기 때문에, 아기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파혼을 생각한 것인데,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지키려면 그 모든 일을 사람들 모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3)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 잉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가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을 알렸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4)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과연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가운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려던 대로 결혼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성령 잉태’에 관해서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아의 부모로 선택되었음을,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말입니다.
5)
겉으로 보이는 표현들만 보고서,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율법을 방패로 삼아서 율법 뒤로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지켰고, 온갖 어려움들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원래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 요셉 - 기도, 자비, 믿음>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입당송 말씀이 그대로 성 요셉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산처럼'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마치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인 성 요셉을 연상케하는 불암산입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제 소망이 담긴 시입니다.
“언제나 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또 하나 생각나는 불암산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때로 큰 믿음, 깊은 겸손, 고요한 마음의 성 요셉을 연상케 하는 불암산입니다.
이런 산같은 어른이,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이 바로 성 요셉이요, 이런 든든한 배경의 어른이 되어 노년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좋은 경각심을 줍니다.
“신뢰는 십년에 걸쳐 쌓이고, 하루만에 무너진다.
명성을 드높이는 것은 많은 사람이지만 몰락시키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
<다산>
“명문가가 되기는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몰락하기는 털을 태우는 것처럼 쉽다.”
<유씨가훈>
쌓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사 신중하고 조심하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성 요셉의 평생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늘 경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제 형님이 준 “정의, 효도, 우애”라는 가훈대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삼형제의 조카들도 생각납니다.
오늘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의 덕을 세 측면에 걸쳐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큰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연상케 하는 성요셉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끝까지 주님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한결같이 살아간 기도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침묵의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성 요셉의 침묵과 경청의 분위기입니다.
깊은 기도중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입니다.
주님의 성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속내의 비밀을 다 밝히십니다.
아마도 성 요셉은 평생 이 말씀을 명심하여 마리아를 보호하고 예수님을 키우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늘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 성 요셉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할 때 깊은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삶의 깊이입니다.
자비하기가 생명의 땅을, 생명을 바다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며칠 전 산책중 써놓은 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뿌리 내린
생명의 땅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품에 안은
생명의 바다
같은
하느님이
하느님 자비가 되고 싶다”
요셉의 하느님 같은 자비심은 약혼자 마리아가 혼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의 지혜로운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는 마리아의 안위를 배려한 자비의 사람, 존엄한 품위의 의로운 사람, 성 요셉이요 다음 대목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셋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적 고요는 믿음의 반영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아,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 요셉입니다.
역시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살았던 성요셉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함께 가는 자비의 삶, 믿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흡사 성 요셉의 참 좋은 선물인 태몽 같습니다.
예전엔 좋은 태몽도 많았는데 요즘은 태몽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이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물론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요셉의 순종의 믿음에 하느님의 기쁨과 고마움도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다음 사무엘 하권의 말씀은 성 요셉과 예수님은 물론 믿음 좋은 우리를 통해 실현된 축복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순종의 삶을 통해 검증되고 입증됩니다.
크고 작은 순종이 일상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반가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공동체의 참 좋은 배경인 기도의 사람, 자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또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에 응답하는 삶>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티브로 한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통을 지키려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변화를 꿈꾸는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료 추기경)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히 두 교황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두 사람의 깊은 고민과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를 지키려 했지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반면,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회가 좀 더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시절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하느님 앞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통을, 베르골료 추기경은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교회는 변해야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 예표라면, 신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오늘 저는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두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구약의 요셉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믿었지만,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 큰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과 배신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다소 조용한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헤로데 왕이 아기 예수님을 해치려 하자, 또다시 꿈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나자렛으로 가서 예수님을 양육합니다.
신약의 요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께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저는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요셉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자'였다면, 신약의 요셉은 '꿈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행동하는 신앙과 침묵 속의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약의 요셉을 통해 "가장 큰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나온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요셉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둘 다 꿈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둘 다 고난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셋째, 둘 다 중요한 순간에 용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요셉은 그 계획을 믿고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두 요셉과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의 요셉처럼 고난을 겪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신약의 요셉처럼 조용히 순종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을 읽고 있으면 크게 와 닿는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을 통해 쓰고 싶은 것도 떠올려집니다.
예전에는 책에 밑줄을 그어서 기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책에 표시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는 사람(다시 읽는 본인도 마찬가지)에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표시에 매여서 자기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표시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다 읽은 책을 본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어서 더 깨끗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밑줄보다 클립을 꽂아두었습니다.
이 클립으로 표시한 곳을 나중에 쓰면서 정리할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읽으면 왜 클립을 꽂아두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분명 크게 와 닿는 구절이었는데, 다시 보면 별 내용이 아닙니다.
이제는 곧바로 적습니다.
지금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미루면 잊어버립니다.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뒤로 미루곤 합니다.
그 순간에 해야 할 것인데도 나중에 해도 충분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명을 유한하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너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사랑의 실천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실천하는 결정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 간직하셨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강림’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의로운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성인이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기까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우거나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해서 돌로 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파혼으로 인해서 그 사랑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계시에 곧바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버리지 않고, 또 사랑을 즉시 실천하는 그 모습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뒤로 미뤄서도 또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계속해야 하는 사랑이고, 즉시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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